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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함에 대하여


우리는 모두 위대한 인생을 꿈꾼다. 물론 살면서 위대함이란 것에 버거움을 느끼고 자신에겐 먼나라 이야기처럼 생각되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는 위대함에 대한 동경이 있다. 위대한 사람을 보면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라면서 자신을 반추하기도 한다. 
필자가 위대한 인생이라는 화두에 마음이 이끌린 것은 내가 만나고 있는 노마드, 즉 유목민들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유목민은 위대하다. 그들에게는 우리 정주민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생각과 철학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우리와 사뭇 다른 문화와 삶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필자는 유목적 사유를 발견하며 배우고 싶다. 유목적 사유란 추상적인 것과 현실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바로 그런 것이다. 추상성과 현실적 문제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고민하지만 유목민은 현실보다는 추상성에 더 근접한 결단을 할 줄 안다는 점에서 위대한 것이다. 우리는 현실의 문제로 언제나 농락당하며 결국 현실적 타협이라는 한계를 갖고 살아간다. 그러나  현실성이라는 당장의 이해관계보다는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더 탁월한 사람들이 유목민이 아닐까 싶다.
나는 유목민들에게서 유목적 사유와 문화를 발견한다. 물론 그 모든 것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내게 유목적 사유는 신학적 재발견이며 성서 속 인물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는 점에서 언제나 내게는 깨달음의 통로가 된다.

유목적 삶에서 위대함을 찾아가는 것이 내게는 하나의 즐거움이다. 매일같이 만나는 유목민  나그네에게서 신앙적 고뇌와 인생의 방향성을 제고 한다는 측면에서 유목민 나그네는 언제나 나의 스승이다. 그런 위대한 유목민에게서 찾아낸 몇 가지 깨달음을 적어본다.   

첫 번째,  위대함은 곧 위험한 것이다.
위대한 인생과 위험한 삶은 동전의 앞뒤처럼 공존한다. 위대함을 위하여는 안전함을 포기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위대한 인생살이에는 인간적 안정이라는 보편적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적어도 위대한 삶속에는 위험함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는 위대함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위대함이란 안전함의 경계선을 넘을 줄 아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위대함이라는 가치는 평안함이라는 현실적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바울이 위대한 인생살이의 모범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유대교라는 한계를 스스로 설정하고  그 경계선을 넘어선 결단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기득권과 이전의 고정관념 그리고 그를 규정했던 삶의 규범과 명성을 배설물로 여기는 결단을 했기에 위대하다.
로마의 시민권과 유대인중의 유대인, 그리고 바리새인이라는 기득권을 쓰레기로 여길 수 있는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누구인가?
잡스럽고 작은 기득권 같은 것들로도 아등바등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울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   
안전함의 울타리 안에서 조금도 밖으로는 나오지 않으려는 우리의 그 위험함에 대한 콤플렉스는 얼마나 우리를 가볍게 하는가?
보수와 수구라는 안전함의 이념 앞에서 우리는 절망하여야 한다. 세상과 기득권은 안전함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며 우리의 삶을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창조적 소수자들에 의해 변화하며 발전한다. 결국 역사는 경계선을 넘어선  유목민들을 통하여 진보해 왔던 것이다.
위험함을 무릅쓰는 결단이 위대한 인생을 견인한다. 위험을 즐기는 자들에게 미래의 위대함이 은총으로 주어진다.

바울은 위대한 인생을 위하여 위험한 삶을 선택했다.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이기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에게 유대인의 자존심은 있었으되 유대인만의 세상은 결코 하늘의 뜻이 아니라는 보편적 가치와 구원관이 있었다. 그는 위대함을 위하여 기득권을 버리는 위험한 선택을 한다. 기득권을 버리는 것은 위험한 것이라고 세상은 가르치지만 그는 그렇게 버리는 것이 위대한 것이라고 역설의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두 번째, 위대함은 성공이 아니다.
위대함이 궁극적으로 승리일수는 있지만 우리가 욕망하는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위대함은 성공의 욕망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보지 않겠느냐는 예수님의 제안에 그의 모든 삶의 도구들을 버린다. 그물이며 고기 잡는 어구들을 버린 것이다. 성공을 위한 도구를 버리고 새로운 것들을 가진다. 하나를 버려야 하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버린 것은 성공에 대한 욕망이며 그가 얻은 것은 새로운 위대함에 대한 추상성이다. 현실의 욕망은 버리고 미래의 추상을 가진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현실적 성공보다 미래의 위대한 가치를 얻는 자들이다. 
이 시대의 교회와 목회가 성공보다 위대한 가치를 소유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현실적 성공을 위하여 얼마나 발버둥치고 있는가. 그러나 현실적 성공은 안개요 바람인 것이다.
이 현실적 성공에 대한 욕망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더 큰 교회와 목회에 대한 열망이 그것이다. 
어느 날 문득 위대함이란 성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고는 한참이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나를 점검하고 일어나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렇다. 위대함은 성공과는 전혀 다른 가치의 문제라는 것을 새롭게 깨달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 번째, 위대함은 자발적 자유이며 비움이고 떠남이다.
헨리 나우엔이 그렇게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교수이고 신학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우고 떠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한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는 성육신 사건의 화신이 되셨기 때문이다.
말로만의 지식이 아니라 삶으로 연장된 자발적 선택이 위대함의 조건이다.
말씀이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배운 말씀이 내 삶속에서 녹아지고 현실이 되어야 한다.
복음이 사랑의 실천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위대함은 말씀이 삶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위대함의 언저리에서 기웃거리며 살아갈 것인가. 오늘도 욕망의 목회에 눈이 먼 폭풍 속에서 이리저리 유혹받으며 살아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다. 위대함을 위하여 오늘도 욕망의 사슬을 끊고자한다. 오늘도 위대함을 선언하고 살아야 한다. 버리고 떠나고 비우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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