1. 인도(India)의
역사
(2-1) 인더스 문명 (기원전 3000-2000)
인도에는 두개의 큰 강이 대륙을 관통하고 있음. 히말라야에서 발원하는 갠지스강(강가강)은 동부 인도로 흘러서 벵갈만으로 빠져나가고
인더스강은 서부(현재 파키스탄 영토)를 거쳐 아라비아해로 빠져나감.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 유역에서 기원전
3,000~2,500년경부터 약 500년간 번성한 고대 문명을 일컬음. 인더스 문명은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등에 유적을 남기고 있는데, 유적을
통해 본 문명의 수준은 메소포타미아, 수메리아 등에 버금가는 세련된 문화였던 것으로 여겨짐.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는 질서정연하게
도시계획이 된 고대 도시로서, 벽돌로 이루어진 가옥과 도로, 하수시설 등이 발달된 도시였음. 인더스 문명은 고도로 발달된 후기 청동기 문명의
단계로, 종교는 다신교였으며 정치 체제는 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체제였음.
인더스강 유역의 최초의 주민은
프로토오스트랄로이드(버마, 말레이계 인종)로서 검은 피부와 납작한 코를 가진 중간 키의 인종임. 인더스강 유역의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문명을
일으킨 인종은 드라비다임. 그들은 그리스, 소아시아에서 이주해 왔음.
(2-2) 아리안 문화 (기원전 2000-1000)
인도 문화의 원형은 상당부분 아리안족이 인도 대륙을 침입하여 정착하면서 이루어졌음. 아리안족은 중앙아시아 일대에 살고 있던 유목민이었으나,
기원전 5,000년전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하여 수세기간 정착한후, 다시 각 지역으로 이동하였음. 인도에 이주한 아리안인은 페르시아에 정착해있던
부족으로서 인도-이란인이라고 함. 이들은 기원전 2000-1500년경 인더스강 유역에 침입, 드라비다인을 정복하였음.
인도에
침입한 아리안인들은 처음에는 펀잡지역에 정착하다가 서서히 갠지스강 유역을 따라서 동부로 옮겨가서 기원전 800년에는 벵갈지역까지 이동하였으며,
정복민족으로서 카스트의 상층부를 형성함.
인도의 계급은 크게 (1) 승려 및 사제계급인 브라만, (2) 전사.지배계급인
크샤트리아, (3) 상인계급인 바이샤, (4) 노예계급인 수드라, (5) 불가촉천민으로 나누어짐. 이러한 것은 마누(Manu) 법전에 명기된
이래 전통적 관습으로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근대화를 제약하는 악습이 되고 있음.
아리안 문화의 특징은 제정일치의
사회에서 신을 찬양하고 경건히 예배드리는 의식이 발달하였다는 것임. 특히 신에게 제사드리는 의식을 담당한 사제 계급인 브라만을 중심으로 제사
의식과 신에 대한 찬양 등이 집대성된 베다문화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음.
베다에는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아타르바베다
등이 있으나,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리그베다임. 나머지 베다들이 주로 제사의식의 형식에 관한 내용들인데 비해 리그베다는 신에 대한 찬가일뿐
아니라 인간성의 작용, 세계의 근원과 천지창조 등에 관한 철학적 사고를 망라한 인류 최초의 문학적 성전이라 할 수 있음. 베다 시대(기원전
1500-600)에 이어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푸라나등 경전에 입각한 힌두교가 발생함.
(2-3) 도시국가의 형성
펀잡 지역에서 갠지스강 유역으로 진출한 아리안인들은 서서히
도시국가를 형성하여 기원전 7세기경에 이르면 이미 상당한 세력을 지닌 도시국가들이 생겨남.
