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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우 축복교회와 아이타 원주민 마을 1


"www.0404.go.kr로 확인하여 제한지역 체류시 가급적 벗어나기 바람"
"귀하는 여행제한지역 포함 국가여행 중, 여행제한지역 체류여부 확인 요망"

외교부에서 보내온 모바일 메시지이다. 우리가 들어간 곳이 가서는 안되는 위험지역이라는 외교부의 급한 전문이 우리 일행의 핸드폰으로 속속 전해진다. 이게 무슨 말이지? 하면서 모두가 놀라는 눈치다. 왜 여기가 위험지역인가를 의아해 하면서 이 아이타 원주민 마을이 어째서 우리가 들어가면 안되는 지역인지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뉴 라이프 비전스쿨에서 떠난 필리핀 단기 선교여행 중 찾아간 곳은 아이타라는 원주민이 사는 비하우 마을이었다. 필리핀에 간다고 했을 때 나는 그저 잠깐 다녀오는 여행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도 않게 여겼었다. 필리핀에 대한 어떤 환상이나 아름다운 추억도, 그렇다고 어떤 기대감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일상 중 만나는 여행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필리핀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 특별히 한국인 선교사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전부였다. 그러니 그곳에 무슨 선한 것이 있을까 싶었다. 그때까지만해도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인 곳이 필리핀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나만의 선입관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나중에 들어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새벽 이른 시간에 일찍 집에서 나와야 필리핀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주일을 보내고 난 월요일 새벽이니 조금은 짜증이 나기도 했다. 이왕이면 좀 더 좋은 곳으로 갈 것을... 하는 후회도 없지 않았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보다 내가 할 일이 많은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시간을 내어 그곳에 꼭 가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필리핀에 가는 것보다 한국에 남아 할 일을 하는 것이 더 큰 이익일 것이라는 손익계산이 마음속에서 뒤엉켜 일어났다.

비행기는 제 시간에 떴지만 필리핀까지 가는 비행기 안에서의 시간은 무척 답답했고 혼란 스러웠다. 무슨 놈의 비행기가 이렇게나 흔들거리고 요동을 치는 것인지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눈을 감고 있었다. 괜한 필리핀 여행이 아닌가하며 후회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랬다. 우리는 그저 한 번의 여행을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마닐라 국제공항이라는 곳은 우리나라 지방 공항보다도 나을 것 없는 곳이다. 그런 열악한 공항에 가는 날이면 우리 모두는 이구동성으로 인천국제공항을 자랑스레 말하기 시작한다. 어찌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를 말하면서 은근히 우리의 경제와 수준 높은 삶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공항을 나오면서 웃지못할 일이 생겼다. 우리가 가지고 간 헌옷가지와 선물로 나누어 주려는 물건들을 세관에서 붙잡고 놔주지 않은 것이다. 한 시간이 지나도 일행 중 몇 분이 나오지 않았다. 세관에서 트집을 잡고는 세금을 내라고 했다 한다. 날씨는 덥고 신경질이 나기 시작한다. 자기들 주려고 가지고 온 것을 그렇게 붙잡고 트집을 잡는 것에 화가 난다. 그냥 두고 오라고 소리를 지르고도 싶었다. 한참이나 지나 돌아온 일행은 결국 13만원인가의 세금을 내고 나왔다. 처음부터 필리핀 여행은 꼬이기 시작했다. 느낌이 안좋았다. 처음부터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공항에서 나온 우리일행은 어느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어야 했다. 필리핀의 음식이 내게는 편견 그 자체다.

