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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코이노니아(설교문)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회복하라>

사도행전 4 : 32 - 35
“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가. 코이노니아의 유래와 뜻에 대하여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협동 또는 친교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합니다.  이런 전통을 초대교회에서는 성도간의 교제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했지요. 코이노니아의 다양한 의미를 생각할 때에 한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함께 더불어 나누고 공감하며 돕는 관계의 회복을 통하여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완성된 나라라고 고백한다면 맞는 말일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진정한 교제, 다시 말하면 피차 나눔과 사랑으로 관계된 사람들이 사는 나라입니다. 
성서에 보면 곳곳에 그런 아름다운 나눔과 공유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공동체의 모습이 나옵니다. 특히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나눔의 실천이 곧 하나님 나라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요한복음 6장 1절 이하를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이 나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았다고 말하지요. 우리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예수님의 기적 사건으로만 기억하지만 실제로 그 기적의 이면에는 참 코이노니아의 실천이 숨겨져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상황 가운데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예수님의 능력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나눔을 위한 소년의 결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소년의 아름다운 나눔과 소박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 기적은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한 소년의 나눔을 통해 5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진정한 코이노니아는 우리 모두를 살리고도 남게 하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의 회복은 우리 한국 교회와 사회를 살리는 길입니다. 이제는 진정한 코이노니아의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고 확장하는 일에 나서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욕망과 탐욕의 독점을 공고히 하려 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공멸을 가져올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은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만 소유하지 않는 나눔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가 코이노니아를 실현한다고 할 때에 그 실현은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을 내놓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코이노니아의 어원에는 '결혼관계'라는 뜻도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결혼관계를 생각한다면 어떻습니까? 부부지간에 자기주장을 먼저 내세우거나 혹은 재산에도 자기 것과 상대의 것을 나눈다면 어떻게 될까요? 서로 믿으며 피차 상대방을 배려하고 공유하며 나누는 것이 결혼관계의 첫 번째 조건이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보여주신 것처럼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은 소년의 나눔과 공감의 믿음으로 인하여 시작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적은 나눔의 코이노니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나라입니다. 자기 것보다 우리의 것에 대하여 먼저 고백하고 인식하는 공감의 나라입니다.

바울의 코이노니아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요?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코이노니아라는 말을 13번이나 사용합니다. 그의 코이노니아에 대한 생각은 예수님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언제나 코이노니아적 삶의 실현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코이노니아에 대한 바울사도의 고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디모데전서 6:17-18)
“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고린도후서 9:13)

“이는 마게도니야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로마서 15:2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브리서13:16)

고린도후서 9:9에서도 “ 기록된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바울사도의 코이노니아에 대한 생각은 서로 돌보고 나누는 것입니다. 특별히 약한 자와 가난한 자들에게 부한 자들과 능력있는 자들이 자발적인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코이노니아의 완성이라고 보았습니다. 바울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은 함께 나누고 공감하는 삶의 실천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코이노니아를 말하면 교회 안에서 함께 놀고 즐기는 것을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의 코이노니아는 성도들의 친목모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코이노니아는 단순한 성도간의 교제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의 코이노니아는 보다 깊은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먹고 교제하는 친목모임이 아닙니다. 코이노니아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매우 소중한 성도의 실천적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진정한 코이노니아의 실천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그런 코이노니아의 실천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모델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런 모범의 예를 찾아보려 합니다. 


나.  코이노니아와 초대교회

본문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코이노니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 나라임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나눔과 공유 그리고 소통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지 먼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미래는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며, 또한 그들 앞에서 승천하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적 삶과 종말론적 삶의 결합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규정하는 전부였던 것이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부활을 증거하고 언제 오실지 확실히 모르지만 종말론적 삶의 실천을 통하여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 그런 선교적 삶과 종말론적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더 이상의 개인적 탐욕과 소유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은 선교적이고 종말론적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그러한 종말론적 삶의 태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모델을 보여주시려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의 본문은 코이노니아의 실천이 곳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며, 종말론적 삶의 실천이 곧 코이노니아의 삶이라는 의미를 겹겹이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성도간의 교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렇게 강조하는 코이노니아의 삶입니다. 본문에서는 모든 성도가 함께 공유하고 나누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하고 부한 자들의 경계가 없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본문에서는 가난한 자들이 더 이상 그들 가운데 없다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친교와 사귐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전제에 대한 공감이 필요합니다. 개인보다 공동체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기심이 아닌 공동체성의 회복이 곧 진정한 코이노니아의 회복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곧 공동체성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공동체성의 회복입니다. 공동체에 대한 영성이 있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오늘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한 공동체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바로 제가 섬기고 있는 ‘나섬공동체’가 그것입니다. 이는 우리를 자랑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고백이며 앞으로 살아야 할 우리의 의무이고 사명입니다. 우리는 완성되지 않은 존재들입니다. 다만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공동체일 뿐입니다.