이 당시의 국가형태는 부족연맹과
전제왕권의 중간형태를 취하고 있음. 거의 모든 국가는 본질적으로 부족연맹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므로 원시적인 공화 정치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왕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음. 당시에 유명한 국가들은 거의 갠지스 강의 동부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특히 유명한 나라들로는 코살라, 비데하,
카시, 마가다, 앙가, 아반티 등임. 기원전 7세기에 이르러 인도 북부에는 코살라, 중부에는 마가다, 남부에는 비데하 등이 중심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서로 각축하게 됨. 도시국가의 출현은 필연적으로 정복전쟁을 야기했고 약육강식의 전쟁은 기원전 4세기경까지 이어짐.
이
정복전쟁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이는 마가다 왕국의 빔비사라(BC 582 - 554) 대왕이었는데, 그는 주변의 소국들을 차츰 합병하고 내치를
공고히 함으로써 대제국의 기반을 닦았음. 그의 아들 아자타 사트루는 부왕의 뒤를 이어 카시, 코살라, 비데하 등을 차례로 정복하여 명실공히 인도
대륙의 강자로 부상하였음. 마가다 왕국은 알렉산더의 침입 때까지 난다 왕조와 더불어 인도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을 유지하였음. 기원전 500년경
불교 및 자이나교가 발생함.
(2-4) 마우리아 제국
마가다국의 크샤트리아 계급출신인 찬드라 굽타는 기원전 321년 난다
왕조를 멸망시키고 마우리아 왕조를 건립,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동쪽으로는 벵갈만에 이르는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왕국을 건설함. 3대왕인
아소카왕(BC 272 - 232)은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남서부의 타밀지역을 제외한 전 인도를 통일함.
아소카왕의 업적중 특기할
만한 것은 불교진흥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점인데, 특히 석가모니 사후 사라져 가는 불전을 수집, 정리하였으며 백성들에게 불교문화를 전파함은
물론, 포교사절을 서쪽으로는 시리아, 이집트, 그리스, 마케도니아까지, 동남쪽으로는 미얀마까지 파견하였음. 또한 스리랑카에 왕자를 보내
포교함으로써 남방불교의 중심지가 되게 함은 물론, 불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음.
기원전 185년 마우리아
왕조의 군사령관이었던 푸샤미트라는 마우리아 왕조를 멸망시키고 숭가왕조를 세웠으나 기원전 70년에 망함.
(2-5) 쿠샨왕조
(AD 78-226)
AD 78년 박트리아 지방의 쿠샨족의 카니슈카왕이 서쪽으로 이란, 동쪽으로 중국의 한 왕조,
남쪽으로는 인도대륙의 중심부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하였으나 226년 이란지방에 기원을 둔 사산 왕조에 의해 멸망됨. 이후 인도는 많은 소국으로
분열되었으나 후에 동방에서 일어난 굽타 왕조에 의해 다시 통일되게 됨. AD 100년경 대승불교가 발생함.
(2-6) 굽타왕조
(AD380-606)
찬드라 굽타 1세가 굽타왕조를 세움. 찬드라 굽타 2세(380-413) 시대가 황금시대로서 문화적 르네상스를 구가함. 굽타왕조 초기 및
전성시대에는 불교가 융성, 말기에는 힌두교 및 자이나교가 부흥하기 시작함. 찬드라 굽타 2세 시대부터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훈족등의 침입이
개시됨. 굽타왕조는 606년 훈족에 의하여 멸망함. 훈족등 중앙 아시아인은 라즈푸트인으로 가칭하면서 굽타왕조의 영토에 힌두 및 자이나교 왕국들을
세움.
(2-7) 무굴제국 (1526-1858)
12세기 이후 이슬람의 인도 침입이 본격화되면서 1526년 티무르의 5세손 바베르에 의해 이슬람 왕국인 무굴제국이 건설됨. 그의 손자
악바르대에 이르러 데칸을 제외한 인도의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을 아우르는 대제국이 건설됨. 악바르 이후 150년간 전성시대 지속. 특히 샤
자한(1627 - 1658)과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1658-1707)시대에 이슬람교가 번성하여 오늘날 타지마할 등 이슬람 관련 유적을 많이
남김.
16세기초에는 구루 나낙이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절충, 일신교인 시크교를 창시함.