1993년 늦은 가을날,  구로공단 어느 골목끝자락 작은 벌집에서 나는 필리핀  노동자들이 사는 집을 찾아갔다. 내가 사역하던 교회의 멤버들이 사는 곳이다. 처음으로 찾아간 필리핀 성도의 집이다. 내가 간다고 하니 그 지역의 모든 필리핀 사람들이 모였다. 그날은 토요일 저녁이었다. 몇 사람의 필리핀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함께 나누는 저녁 식사... 그 날의 특별요리는 필리핀 잡채라 했다. 내가 처음으로 먹어본 필리핀 음식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 돼지 내장을 넣어 만든 잡채는 내게 어떤 맛이었을까?
1994년 9월에 처음 필리핀에 갔을 때에도 그 필리핀 돼지 잡채를 먹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큰 편견이 되었다. 필리핀 음식은 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먹지 말아야겠다는 속으로부터의 거부 알레르기였다.
이번에 찾아간 필리핀은 그런 음식에 대한 편견이 처음부터 내개 필리핀에 대한 느낌을 지배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날 점심 그렇게 배가 고파도 음식을 먹지 않은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원주민 마을 비하우에서도 같은 메뉴가 나왔다. 나는 솔직히 비참한 생활을 하는 원주민이 안스러워 음식을 못먹은 것이 아니라 필리핀 음식에 대한 편견 때문에 먹지 못했다. 나는 처음부터 선교사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선교사는 선교사 식성이라는 것이 있다. 선교사가 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음식에 대한 편견이 없어야 한다. 피선교지의 음식을 먹지 못하면 선교사가 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이미 선교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내게는 음식이 한계다. 어쩔 수 없는 내 존재의 한계다. 내가 눈이 안보이는 것처럼 나는 음식에 대한 장애가 있다. 눈이 안보이는 것보다 음식을 못먹는 것은 더 큰 장애다. 이건 솔직한 고백이다.
그 필리핀 돼지 잡채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처음 먹어본 음식이 맛이 있었더라면 그런 편견은 덜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 번이나 필리핀 돼지 내장 잡채에 탈이 났으니 더 이상 그들의 음식에 대한 호감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어째든 우리가 도착한 곳은 엥겔레스의 과거 미군 공군기지였던 클라크이다. 우리 일행은 그곳에서 4박 5일의 일정을 보냈다. 앞에서 언급한 비하우 축복교회는 그곳에서부터 서너 시간을 가야했다. 비가오고 길이 막히는 먼 거리였다. 앞을 볼 수 없는 내게는 그 거리가 더 멀게만 느껴졌다. 

비하우 마을은 아이타라는 산지 원주민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다. 약 150가구가 사는데 인구는 전부 합쳐 1,000여 명이라고 한다. 다음의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아 옮겨보았다.

'필리핀 클라크는 골프를 즐기는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유명관광지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엥겔레스에 위치한 필리핀 소수민족 아이타족 마을을 알고 있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필리핀은 7,20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섬나라로, 약 2,000여 종족이 살고 있는 다종족 국가다. 필리핀에 거주하는 여러 종족 중 토착 종족을 꼽으라면 필리핀 루존섬 잠발레스 지역에 살고 있는 아이타족을 들 수 있다. 아이타(Aetas)는 인도네시아어로 ‘노예’ 또는 ‘아웃사이더’라는 뜻으로, 필리핀의 민다나오 지방과 비사야스 지방에서는 ‘검정’ 또는 ‘검은 영혼’이란 뜻으로 불린다. 아이타족은 유달리 검은 피부와 둥근 눈, 곱슬머리와 작은 키의 외형을 갖추고 있어, 일반적 필리핀 사람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아이타족은 필리핀에 가장 먼저 거주한 토착종족으로, 3만 년 전 아시아 대륙과 필리핀이 연결되어있던 당시 육로를 통하여 필리핀 루존지역으로 이주했으며 다른 주변 종족들과는 교류하지 않고 고유의 생활방식, 문화, 관습을 지키며 잠발레스지역 피나투보 산속에서 화전을 일구며 고립된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1991년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하면서 살아왔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피난민이 된 채 굶주림과 기근에 허덕이게 되었다. 특히, 어린이들의 영양실조와 각종 전염병으로 인한 유아 사망률이 높아 아이타족의 인구는 급속한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문맹인이며, 가난과 질병 속에서 필리핀 현지인들의 무시를 받으며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고있다.'

