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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섬사람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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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게 작은아이 영길이가 없었다면
이제 와서 조금은 비겁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작은 아들 영길이는 내게 축복이었다고...
내 인생의 변곡점에는 영길이가 있었다. 만약 영길이가 없었다면, 달리 말하여 만약 영길이가 건강하고 온전한 아이로 태어났더라면 나와 우리 가정은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내 운명은 그리 긍정적이거나 아름다울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여전히 방황하며 가정을 멀리한 채 내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했었을 것이다.
영길이는 정신지체 2급 장애아로 태어났다. 늦되는 아이가 있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와 아내는 늦되는 영길이를 지켜보며 석연치 않은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영길이의 문제는 나로부터 비롯된다. 아내가 작은 아이를 임신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언제나 내 마음대로였으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삐 풀린 망아지 그 자체였다. 그러니 가정을 세우고 아내를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아빠로서의 마음과 성품도 준비되지 않은 것이다. 아내는 나로 인하여 언제나 근심이었다.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임신을 하고서도 언제나 불안하게 살아야 했다. 그것이 그대로 아이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아내와 영길이에게 정말 미안하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싶다. 늦었지만 영길이의 장애는 내 책임임을 고백한다. 나로 인하여 저 아이가 이토록 힘들게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아프다.

나는 한없이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이 살았다. 군에서 군목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어느 누구와도 싸워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무섭던 보안부대의 압력과 사찰에도 전혀 굴함이 없었다. 아내는 언제나 내 밥(?)이었다. 내가 큰 소리를 치면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다. 어이없게도 나는 그것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마치 내가 잘나서 그 모든 것을 누리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 모든 굴레를 영길이가 뒤집어쓰고 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나는 절망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늦어 버렸다. 나는 긍정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모든 상황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거부하고 있었다. 내게서 영길이같은 장애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니 더욱 방황하고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아내는 매일 같이 나의 원망과 불평, 나아가서는 폭력적 언사도 받아내야 했고, 나는 마치 이 모든 것이 아내의 책임인 냥 도망가고 있었다. 아내는 나보다 더 절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를 끌어안고 눈물로 기도하며 아이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고 싶다는 엄마로서의 모성애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내의 그 고통이 이제 와서 절절하게 느껴진다.

내가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구로동으로 도망치듯 외국인근로자 선교를 한답시고 들어간 것도 사실은 영길이의 문제에 대한 일종의 회피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마치 내 유학의 발목을 잡은 것은 영길이며 아내 때문이었다고 책임을 전가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무척이나 비겁하다. 정말 내가 이렇게 비겁하고 옹졸한 남자라는 사실이 화가 난다.  나는 그 당시에 그렇게도 무책임한 가장이었다.

나는 비겁함을 넘어 여전히 성숙하지 못한 존재였다. 교만함을 무책임으로 덮으며 주어진 상황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으려는 끔찍이도 이기적인 아빠이며 남편이었다. 나는 가장으로서 자격 없는 사람이었다.

이제 영길이가 태어난 지 24년이 지났다. 나보다 키가 크고 잘생긴 아이는 언제나 웃는 미소 청년이 되었다. 사람들은 우리 영길이의 미소를 살인미소라 부르며 사랑스러워한다.
아이는 몸이 약해 열이 오르면 언제나 경기를 하고 고꾸라지곤 했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소리를 지르고 미친 아빠가 되어 방황했었다. 아이를 다른 방으로 데려 가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아내를 윽박질렀다. 나는 아이를 내 삶의 발목을 잡는, 그래서 내 운명의 훼방자로 여기고 있었다. 저 아이 때문에 내 운명은 이렇게 절망이라며 혼자서 분노하고 내 삶을 저주했다.
우리 집안에 저주의 흐름이 저 아이로 나타났다며 정말이지 말로 다할 수 없는 폭언으로 아내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내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냥 눈물로 말하고 있었다. 그랬다. 마치 아내가 그 모든 십자가를 다 지고 가겠다며 그래서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아내는 내 모든 저주의 폭언도 감당할 것 같았다.
아이는 스스로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으로 자신을 저주하려던 아빠의 그 한없는 미성숙과 무책임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는 말하지 못했다. 속으로 말하고 싶었겠지만 아이의 입에서는 언제나 ‘아빠, 사랑해요’ 였다. 그래서 나는 더욱 화가 났었다. 사랑한다고 하는 아이의 그 말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아프게 했다.
나는 미쳐있었다. 아빠가 아닌 광기의 남자로 살았다. 영길이와 아내에게 정말 사과하고 싶다.

