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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에게서 열정과 창조를 배웠다<유해근목사>
창조목회의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창조라는 말은 이제 전혀 새로운 화두가 아니다. 창조경제니 창조학교니 하는 용어를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 창조목회라는 말도 새삼스럽지 않다. 나는 늘 창조하는 삶에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 내게 창조하는 삶은 도전하는 삶과 다름 아니다. 최고가 아니라 최초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나의 다문화 사역은 그 출발부터가 창조하는 일이었다. 언제나 새로움을 추구하고 최초의 삶에 관심을 갖는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창조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창조는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이지만 그와 유사한 창조적 모방은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으로부터 내 삶의 도전기는 시작된다. 나의 창조적 삶에 대한 동경은 출애급기의 탈출 이야기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창조하는 일은 경계를 넘어서는 용기를 요구한다. 용기있는 자만이 현실의 울타리로부터 탈출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람만이 새로움에 대하여 고민하고 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현실안주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움과 창조적 삶으로의 탈출을 요구한다. 그것은 야성의 삶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이며 광야의 경험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광야는 야성을 키우기에 가장 좋은 교육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하는 일과 야성의 삶, 그리고 광야는 한 울타리의 형제간처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창조적 삶을 위해서는  먼저 홍해를 건너는 결단을 하여야하는 것이다. 위대함은 홍해를 건너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이며 은총이기 때문이다.

'위대함을 원하면 홍해를 건너라'는 말은 내게 하나의 철학이며 신학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추구하는 가치이며 우리 사역의 내용이다. 홍해를 건너는 결단 없이 나는 살 수 없었다. 내 인생은 홍해와 맞닥뜨리는 사람들이 느끼는 막막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릴 적 나는 무척이나 샌님같은 아이였다. 누구에게도 큰소리를 내지 못하는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에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에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말을 못해 그만 바지에 볼일을 보았던 창피스러운 기억이 남아있다. 그때 선생님은 나를 그대로 집에 돌려보내어 볼일을 본채로 집에 왔었다. 왜 그런 기억은 잊혀지지도 않는지... 그정도로 나는 말도 잘 못하는 아이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1학년 2학기 때 지금의 광장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였고 그때 우리 집은 무척 가난했다. 나는 밤마다 우리집은 왜 이렇게 가난할까를 늘 고민하며 자랐다. 지금의 하남시로 이사를 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하남시에 있는 집에서부터 지금의 광진구 광장동 초등학교까지 오려면 한참을 걸어 나와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너서 학교까지 또 걷기를 장장 두시간, 왕복 네 시간을 걸려서 학교를 다녔다. 아마 지금의 내 체력이 이정도라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초등학교 때 걸으면서 길러진 체력 덕분이라 생각한다. 나보다 한 학년 어렸던 동생은 곧잘 가방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나에게 가지고 오라며 막무가내로 강짜를 부리곤 했었다. 그러면 나는 두말없이 동생의 가방을 들고 한강 다리를 건너야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구에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마치 세상을 사는 법이라 생각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과는 거의 싸움이나 큰소리가 나지 않을 만큼 존재감없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아마 선생님들이나 친구들도 나를 거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유일하게 기억이 난다면 중학교 2학년 때다. 그 때 담임선생님께서 나에게 가장 존경하는 분이 누구냐고 물어보셨는데 그때 나는 우리 아버지가 가장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과연 그랬을까? 아마 그렇게 대답한 데에는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무서웠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아버지가 무섭다는 생각에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처절한 삶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보려고 애쓰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새벽같이 일어나 하남시에서 자전거를 타고 중곡동 시장에 가셔서 사람들이 버리는 생선찌꺼기들을 모아 자전거에 싣고 오셨다. 양계를 하시던 아버지는 그렇게 해서라도 사료값을 절약하셔야했다. 그런데 사실은 절약만 한 것이 아니라  매우 영양가 높은 달걀을 만들어 그만큼의 부가가치를 올리는 방법을 알고 계셨다.