그곳에 우리 교회 오준상 집사님이 교회를 세웠으니 그 교회가 바로 비하우 축복교회다. 어떻게 그곳을 알고 교회를 세웠을까?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오집사는 특별한 사람이다. 오집사님은 우리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일 년에 한 두 번씩 필리핀에 간다고 했다. 그랬다. 어느 주일 그가 보이지 않으면 그는 어김없이 필리핀에 가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한 기독교인의 아름다운 삶 자체였다. 그는 인생의 의미를 그곳에서 찾아가고 있었다. 나누고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오집사님은 비하우 원주민 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그곳의 아이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었다.

아내의 손을 잡고 버스에서 내린 첫 발의 느낌은 푸석한 맨 땅이다. 조금 전 비가 왔으니 흙탕물이라도 있었을 땅이 말라있었다. 아마도 물을 흡수하는 땅인 모양이다. 물론 중간 중간 물이 고여 있었고 아내는 발을 조심하라고 내 손을 이끌었다. 몇 개의 계단을 내려가니 그곳이 비하우 축복교회이다. 교회 안은 후끈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아이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가 멍하니 혼란스러웠다. 아이들의 냄새는 나쁘지 않았다. 무슨 흙 냄새 같은 것이다. 나는 냄새로 그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 이상까지도 상상한다. 아이들이 깨끗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더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이들 중 몇 명은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맨발인 것이다. 몇 년 전에는 거의 신발을 신지 않고 다녔다고 한다. 몇 년 사이에 문명이 들어온 것일까? 아이들은 시끄러웠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부르는 찬양에 정신을 차렸다.
   
영어로 부르는 찬양이다. 우리 교회에서도 자주 부르는 찬양이다. 그런데 나는 그 찬양에 그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감정의 변화란 말인가?
그 찬양은 '좋으신 하나님(God is so good!)'이었다.

정말 이들에게 하나님은 좋으신가? 나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이 가난과 소외의 굴레를 단 한 번도 벗어나보지 못한 이들에게 하나님은 좋으신가? 정말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찬양해도 되는 것일까? 갑자기 우석훈의 '촌놈들의 제국주의'라는 책이 생각났다.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며 우리는 지금 제국주의를 가르치고 지배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교회가 있었고 이미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아이들은 찬양을 한다. 할렐루야를 외치면 아멘이라 답한다. 아멘이라 하면 할렐루야로 화답 한다. 그 말의 뜻도 모르면서 아이들과 그곳의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배운 것이 아닐까.  
기독교는 말 뿐인가? 말로 고백하면 그것이 신앙인가? 신앙이 있어 말로 고백하고 말로 말하면 그것은 신앙고백이 되는가? 복음이란, 선교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이 세상에서 저보다 더 이상 낮고 보잘 것 없는 이가 없을 것 같은 아이타 원주민들에게도 복음과 선교라는 것이 들어갔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복음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어떻게 선교했기에 믿음을 갖고 산다는 저들은 여전히 저렇게 동물처럼 살아야 하는가. 이것을 묻고 싶었다. 그 날 우리와 동행했던 우리 교회 출신 애니자매도 그들을 처음보았다는 말이 내게 아프게 다가왔다. 전날 우리 교회에서 돌아간 필리핀 사람들의 홈커밍이 있었다. 오랜만에 필리핀에 와서 만난 사람들이다. 내 오래된 필리핀 친구들이다. 한국에서 우리 공동체에 나오던 사람들이니 마침 필리핀에 온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들 중 몇 명이 우리 일행과 아이타 마을에 동행을 했었다. 그들도 처음부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필리핀 자매도 자기네 나라에 이런 민족이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정말 몰랐던 모양이다. 한참이나 지나서 말을 한다. 불쌍하다고, 이들을 돕고 싶다고 말이다.

