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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와 함께하는 이슬람선교학교 2.그리스도안에서 하나 됨을 아는가?

갈라디아서3:26-29

 

3:26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3: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3: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3:29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라 했다. 그가 굳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 됨을 말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예수 그리스도는 장벽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인간들이 갖고 있는 편견과 차별의 모든 벽을 허물어야 가능하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존재했던 그 시절에 바울은 '장벽은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인간들 사이의 모든 장벽을 허물기 위함이라고 했다. 장벽을 허무는 그 혁명적인 선언은 지금의 잣대로도 가히 급진적이다. 차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선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큰 밑그림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선언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라고 한 바울의 선언일 것이다.

 

교회의 하나 됨은 하나님 나라의 모델

 

터키에서의 이슬람 선교학교는 하나 됨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하나 됨의 모델은 H선교사 부부와 그 가정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사랑만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인간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하나 되게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어떤 인간적인 조건이 있었던가?

배운 자들과 배우지 못한 자들 간의 장벽을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어떤 간극도 찾아볼 수 없다.

예수의 제자들은 어부였다. 배우지 못하여 무식하고 가난한 민중들이다. 그들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부르실 만큼의 가치가 있었단 말인가? 조금만 높아져도 아니 조금만 배워도 낮은 자들을 향해 교만으로 가득한 우리와 비교하면 예수의 그 모습은 이해 못할 배신이다. 존재의 가벼움으로 가득한 인간을 배신하는 예수의 혁명적 삶은 오늘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준다. 우리에게 벽은 왜 존재하는가? 벽이란 우리안의 차별이다. 그 차별은 낮은 자가 만든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가지고 배우고 힘 있는 자들이 만든 죄의 결과다. 경계와 담장을 쌓고 만들어 낸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을 구별하고 타인을 차별하며 온갖 교만으로 선을 넘어서지 말라는 의미의 벽을 쌓는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부르심의 사건은 그 자체로 파괴다.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부르심의 사건은 인간사이의 모든 장벽을 용납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창조적 파괴의 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또한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과 대화는 어떤가? 이방인 여인을 만나는 유대인 청년의 창조적 파괴의 사건은 계속된다.

 

요한복음4:5-14

5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4:6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4:7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4:8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4:9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4:10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4:11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4:12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4:1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4:14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나는 이 장면을 상상하면서 예수의 혁명적 파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곤 한다. 장벽이 왜 존재하는가를 고민하셨던 예수의 혁명적 파괴를 보아야 한다. 구원은 독점될 수 없다는 의식의 혁명과 경계와 장벽에 대한 거부는 예수의 존재 자체다. 그의 오심은 인간의 구원이었다. 구원이란 차별의 거절이다. 그것은 경계와 장벽에 대한 저항이다. 누구든 장벽을 만들면 그것을 파괴하라는 것이 그의 구원관이다. 구원은 장벽을 허무는 파괴의 작업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 남자와 여자 사이의 장벽은 예수에 의하여 파괴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존재목적을 설명한다. 그는 우리에게 창조적이며 혁신적인 파괴를 보여줌으로 미래의 자본과 인간사이의 모든 장벽까지 허물라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나는 지금 하나 됨을 보고 있다. 한국인과 이란인 사이에는 장벽이 있었다. 기독교와 무슬림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있었다. 문화와 문명의 장벽은 배타적인 한국인의 감성이었다. 예수를 믿어도 우리는 차별을 더욱 공고히 했을 뿐 단 한 번도 그 장벽을 허무는 노력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 오히려 교회와 기독교는 그 교리적 배타성으로 모든 종교와 인간을 차별했었다. 그리고 기독교의 이름으로 살인과 전쟁을 했었으며 거룩함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영혼들을 향하여 저주의 화살을 쏘았다.

그런데 여기는 하나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 됨을 삶으로 보여주는 H와 B의 모습이 아름답다.

이란인 남성과 한국인 여성 사이의 사랑이다. 기독교와 무슬림의 사랑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었다. 아들 요한이와 딸 에스더는 그들 가족의 사랑의 열매다. 아름답고 행복해 보인다. 그 모습이 참 좋다. 계속 그렇게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기를 바란다. 돈은 없고 사람들에게 자랑할 것 없지만 지금 그대로가 천국이니 당신들이 승자라고 말해주고 싶다.

예수께서 살아내고 싶었던 장벽 없는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인들이다. H선교사 부부는 비록 낮은 곳에서 이름 없이 살다가 만나 사랑했지만 그것이 진정 예수가 바랐던 사랑이니 그들이 이긴 거다. 그들이 바로 천국의 주인인 것이다.

내가 H와 B의 사랑을 이어주는 주례자로 섰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바벨에서 오늘 터키까지

창세기 11:1-9

11:1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11:2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11:3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11:4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11:5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11:6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11:7,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11:8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11: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바벨은 인간의 죄로 인한 분열과 소통의 부재를 상징한다. 언어의 소통이 불가능함으로 인간은 서로 자신의 말만 하려 한다. 자기의 말만 하고 타인의 언어는 들을 수 없는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것이 전쟁을 만들고 더 큰 고통을 던져주었다. 불행하게도 바벨의 사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인간은 분열의 영이 지배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분열의 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기만의 울타리를 만들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양 살고 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인생들인가?

그러나 여기 터키에서 우리는 하나 됨을 본다. 이란과 한국인 사이의 언어의 장벽은 없다. H와 B선교사 부부가 소통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 사이에 다리를 만들고 갈등을 해소한다. 먼저 그들이 천국이니 그 기쁨이 흘러 우리 모두에게 넘쳐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웃음이 끊이지 않고 감격이 충만하다. 바벨의 저주를 극복하고 지금 여기 터키에서의 감격을 이루는 것이 선교다.

바벨의 저주를 극복하는 선교적 삶은 행복하다. 나는 터키에서 이슬람 선교학교를 통하여 새로운 비전과 선교에 대한 의미를 찾았다.

호잣트 선교사의 가정이 그대로 선교적 가정이다. 그들의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 속에서 이슬람 선교의 미래를 보았다. 이미 그들은 천국을 이룬 가정을 통해 선교를 하고 있었다. 다문화라는 차별적 시선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그리스도안에서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 많은 무슬림들에게 이미 선교를 하고 있었다. 아무런 벽도 없이 언어와 문화의 한계를 극복한 그들이 진정 참 선교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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