닭이 먹는 기존의 사료에 생선 대가리와 껍질, 생선 부산물을 함께 넣고 푹 끓여 모두 버무린 후, 논과 밭에 자라난 풀 등을 낫으로 싹둑 잘라 함께 섞고 그것을 촘촘한 망에 먹기 좋게 걸러낸다. 그러면 그 냄새는 정말 기막힐 정도로 구수했다. 나는 지금도 그 냄새를 잊지 못한다. 우리 집안은 언제나 생선 부산물 끓이는 비린내와 사료가 함께 어우러지는 야릇한 냄새들이 진동했다. 아버지는 새벽마다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 그 먼 길을 다녀오셨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또 해도 끝이 없는 일들을 아버지는 혼자서 말없이 감당하셨다.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아버지만의 운명 같은 노동이었다. 아버지는 노동자이며 농민이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어하던 창조자였다.

언젠가는 엿 공장에서 나오는 엿밥을 가지고 오시기도 했다. 그러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통속에서 어우러진다. 생선 끓인 것, 야생의 온갖 풀들, 엿밥 찌꺼기, 기존의 사료 얼마 등. 이 모든 재료를 버무려 한 삽씩 떠서는 다시 작은 채에 곱게 내린다.
그렇게 배합된 사료는 닭에게 어떤 맛이었을까? 우리 집 양계장의 닭들은 미친듯이 사료를 먹어치웠다. 정말 맛있는 사료였으리라. 하긴 가끔씩 아버지를 돕던 나도 그 맛이 궁금해 조금 입에 대어보기도 했었으니까. 그러면 그 맛이란 달착지근하기도 하고 구수하기도 했었다.
그 사료를 먹은 우리집 닭들은 노란색 노른자가 짙어 정말 보기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그 맛도 최고인 달걀을 쑥쑥 잘도 낳았다. 닭도 건강했고 다른 집 달걀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달걀을 많이도 낳았다. 그것만이 아니다. 아버지는 닭똥도 매우 귀한 것으로 만드시는 귀신같은 능력이 있었다. 닭똥도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숙성시켜서는 닭 사료로 만드는 비법을 알고 계셨다. 우리는 모든 것이 재활용이었으며 조금도 낭비하지 않았고 모든 것에 가치를 매기는 방법을 배웠다.

아버지는 그렇게 나와 동생을 길러 주셨다.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처럼 보였다. 작은 몸둥아리 하나로 수천마리 닭을 혼자서 키우셨다. 모든 것을 자립하고 자생하는 길을 선택하시려 했고, 할 수 있으면 절약하면서도 가장 높은 부가가치를 올리려고 애를 쓰셨다. 그러려면 누구보다 부지런해야 했으며, 삶은 언제나 그렇게 고달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끔씩 아버지는 너무 힘이 드시면 몸부림을 치며 우시기도 했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아버지를 안고 함께 울었다. 아버지는 언제부터인지 나보다 작았고 나는 아버지보다 큰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힘이 들어 우시는 날이면 그날 밤 나는 정말 혼자서 울었다. 아버지가 불쌍했고 자랑스러웠으며 그래서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고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우리집 닭들은 다른 집 닭하고는 달랐다. 아버지의 창조적인 닭 사육은 가난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었지만 그래도 어린 나에게는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쉽게 살지 말라는 아버지의 삶은 내게 고스란히 전수되었다. 아버지는 쉽게 사는 것 대신 고통스럽지만 새롭고 창조적인 것에 주목하셨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매우 의미있는 것이었으리라. 작은 소득이었지만 그렇게 돈을 버셨고 주변의 땅을 한 평 두 평 사 모으셨다. 그러면 그만큼의 땅에서는 또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하루종일이 아니라 일 년의 단 한 시간도 쉼없이 일을 하셨다. 그렇게 노동을 하시면서도 아버지는 다른 사람하고는 다르셨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이면서도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하면서 일을 하셨다. 뿐만 아니라 밭에서 자라는 채소나 곡식도 보기 좋게 키우셨다. 열과 오를 맞추는 것도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아무렇게나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쉽게 하지 않으시려는 아버지의 본능적 노동법칙은 내게 그대로 전해졌다.

어쩌면 나의 도전적이고 창조적인 삶은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유전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창조적 능력이 탁월한 분이셨다. 비록 세상적으로는 배운 것 없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것 없어 보이지만 아버지는 늘 생각과 고민과 창조적인 삶에 대하여 도전하신 분이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삶을 배웠다. 창조하는 것과 도전하는 것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과 운명을 거스르려는 살아있음에 대한 의미까지 모두 아버지에게서 나는 인생을 배웠다.
아버지는 창조적 노동자이며 창조하는 농부였다. 그런 아버지에게서 인생을 배웠고 그것은 내 목회와 인생에 가장 소중한 배움이며 교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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