그날 나는 온종일 과연 비하우 아이타 원주민들에게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물었다. 그리고 선교와 복음은 이들에게 무슨 의미인지도 물었다. 그렇게 좋은 하나님이라고 찬양을 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내 가슴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복음은 삶을 바꾸고 그들의 공동체와 사회를 바꾸는 능력이 있다. 만약 그 복음이 그들의 삶을 바꾸지 못한다면 과연 복음은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밑바닥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회의와 반역이며 동시에 그 가난과 소외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연민과 간구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서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이 가야하고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 그것은 당위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삶은 피폐하고 버려진 쓰레기 보다 못하다.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아픈 존재들이다. 그런데 그곳에는 교회가 있었다. 복음도 들어갔다고 했다. 오래전에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교회를 세웠지만 관리가 되지 않아 폐허 같은 교회당이 옆에 남아 있었으니 아마도 오래전에 선교사들이 들어갔으리라. 그런데 왜 여전히 그들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일까?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은 좋다고 찬양한다. 변화없는  삶에 대한 성찰은 없고 입은 하나님이 좋다한다. 우리는 그 찬양을 들으며 감동한다. 과연 그 감동은 진실인가? 아니면 얕은 감성의 동조일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선교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아무런 변화도 견인하지 못하는 복음의 능력에 대한 회의까지 온통 혼란이었다. 그리고 물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구조의 문제인가 복음의 문제인가 아니면 철학 없는 선교가 저지른 왜곡인가? 아니면 이 원시부족의 태생적 한계인가를 물어야 했다. 아직도 그 물음은 내 가슴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내 안에서부터 시작된 회의와 반역의 물음에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 나는 지금 회의한다. 그리고 그 물음을 답하지 못하는 교회와 기독교에 대하여 더 강하게 묻고 싶다. 과연 우리는 왜 회의하지 못하는가? 아니 차라리 반역하지 못하는가라고 말이다. 나만의 지나친 고민인가?

나는 그날 아이타 작은 아이들의 냄새와 찬양 속에서 순수를 보았고, 동시에 복음에 대한 강한 회의와 희망을 보았다. 그들도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복음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복음은 빵과 일자리와 희망으로, 나아가서는 더욱 구체적인 것으로 다가서야 한다. 복음은 해방과 자유이다. 그들의 가난과 굴레와 열등감을 해방시키는 복음이  진짜 복음이다.  그들에게는 그 해방의 복음이 필요하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복음이 아니라 치열하게 싸우고 거칠게 해방을 요구하는 그런 능력있는 복음이어야 한다.

우리를 안내하던 정종주 선교사님이 나에게 앞에 나와서 한마디 하라한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할까. 나는 이럴 때가 가장 힘들다. 할 말이라? 여기서는 말이 필요없다. 그들은 내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어떤 말을 할지라도 그들에게 당장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한 말은 이게 전부다.

"다시 오겠습니다"

고민하고 결단하고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다시 와서 복음의 능력으로 그들을 해방시키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해방과 자유의 복음을 갖고 그들을 공부시키고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사람답게 사는 길을 토론하고 만약 그들의 그런 치열함에 동의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에 대하여 함께 투쟁하고 싶다.

선교는 투쟁이다. 치열한 싸움이다. 아이타 원주민들을 구속하는 모든 부조리와 고정관념 그리고 열등감에 대한 해방의 선포이어야 한다. 선교가 제국주의가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선교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지원하는 첨병이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아니라 해도 그렇게 제국주의가 확산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 제국주의적 선교가 아니라 해방의 선교로 바꾸어가야 한다. 

나는 다시 그곳 아이타 원주민 마을 비하우를 가야 한다. 당장은 아닐지라도 그들을 해방시키는 복음을 들고 가고 싶다.  고 이태석 신부의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라는 책이 생각났다. '만약 하나님이라면 이곳에 교회를 세웠을까? 아니면 학교를 세웠을까?'라고 묻던 그 이 신부의 물음은 고스란히 나의 물음이 되었다. 과연 그곳에 필요한 것은 교회인가 아니면 학교이며 일터인가? 남수단의 그 척박한 상황과 필리핀 비하우 아이타 원주민 마을은 무척이나 흡사했다. 그렇다. 여기서도 이 신부의 그런 고민과 똑같은 아픔이 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을 위하여 누군가가 가야 할 것 같다. 그 누군가가 말이다. 이 신부가 남수단 그곳에서의 사역을 위하여 죽었던 것처럼 또 한사람이 여기서 죽어야 한다. 그래야 이 땅과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 그 산지족 원주민들은 십자가 예수를 원한다. 죽음으로 말하고 부활로 희망이 되었던 그분을 원한다.    