무굴제국은 이란 지역의
이슬람교도 침입, 1757년 영국과의 플라시 전투, 1857년의 세포이 반란을 거쳐 동인도 회사의 해체와 함께 1858년 영국의 직할지로
편입됨.
(2-8) 반영 독립투쟁과 건국
많은 정치단체가 18세기 후반에 생겨났으나 인도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중심 조직은 1885년 소집된 인도 국민회의가 맡게 되었음. 그러나 독립운동에 대한 영국의 냉담한 반응은 국민회의파를 점차 과격하게 만들었으며, 특히 벵갈의 분리(1905년)는 전인도인들의 분노를 사 보이콧 및 스와데시 운동이 전인도로 파급되었음. 이에 대해 영국은 분할통치 정책을 취하여 모슬렘과 힌두교도간 대립을 조장하였으며, 1906년에는 국민회의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모슬렘 연맹이 결성되었음.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인도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영국을 지지하면서 인도인이 영국에 적극 협조할 것을 호소하였음. 특히 바수(Basu), 진나(M.A. Jinnaj) 등 국민회의 대표들은 영국측에 대한 협조를 다짐하였음. 그리하여 막대한 수의 의용병과 군수물자가 제공되었으며, 인도 병사 120만명중 80만명이 전투요원이었음. 이러한 영국에 대한 협조는 전후 인도의 자치를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음.
자치운동은 1917년 절정기를 이루었으며, 영국의 인도상 몬타규(Montagu)의 성명은 인도 지도자들의 환영을 받았음. 그러나 1918년 1월 소위 몬타규, 쳄스퍼드 보고서가 발행되고, 이것이 1919년 인도 통치법이라는 명칭으로 공포됨으로써 인도인들을 크게 실망시켰음. 납세기준에 따라 남성의 10%만이 선거권을 갖고 여성의 참정권이 무시된 인도 통치법은 진정한 지방자치를 허락 하지 않아서 인도인의 전쟁 협조에 대한 보상으로서는 너무나 미약한 것이었음.
이를 계기로 국민회의내의 온건파와 과격파가 9년만에 다시 대결하게 됨. 그 결과 창립이래 계속 온건파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국민회의는 1917년 이후 간디(M. Gandhi, 1869 - 1948)등이 이끄는 진보파에 의하여 완전 장악됨. 진보파인 마하트마 간디는 만약 인도가 영국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전쟁이 장기화할 것을 우려하여 영국을 지지하였던 것인데 전후 요구대로 자치가 보장되지 않고, 오히려 1919년 2월에 발표된 로왈라트법(Rowalatt Act)에 영국정부가 인도에 대해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자, 1920년 국민회의에서 평화롭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불복종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함.
그러나 이 불복종운동은 영국 정부가 제정한 법률과 규정을 준수하지 말자는 적극적인 운동이었음.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영국 상품의 배격, 파업, 납세 거부 등 불복종운동이 벌어짐. 이에 당황한 영국정부는 향후 분리통치를 실시하겠다고 하면서 이슬람교 연맹을 회유하였으나, 이슬람 교도들은 도리어 간디와 협력하여 반영운동에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함. 이러한 힌두-이슬람교 제휴의 반영운동을 힐라파트운동(Khilafat Movement)이라 함. 이슬람 교도들은 무굴제국이 멸망한 후 칼리프의 지위를 유지해 온 터키왕을 정신적 지주로 생각해 왔었는데, 1차대전 결과 터키제국이 분열됨에 따라 영국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 것이 힌두-이슬람 제휴의 배경이 됨.
간디와 이슬람 교도들이 연합한 반영운동에 대처하기 위해서 영국 정부는 반영 인도 요인들 에 대한 체포,살인을 자행하였음. 그러나 간디는 영국 정부의 강경책에 대응해서 민중들이 폭력을 사용하여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을 저지시키면서 비폭력의 불복종운동을 더욱 강력히 전개하였음. 1927년 마드라스에서 열린 국민회의에서 인도의 지도자들은 2년 이내에 자치령으로 승격할 것을 영국 정부에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음. 이러한 영국의 정책은 국민회의내에 과격파의 부상을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와 1929년에는 과격파 네루 (Jawaharale Nehru, 1889 - 1964)가 국민회의의 의장으로 선출 되었음. 네루는 국민회의의 유일한 목적이 독립이라고 선언하고 이를 위해 간디에게 국민회의의 전권을 위임하였으며, 이에 간디는 다시 불복종운동을 전개함.