다. 나섬공동체와 코이노니아

나섬공동체의 ‘나섬’이라는 말은 '나그네 섬김'의 의미를 같습니다. 그와 함께 '나눔과 섬김'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나섬이라는 이름은 우리 사역의 시작과 계기를 말해줍니다. 
저는 1992년 늦은 계절에 나그네라 불리는 외국인근로자들을 섬기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그 때에 심한 과로와 스트레스로 눈에 병이 들었고 지금 저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후회하거나 그것으로 누구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직 제 삶의 나눔을 통하여 조금이라도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거나 실현되었다면 그것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디아코니아라는 말과 코이노니아라는 말을 구별합니다. 그 말은 아시다시피 봉사와 구제 혹은 교제와 나눔이라는 두 개념을 말하는 것입니다. 봉사와 교제는 결코 나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를 결합한 ‘디아노니아’라는 단어입니다. 봉사하고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 운동이 왕성해지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나섬공동체는 그러한 디아노니아를 실현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나섬’은 나그네를 섬기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나누는 것을 실천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그네를 섬기며 그들과 함께 교제하고 나누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이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150만명이 넘는 많은 이주민 나그네들이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들에게는 나눔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그들과 친구가 되며 진정한 교제가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나눔입니다. 친구가 되기 위하여는 서로간의 나눔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코이노니아는 그들을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우리의 친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자신의 시간과 은사와 물질을 나눕니다. 진정한 친구가 되려면 때로 우리의 것을 내놓고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사랑의 소통이 가능해 지기 때문입니다. 나섬공동체에서 하는 첫 번째 사역은 바로 외국인근로자들을 비롯한 많은 다문화 이주민들을 섬기고 나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역은 재한몽골학교의 사역입니다. 저는 재한몽골학교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확신했습니다. 재한몽골학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몽골인 근로자들의 자녀들을 위하여 세워진 학교입니다.
섬김은 나눔과 구별할 수 없습니다. 섬김과 나눔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리하셨습니다. 섬김을 통하여 나누고 나눔을 통하여 섬기는 것이 주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그래서인지 몽골학교 사역은 전형적인 디아노니아의 모습을 갖습니다. 섬김과 나눔을 통하여 학교를 운영하면서 저는 무척이나 행복한 목회자임을 고백합니다.

세번째 사역은 나섬교회입니다.
나섬교회는 한국인 성도들과 나그네들 간에 섬김과 나눔을 통하여 만들어진 교회 공동체입니다. 바울 사도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경계가 무너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유인이나 노예나 여자나 남자나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나누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한국인과 이방인이 나뉘어져야 하겠습니까? 세계화와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오늘 나섬의 모델은 매우 소중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물론 우리 한국인 성도들의 삶이 나그네 이주민들 보다 조금은 낫겠지요. 경제적으로 우리가 이방인들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나섬교회는 진정한 코이노니아의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섬의 교인들은 이방인 나그네들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됨의 의미를 만듭니다. 우리는 우월하다고 자신을 드러내거나 거드름 피우는 천박한 자본가의 모습을 배제합니다. 우리안에 경계는 없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사랑의 나눔이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더불어 공감하고 공유했습니다. 우리 나섬도 초대교회처럼 공유하고 공감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자신의 것이 소중하기에 공유하는데까진 이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공유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야 나그네들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섬교회가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나섬의 교인들은 참 소중합니다. 섬김은 나눔을 전제로 합니다. 말로만 섬긴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나눌 수 있어야 섬김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나누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맺어지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나눔이 없는 섬김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오늘 우리에게 가장시급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아니 우리의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그것은 나눔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욕망을 더 공고히 하려는 천박한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에 우리 모두가 함몰되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주변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사회와 나라를 들여다보십시오.

   
다. 한국교회와 코이노니아의 회복

진정한 코이노니아의 회복은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공유와 나눔의 실천을 통하여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와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입니까?
양극화와 독점과 불공정이 지배하는 대단히 기형적인 모습입니다. 

우리 사회는 몇몇의 재벌기업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99:1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로 지구의 젊은이들이 데모를 하고 있지요. 왜입니까? 일부의 소수가 다수의 부를 독점했기 때문입니다. 나눔은 없고 소유만 존재하는 이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더욱 가속화되어가는 이 세상의 구조로는 더 이상의 희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미국 와튼 경영대학원의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교수는 '소유의 종말'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이제 미래 사회는 소유의 시대가 아닌 공감과 공유 그리고 접속의 시대가 된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한국교회는 여전히 악순환의 고리를 이어가려 합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일부 대형교회는 점점 더 대형화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오히려 더 큰 성을 쌓듯 예배당을 짓고 모든 것을 독점하려는 욕망의 목회를 교회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그 지배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려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 무슨 나눔이 있습니까? 어디에 진정한 나눔의 공동체가 존재합니까? 다 마른 떡고물 같은 것들을 나누어 주면서 선교비니 구제비니 하는 것들로 알량한 나눔을 시늉낼 뿐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주변의 교회들은 서로 간에 더욱 치열한 경쟁의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교회가 커지고 목회가 성공했다면 그것은 곧 주변의 작은 교회들을 잠식했다는 증거입니다. 누군가 교회의 성장과 부를 이룩했다면 그것은 바로 다른 누군가의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6-07-01 11:18:46 노마드톡에서 복사 됨] http://nasom16.cafe24.com/bbs/board.php?bo_table=B02&wr_id=248


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