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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목회


가. 나에게 희망은 무엇인가?
희망을 말하려면 절망을 기억하여야 한다. 굳이 이렇게 희망을 서술하려니 그 좌절과 절망의 때가 떠오르는 것이다. 절망해 본 자에게 희망을 말할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절망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희망의 가치를 알 수 있는가? 절망해본 자에게서야 비로소 희망의 가치가 느껴지는 까닭이다. 내게 희망은 삶이 되었고 존재의 의미 그 자체이다. 나는 한때 무척이나 절망했던 기억이 있다.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시작하면서 아니 그 이전에 작은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면서부터 나에게 절망은 시작되었다. 단지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하면서 느낀 분노로 절망이 내 눈으로 다가왔으며 나는 절망의 한 복판에서 내 삶의 고통을 받아들여야 했었다. 죽기보다 더 아픈 절망이었다. 죽음도 생각했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죽음은 더 이상 무서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죽음은 차라리 삶보다 더 희망일 때가 있다. 그만큼 힘들고 아프면 말이다. 죽음보다 더 아픈 삶도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때로 우리는 죽음을 삶보다 더 생각할 때가 있지 않은가? 장애를 갖고 태어난 작은 아이의 출생,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목회의 선택 그리고 이어지는 분노와 시력 장애, 경제적 어려움과 열등감의 아픔, 어쩔수없는 약자임을 인정해야 하는 한계, 나그네 목회자로서의 비굴함과 말로 다할 수 없는 자괴감 그리고 우울과 고독의 시간들 모두가 나의 절망이었다.
그러나  절망의 끝에 희망이 있었음을 누가 알았겠는가? 희망은 절망의 끝자락에 숨어 있다. 그러니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가 아닐까? 절망과 희망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운명처럼 붙어 다닌다. 끝없이 절망해본 자에게 한없는 희망의 은총이 있는 것이다.

나. 이주민 목회와 희망
하나님이 내게 주신 절망은 선물이었다. 내가 절망해 보아야 절망하는 자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나그네는 아프다. 그들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 나그네의 삶이란 운명처럼 그런 것이다. 아브라함도 야곱과 요셉과 모세도 아니 우리 예수께서도 그렇게 아프셨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1992년 겨울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목회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 목회를 시작했는지는 새삼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렇게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들이 있었나보다. 삶은 낭만이 아닌 것을 늦은 나이에 알았으니 낭만으로 위장한 삶은 내게 현실적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나의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내가 만나야 했던 사람들의 아픔과 연결된 고통이었다. 그들은 울었고 나는 그들을 위해 울어야 했다. 내 울음은 인간에 대한 분노의 울음이었으며 인간이 이렇게 취급받아도 되는가의 물음으로부터 시작된 울음이었다. 그것은 내게 분노였으며 결국 나는 분노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눈이 보이지않는 장애인이 된 것이다. 차라리 내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편했으리라.
고통 속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한 것은 내가 아프면서부터이다. 그렇다. 십자가가 보였고 그 위의 예수의 피냄새를 느낄 수 있었으며 죽어가는 그분의 힘없는 눈동자를 보게 되면서 내 고통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픈 자만이 아픈 자의 삶을 이해한다는 일종의 동류의식이었을까. 아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총의 방법이었다. 사랑의 방법이라는 말이다. 나에게 아픔은 사랑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 고백의 복판에는 내 얄팍한 믿음이 있다. 나는 얄팍하다고 했다. 정말 내 믿음은 일희일비의 얄팍함과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따라가는 얕고 가벼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그 믿음으로라도 내 아픔에 사랑의 법칙이 있다고 믿는다. 
내가 고통 속에서 만난 하나님과 나그네는 언제나 오버랩되었다. 고난받는 하나님과 눈물로 살아야 하는 나 자신과 우리안의 나그네는 다른 존재가 아닌 한 존재의 서로 다른 모습이었다. 그분이 내게 고통으로 오셨으며 나그네가 나에게 고난으로 찾아왔다. 나그네 속에 예수가 있었고 그 예수 속에 내가  있었다. 그후로 나는 행복했다. 굳이 희망이라는 단어가 필요없는 삶의 까닭모를 이유였다.
살고 싶었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내안에 그분이 오셨고 그 예수가 나그네의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희열이었고 기쁨이었다. 나는 감사했고 그래서 내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았다. 절망하는 나그네 속에서 아파하는 예수를 본 것이다. 그 고난받는 예수가 우리를 구워하셨음은 물론이다. 삶과 신앙과 타인은 그렇게 연결되어 함께 공존하고 있다. 

다. 희망과 목회
목회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육신의 삶으로 오신 예수를 고백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게 목회와 선교는 육화된 예수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나는 과연 육화된 목회자로 살고 있는지는 다른 문제이다. 여전히 나는 위선적이며 허풍쟁이일뿐아니라 내 스스로 믿을 수 없는 존재임을 분명히 말해야 한다. 그럼에도 나에게 목회는 끝없는 고민을 준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는 강박감 같은 것이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조금씩 희망으로 살고 희망을 주며 희망의 꿈을 꾸면서 하루를 산다. 마지막 희망으로 가고 싶다는 믿음으로 오늘을 산다. 목회는 결국 희망인 것 같다. 희망을 주는 것이 목회이며 그러기 위하여 나는 스스로 희망으로 육화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절망하며 희망을 말하는 것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나자신이 희망으로 살아야 한다. 희망을 선포하면서 희망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오늘 나에게 희망의 목회를 가르쳐 주신 분은 아이러니 하게도 절망을 주신 그분이시다. 역설의 하나님이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나에게 목회와 삶, 그리고 신앙고백과 목회를 분리하지 못하게 하신 그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말이다. 
나는 희망으로 살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 목회자로 부르심은 희망으로 살라하신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내게 아픔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처음에는 원망했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다. 희망을 목회의 화두로 그리고 육화된 희망의 목회자로 살라하신 까닭이었다. 그래야 조금은 덜 위선적이기 때문이리라.  I-yoohg@hanmail.net   나섬공동체 유해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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