한편 힌두측을 대표한 간디와 함께 반영 힐라파트 운동을 전개한 이슬람교 대표는 알리 형제였으나, 후일 파키스탄 분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진나(M.A. Jinna)는 처음부터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운동에 찬성하지 않았음. 원래 진나는 국민회의와 이슬람교 연맹의 화합을 주선하는 등 국민회의에 성실하게 참여하였으나, 합법적이고 점진적인 영국의 정치적 개혁에 깊은 신뢰감을 갖고 있었던 진나는 국민회의의 성격이 변질되자 국민회의와 결별하고 활동 무대를 이슬람교 연맹으로 옮겨 1924년 동 연맹의 의장이 되었음.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국민회의는 인도 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으며 이에 영국은 자치령(Dominion)의 지위를 허용코자 하였으나 국민회의는 이를 거부하면서 Quit India를 요구하였음. 한편 모슬렘 연맹은 영국에 고무되어 파키스탄의 분리를 요구하였으나, 도리어 많은 모슬렘으로부터 반발을 받았음. 종전후 영국은 인도에 독립을 부여키로 결정하고, 인도, 파키스탄 분리안을 내놓음. 1946년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총선 결과 국민회의와 이슬람교 연맹 정부가 수립됨.
애틀리(Attlee)의 영국 노동당 정부는 인도가 영연방의 일원으로 남기를 희망하면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간의 화해를 도모하고자 각료사절단을 인도에 파견하였음.
각료사절단은 파키스탄 분리는 반대하면서도 힌두 다수의 A지역, 이슬람교 다수의 B지역, 이슬람교가 약간 우세한 C지역으로 나누는 안을 제시함. 이에 진나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음. 그러나 임시정부 구성을 놓고 국민회의와 이슬람교 연맹 사이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는데, 이슬람교 연맹은 국민회의 대표와 이슬람교 대표의 동수를 요구하였으나 각료사절단은 이를 거부하였음. 간디는 각료사절단에 대해 처음에는 호의적이었으나 C지역의 형성으로 벵갈주와 아쌈주가 병합될 경우 이슬람교에 의해 전지역이 지배될 가능성을 우려하여 태도를 바꾸었음. 네루가 다시 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1946년 각료사절단의 계획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자 진나가 이를 비난함으로써 통일 인도의 마지막 가능성은 사라지게 됨. 인도 총독은 국민회의와 이슬람교 연맹을 화해시키기 위해 간디와 네루에게 접근하여 각료사절단이 제시한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으나 거부당하였음.
한편 애틀리는 1948년 6월 이전에 인도의 정권 이양을 발표하고 이를 위해 마운트배튼 (Mountbatten)을 총독으로 임명하였음. 1947년 3월에 취임한 마운트배튼은 가능하면 더 빠른 기간안에 정권 이양을 추진하기 위해 국민회의 지도자들과 접촉하였는데, 국민회의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네루나 파텔은 모두 인도-파키스탄의 분리에 긍정적인 입장이었으나 간디는 분리에 반대 입장을 취했음. 그후 간디의 영향력이 현저히 쇠퇴하면서 국민회의의 주도권은 네루와 파텔에게 넘어갔음. 인도의 분리와 두 자치령 탄생에 대한 마운트배튼의 분리 계획안은 모든 정당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영국 정부도 이에 동의하였음.
1947년 8월 15일 약 200년 동안의 영국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함으로써 인도인들의 희망은 달성되었으나 인도 대륙에서 수천년의 전통을 이어온 인도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됨. 네루는 델리에서 인도의 초대수상에 취임하였고, 진나는 카라치에서 파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