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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것을 포기하면 죽은 것이다 5


우리 공동체의 재한몽골학교에는 두 채의 기숙사가 있다. 전국에서 모여드는 몽골 아이들이 우리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기숙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재한 몽골인은 전국에 흩어져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제주도는 물론 어쩌면 울릉도, 아니 그보다 더 오지인 어떤 마을에서도 몽골인을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자녀들을 공부시키고 싶지만 한국 학교에서 공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먼저는 한국말이 서툴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살림살이에 사교육이 판치는 한국의 교육현장에서 살아남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몽골 아이들을 위하여 우리 몽골학교가 존재한다. 그래서 입학을 문의할 때 몽골 부모들이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것이 기숙사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필연적으로 기숙사가 마련되었다. 기숙사가 만들어지기까지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두 개의 기숙사 중 먼저 생긴 기숙사가 <요셉의 집>이다. 
성서의 요셉을 생각하면서 그 집의 이름을 지었다. 형제들의 질투에 팔려 애급으로 흘러 들어간 요셉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 몽골 아이들의 운명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국 땅에 들어온 몽골 아이들이 바로 요셉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게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살아야했던 요셉, 유혹과 모함으로 옥에 갇히게 된 요셉, 그러나  결국 바로의 꿈을 해석함으로 총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구원자로 우뚝 선 요셉을 생각하며 나는 우리 몽골학교의 기숙사를 <요셉의 집>이라 지은 것이다.
요셉처럼 어린 나이에 지금은 처절한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지만 반드시 요셉처럼 자신의 운명은 물론이고 그 민족까지 구원할 자로 자라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이름이었다. 그 이름엔 그 꿈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도 담겨있다. 나는 믿는다. 우리 아이들이 몽골의 요셉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몽골아이들에게 가끔 꿈꾸는 요셉을 가르쳐 준다. 일 년에 몇 번씩 아이들에게 설교하는 차례가 돌아오면 요셉의 이야기를 즐겨하는 편이다. '너희들도 요셉처럼 꿈을 꾸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사실 내 자신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나 자신이 꿈꾸는 사람이고 싶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꿈은 더욱 간절하다. 나는 아직도 꿈꾸며 살아간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가끔 내게 '또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느냐'며 걱정스레 묻는다.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 모양이다. 사실 나는 꿈을 꾸며 동시에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하여 계속 도전하고 있다. 영국의 버진(virgin)그룹의 회장 리처드 브랜슨(Richard Branson)의 '내가 상상하면 현실이 된다'라는 책에서처럼 말이다.
그는 꿈꾸고 도전하는 일에 정통하다. 그토록 성공하고 부를 축적한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도 치열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지 그는 우리 모두에게 큰 의미를 던져준다. 

꿈꾸는 자만이 미래를 살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꿈꾸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 우리는 생존하지 못한다. 미래 사회는 꿈의 사회이다. 꿈과 미래는 병존한다. 요셉이 그토록 긴 고난의 세월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꿈꾸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꿈꾸는 사람은 현실에 매달리거나 눈앞의 장애에 무너지지 않는다. 꿈꾸는 사람은 당장의 아픔에 서러워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꿈꾸는 사람은 언제나 미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삶은 언제나 거시적이며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담대하다.

꿈은 한번으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꿈을 이어간다. 계속적으로 꿈꾸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루어진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니다. 이루어진 꿈은 현실이다. 현실은 꿈이 아니다. 그러므로 꿈은 계속 꾸어야 한다. 이루어진 현실은 뒤로하고 새롭게 꿈꾸며 살아야 한다.

나는 얼마 전 리처드 브랜슨(Richard Branson)의 '위대함의 법칙'이라는 책에서 '안정된 것이란 한정된 것이다'라는 구절을 읽었다. 안정된 것이란 곧 한정된 것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요즘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있다면 안정된 직장이다. 그래서인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직장은 공기업이거나 공무원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평생 고용이 보장되는 곳이 가장 좋은 직장이라고 말한다. 안정되고 보장된 곳이 가장 좋은 곳인가라는 물음에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렇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안정을 바란다. 평안함을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바램이다. 평안과 안정을 거절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가 안정을 바라는 것이다. 가정과 직장과 삶이 잔잔한 호수처럼 평안하기 바라는 것이 우리 보통 사람의 삶이다.

그러나 안정과 평안이 전부라면 이건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상하다는 것은 재미없다는 말이다. 심심하다거나 더 이상의 그 무엇이 없어졌다는 것은 더 살만한 즐거운 에너지가 상실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안정은 꿈이다. 하지만 그래서 이루어진 안정은 더 이상 꿈이 아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야성의 삶이 그리워지는 것은 우리의 변덕스러움 때문일까.
그렇다. 변덕스러운 삶이기 때문에 살만한 것이다. 바람이 불면 잔잔해 지기를 바라지만 어느새 우리는 잔잔하고 변화없는 삶에 싫증을 느낀다.
꿈은 그런 것이다. 꿈은 바람이거나 혹은 변덕스러움의 그림자이다. 변덕쟁이와 꿈꾸는 사람이 공생하는 이야기가 인생인 것이다.

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 세상을 혁신하는 꿈이다. 내가 게임 체인저가 되어 삶의 룰을 바꾸고 싶은 꿈이다. 그래서 낮은 자가 어느새 올라가고 높은 자가 순식간에 내려앉아 세상이 평등해지는 꿈이다. 

얼마 전 나는 필리핀에 다녀왔다. 필리핀 엥겔레스 지역의 선교지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두어 번의 필리핀 여행은 내게 고민을 던져 준다. 어떻게 저리 오래도록 가난을 이기지 못할까라는 고민이다. 마침 오늘 오장동에서 냉면을 먹고 장충동의 장충체육관 앞을 지나오게 되었다. 그 장충체육관은 바로 필리핀 사람들이 지어준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가난했기에 필리핀 사람들이 우리에게 장충체육관을 지어주었을까? 그때 그 사람들은 분명 우리보다 잘 살았었다. 그러니 우리에게 구호의 선물로 지어준 것이 장충체육관이다.
내가 휘문고등학교를 다닐 때에 우리는 농구경기를 응원하기 위하여 장충체육관을 수도 없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 이전에는 김일의 프로레슬링이 그곳에서 열렸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운동경기가 그곳에서 열렸었다. 필리핀에서 지어준 가난의 상징처럼 여겨진 장충체육관에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 필리핀 사람들의 가난에 대하여 고민한다. 이게 역사인가.

꿈을 멈추면 죽는다. 이루어진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이다. 현실은 꿈이 아니다. '안정된 삶이란 한정된 삶이다' 라는 말에 주목하여야 한다. 안정된 것은 한정된 것이며 한정된 것이란 곧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정지된 그 무엇이라는 말이다. 한정된 삶은 우리를 가두어두는 성이다. 성안에 갇힌 존재는 망한다고 칭기즈칸의 후예들은 믿었다. 유목민은 성안에서 살지 않는다. 성안에 갇힌 삶은 즐겁지 않기 때문이다. 한정된 울타리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은 더 이상의 진화를 포기한 존재다. 진화하지 않는 인생은 창조의 목적을 완성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화하는 창조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꿈꾸며 살아야 진화한다. 꿈꾸는 사람만이 유목민이다. 진정한 유목민은 꿈꾸는 나그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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