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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톡 52 네팔을 추억하며

네팔을 추억하며
필자가 네팔 노동자들을 처음 만난 것은 1993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네팔 사람이 5천 명 정도 있었다. 지금은 2만 9천명 넘는 네팔인이 있으니 그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필자가 처음 네팔인을 만났을 때 받은 인상은 무척이나 온순하고 똑똑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그마한 몸집이지만 매우 다부져 보였다. 그들이 했던 일은 여느 외국인이나 마찬가지로 힘들고도 위험한 일이 대부분이었다. 한번은 안양의 어느 작은 공장 기숙사에서 잠을 자던 네팔인 노동자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갑자기 사람이 죽었으니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를 놓고 공장주와 담판을 벌여야 했는데 공장주는 아무 책임이 없다고 찾아오지도 않았다. 네팔에서는 가족들이 울부짖고 있고 그의 친구들은 망연자실 나만 쳐다본다. 필자는 매우 참담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었다. 오직 네팔 현지에서 그의 가족만이 죽어간 남편과 아들을 위하여 울고 있을 뿐이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열흘 동안 죽은 자와 동숙을 해야 했다. 당시의 영안실은 지금처럼 시설 좋은 곳이 아니었다. 갑갑하고 냄새나는 작은 영안실 한 구석에서 나는 죽은 네팔인 노동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밤마다 죽은 자를 생각하며 필자는 울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회사에서 오백만원의 위로금을 받았으나 그 것으로 장례를 치르기보다는 고향의 가족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 하여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적십자사에서 제공한 작은 영구차에 시신을 싣고 성남 화장장을 찾아갔다. 무료로 화장을 하고 필자는 그 죽은 자의 작은 유골함을 들고 논두렁길을 걸어 나왔다. 그날은 하루 종일 그렇게나 비가 많이 왔었다. 비를 맞고 나오면서 필자는 정말 많이도 울었다. 죽은 자가 가여워서 울고, 고향의 가족들이 불쌍해서 울고,  남아있는 네팔인 노동자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또 울었다. 그 때 내 뒤를 따라오던 몇 명의 네팔인은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말로 다할 수 없는 자신들의 삶을 침묵으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네팔인 140명이 필자에게 찾아왔다. 그들은 하루아침에 빼앗긴 자신들의 돈을 찾아달라고 필자를 찾아온 것이었다. 당시 네팔 사람들은 한국에서 돈을 벌어도 은행을 통하여 송금하지 않고, 소위 송금 브로커를 통하여 고향에 보내고 있었다. 네팔의 특별한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네팔에는 은행도 없고, 은행이 있다손 치더라도 은행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송금 브로커가 140명의 네팔인 노동자들의 돈을 갖고 출국하다가 공항에서 외국환 관리법으로 붙잡힌 것이다. 물론 모든 돈은 국고에 귀속되었다. 필자는 어떻게든 그들의 돈을 찾아주어야겠다는 일념으로 그들의 이름과 돈의 액수, 그리고 각각의 사인을 담은 연판장을 들고는 검찰청을 찾아가 담당 검사를 만났다. 담당 검사는 필자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필자는 열심히 이 돈만은 돌려주어야 한다고 검사를 설득 하였다. 지금 국고에 압수된 이 돈은 네팔인 노동자들의 피와 땀의 결과이며 부득이 하여 송금 브로커가 갖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을 하였다. 문제는 검사의 마음이었다. 만약 압수된 돈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당시의 돈으로 한화 2억은 매우 큰돈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돈을 돌려주겠다고 말하는 검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얼마나 감격했던지! 필자는 무조건 감사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잠시 후 미화 22만 달러를 가방에 넣고 나오는 필자는 하나님께 한없이 감사했고 또 떨렸다. 누가 나를 쫒아오는 것이 아닌가하여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았다. 필자도 검사도 참 이상한 결정을 한 것이리라. 그는 나를 어떻게 믿고 그 큰돈을 돌려주었단 말인가? 압수된 돈을 찾아 네팔인들에게 나누어 주던 날은 마치 감사절 같았다. 여기저기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는 네팔인들의 손을 붙잡고 필자는 정말 내가 살아 목회자로 그들의 편에 있음에 감사했다.
지금도 그날의 감격과 기쁨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필자는 네팔과 만났다. 죽은 자를 통하여, 그리고 빼앗긴 돈을 찾아주는 과정에서 나는 네팔과 만났다. 그 후로 많은 네팔인들이 필자와 친구가 되었고 네팔은 그래서 오랫동안 내 사역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몽골인들이 몰려오고 자연스럽게 네팔은 필자와 나섬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2013년 12월, 필자는 처음으로 네팔을 찾았다. 얼마만의 해후였던가! 그토록 보고 싶고 가고 싶던 네팔이다. 너무도 반가운 네팔이다. 많은 이들을 만나면서 잊고 있었던 네팔을 다시 기억해 내었다. 조금씩 네팔에 대한 부채감정이 살아났다. 무언가 다시 네팔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내 안에서 스멀스멀 일어났다. 그러다 네팔의 지진소식을 들었다. 하루아침에 땅속으로 묻혀버린 네팔과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내가 너무 늦은 것이다. 사랑은 때가 있다. 생각만 하다가 늦어버린 것이다. 아프다. 네팔이 너무 아프다. 필자가 사랑했던 네팔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늘의 부르심이 들리는 듯하다.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그 물음이 들려온다. 죽은 네팔형제와 열흘이나 동숙하며 만났던 네팔이다. 140명의 네팔인 노동자들의 돈을 찾아주며 만난 네팔이다. 함께 울고 웃어가며 살았던 네팔과의 그 진한 사랑의 여운이 갑자기 나를 붙잡는다. 네팔로 떠나고 싶다. 찾아가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네팔은 오늘 우리에게 아벨이다. 잃어버린 동생 아벨을 찾아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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