만약 영길이가 없었다면 반대로 나는 행복하며 의미있는 삶을 살았을까? 그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나는 아이를 내 미성숙과 무책임과 무능함의 핑계로 삼았던 것이다.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스스로 늪에 빠지고는 마치 아이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이제 와서 나는 분명히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아이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였다고 고백한다.
구로동에서의 사역은 영길이에게 핑계를 대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니 감사할 것도 은혜가 있었을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그렇게 끌려가는 사역이었는지도 모른다. 미국대신 구로동으로 들어간 것의 인과관계가 마치 영길이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영길이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영길이를 보내 주신 하나님에 대한 분노와 내 인생에 대한 끝없는 자학이 구로동 사역의 출발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노에처럼 살아가는 외국인 근로자들과 그들의 한과 분노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한 자괴감등이 얽히고설키어 나는 병이 들었다. 단순히 눈이 문제가 되었을뿐, 사실은 내 인생 전체에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문제가 생긴 것이다.    

하늘의 섭리를 모르면 끝없이 고통스러운 일들이 반복된다. 영길이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나를 향한 축복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거나 깨닫기 전에는 여전히 고통의 출발점이었다. 축복과 고통은 동전의 양면처럼 다가온다. 만약 영길이가 축복이었다면 축복의 역사가 이어질 것이었고, 그러나 그 아이를 고통과 저주로 받아들였을 때에는 내게 여전히 그 저주와 고통이 반복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나는 바보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영길이를 축복으로가 아니라 저주로 보았으니 말이다. 분노의 마음은 또 다른 분노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그 분노는 나를 병들게 한다.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축복의 통로로 보내주신 하늘의 섭리를 모르고 저주라며 울부짖고 괴로워하였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외국인근로자들을 만나면 영길이가 오버랩되었다. 영길이에 대한 분노가 외국인근로자들의 삶에서 투사되었다. 그 당시 나는 그것을 몰랐다. 의지적으로 영길이를 축복의 통로로 받아들여야 했지만 나는 그런 믿음도 마음도 갖고 있지 못했다. 외국인근로자들이 힘들어 하면 그것을 마치 내 삶의 분노로 더 강하게 투사하고 있었다.
구로동에서 병이 들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어리석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분노였다. 갖지 않아도 되었을 분노. 영길이 때문에 내 삶이 이렇게 되었다는 핑계 아닌 분노 그리고 이어지는 타인에 대한 투사.
구로동에서 뚝섬지역으로 사역을 옮긴 것은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뚝섬은 광야 같은 곳이었다. 아무 것도 없이 몸 하나 뿐이었다. 어느 교회 지하실을 얻어 얹혀사는 노숙자 같은 신세였으니. 인정받기는커녕 매일같이 찬밥신세요 천덕꾸러기 대접뿐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분명히 변화된 것이 하나가 있었으니 그것은 아내와 아이들이 사역에 참여하기시작한 것이다. 나는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남의 더부살이를 한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 시간들이 행복했음 때문이다. 나는 정말 그 시절이 행복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주일 저녁 모든 사역을 마치고 집에 가는 날이면 아이들과 전철을 타고 왕십리로 가서 다시 상일동행으로 갈아탄다. 주일 저녁의 전철 안이란 그저 고단한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그 일요일 저녁도 쉬지 못하고 어딘가로 분주히 돌아다녔을 사람들의 고단함만 가득했다.

그들 중 그전철안에는 언제나 외국인근로자들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 네팔이거나 스리랑카 혹은 필리핀 사람처럼 보이는 이방인들이 있었다. 영길이는 그때까지도 말을 잘 못했다. 마음속으로는 말하고 싶었을테지만 아이는 그저 손가락으로 넌지시 외국인을 가리키곤 했다. 아빠를 흔들며 저기 외국인이 있다고 가르쳐준다. 아빠가 사랑하는 친구들이 저기 있다고 말이다. 아이는 내 사역의 동역자로 커가고 있었다. 우리 공동체의 외국인 친구들 가운데 몸이 아파서 몇 주간 오지 못하게 되면 영길이는 그 사람을 반드시 기억하고 몇 주 만에 다시 돌아오면 무척 반가워하며 안부를 묻곤 했다. ‘이제는 안아파요? 괜찮아요?’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는 얼굴을 비비며 사랑을 표시한다. 그러지 말라고 가르쳐도 영길이에게 그 사람들은 사역의 대상이며 사랑스러운 친구였다. 나보다 더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 영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당시 우리 공동체에 나오는 외국인친구들이 교회에 나오면 나보다 영길이를 먼저 찾기도 하였다. 영길이가 보이지 않으면 영길이가 어디 갔느냐며 묻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내 사역은 마치 영길이가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웃기는 일이다.

구로동에서의 사역이 분노였다면 뚝섬에서의 사역은 감사요, 기쁨이며 그 자체로 행복했다. 영길이를 포함한 우리 가족 때문이다. 나는 나그네들을 상담하고 영규와 영길이는 그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놀고 있었으며 아내는 가난했던 주방에서 먹을 것을 준비했다. 그리고 우리는 눈물로 기도하고 감사했으며 기쁨으로 서로를 먹여 주는 아름다운천국을 만들어 갔다.
영길이는 그 천국의 통로이며 웃음을 선사하는 감사의 통로였다. 그리고 내 눈도 조금씩 나아져갔다. 어느새 병원에서는 거의 완치가 되었으니 그만 오라는 의사의 소견도 들었다. 남의 교회였고 그곳에서의 찬밥신세는 이어졌지만, 그리고 언제나 그 더부살이를 끝낼 수 있을지 기약 없는 노숙자 같은 삶이었지만 아내가 함께 도왔고, 두 아이가 잘 자라주었으며  특히 영길이가 우리 공동체 식구들의 마스코트처럼 늘 웃고 다니는 모습이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영길아!”
그때는 왜 그랬을까? 왜 아빠가 그렇게 화가 나서 살았는지 참 후회스럽구나. 네가 아빠의 작은 아들이 되었음을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하고 방황한 그 과거가 참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구나. 영길아! 참으로 미안하다. 너에게는 말로 다하지 못할 만큼 죄스럽고 자꾸만 마음이 아프기만 해. 너를 보내신 이의 섭리와 뜻을 알았어야 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원망했으니 그래서 지금 이렇게 후회하는 것이 참으로 바보스럽게만 느껴지는구나.
어딘가 아파서 우는 너를 이해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소리지르며 빨리 너를 데리고 나가라며 짜증을 내었던 아빠를 너는 어떻게 생각했었니? 너는 그때를 기억하지?  사실 너는 다 알고 있었을 거야. 이제야 아빠는 그걸 느낀단다.
아마 너는 그때를 분명히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 얼마나 너를 구박했었는지 너는 잊지 못할 거야. 걷다가도 길거리에서 고꾸라지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 그리고는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왜 너와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며 하나님을 원망했었어. 말을 제대로 못하고 바보처럼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너를 멀리서 바라보면 그냥 외면하고 돌아서기도 했어.
다른 사람들이 두 아들의 이야기를 물으면 형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하고 너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지. 그래도 작은 아들은 무슨 공부하느냐고 물으면 그냥 웃고 넘어가려 했어. 너를 장애아이라고 아니 내 아들이 장애를 갖고 태어났노라며 자신 있게 말해야 했는데도 아빠는 숨기고 싶었던 모양이야.
너는 언제나 아빠의 두 얼굴을 부끄럽게 하는 좋은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아이구나. 좋은 것만을 축복이라 여기는 이 세상과 믿음 없음에 대하여 너는 무척이나 많은 것을 내게 가르쳐 주는구나.
영길아! 오늘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너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이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쓴다. 정말 미안하다.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한 것 정말 아빠가 잘못했다.

요즘 영길이는 우리 공동체 청년 사회적기업에서 일을 한다. 우리가 시작한 코바코 레스토랑에서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한다. 의젓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아이를 보면 그저 웃음이 나오고 감사하다. 일인분 인생을 살아가려는 아이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응원하고 싶다.
'잘한다 영길아, 계속 그렇게 앞으로 가거라. 이젠 너 혼자 갈 수 있겠지?'

영길이는 나에게서 독립해 가고 있다. 그리고 나도 영길이로부터 독립하려 한다. 서로의 인생을 인정하고  동등한 인격자로 대우하려 한다. 더 이상 영길이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내 인생의 족쇄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내가 영길이로부터 얻은 것이 너무 크다. 아이에게서 나는 새로운 삶을 배웠다. 영길이로부터 나는 비로소 사람됨의 의미를 찾았다.
영길이는 다시 도전할 것이다. 본인이 그렇게도 호주를 가고 싶어 한다. 영어도 못하면서... 하지만 아니다. 영길이는 영어에 대한 순발력이 대단하다.
아침마다 출근하는 차안에서 영어 한마디를 하라고 하면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굿모닝'을 연발한다.
그렇게 웃으며 출근하는 우리 가족은 아침마다 감사다. 아내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눈물 자국을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너무 웃어 잔주름 생길 것 같다고 환하게 능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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