그곳 원주민 마을에서 루이스라는 작은 자매를 만났다. 아이들의 교회학교 선생님이란다. 23살 자매이다. 내가 다시 그 자매를 만난 것은 아누나스 교회에서 열린 신학교 졸업식에서 였다. 비하우 마을을 다녀오고 그 다음날인가 우리는 아누나스 교회에서 열린 그 지역  신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다. 늦게 도착한지라 우리 일행은 교회 맨 뒤쪽에 앉았다. 아내와 나는 맨 뒷자리 어딘가에 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냄새가 났다. 나는 냄새로 사람을 알아본다. 분명 다른 냄새다. 누군가 내 뒷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비누 냄새일까, 아니면 향수일까를 생각할 때 마침 뒷자리의 누군가가 내 등을 살짝 두드린다. 그렇다, 혈우병 앓던 여인의 그 손끝을 민감하게 느끼시던 주님의 그 마음처럼 나도 그것을 느꼈다. 냄새와 만짐으로 말이다. 나쁘지 않은 냄새였으며 쑥스럽고 무언가 말하고 싶은 손끝의 두드림이다. 루이스 자매다. 졸업 예배가 끝나고 나는 루이스 자매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아내에게 물었다. 내 손에 붙잡혀 따라 나오는 자매를 보며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루이스가 어떻게 생겼어? 예쁘지?"

아내는 그냥 웃으며 "네" 하였다. 나중에야 아내는 속삭이듯 내게 말한다. 루이스는 아주 작고, 머리카락은 곱슬이며, 피부는 검고 그러나 그 눈빛은 무척이나 초롱초롱하다고 말이다. 내가 생각한 그 모습 그대로이다. 루이스는 쑥스럽게 말하며 웃었다. 루이스는 그 원주민 마을에서는 매우 특별한 자매였다. 교육대학을 나와 교사가 될 것이며 지금은 신학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 유난히 그 루이스가 생각난다.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다. 그 자매의 모습을 마음에 그려본다. 나는 지금 가슴이 아파 눈물이 흐른다. 반드시 되살리고 싶다. 그 사람들을 살리고 싶다. 희망 없이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복음은 그들에게 좋은 소식으로 들려져야한다. 그리고 그들을 노예생활에서부터 해방시키는 능력이 되어야 한다.
비하우 원주민 마을에서 느끼던 그 회의와 반역, 그리고 간절한 기도가 오늘 내안에서 교차한다. 무척이나 이중적인 생각과 마음이 함께 공존한다. 회의와 간구는 내안에서 알듯 모를 듯 이렇게 부딪히고 있다. 다시 비하우 원주민 아이타 사람들을 보러 갈 것이다. 그때는 분명 다른 마음으로 갈 것이다. 회의하는 것에서 간구하고 사랑하는 길을 찾아 갈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반갑게 찾아갈 것이다. 

필리핀은 내게 다시 찾아왔다. 비하우 마을의 아이타 원주민들을 통하여 필리핀을 새롭게 만났다. 이제 할 일이 생겼다. 섬기고 사랑하는 것 말이다. 이것은 하늘이 주신 마음이다. 물론 나 혼자는 못할 것이다. 함께 그 사람들을 되살리는 일을 하고 싶은 선한 일꾼들을 찾을 것이다. 내 아들, 내 아내도 예외는 아니다. 비하우 아이타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해방시키는 일에 동참할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갈 것이다. 눈이 멀어 볼 수 없지만 나는 냄새로 그들을 본다고 하지 않았던가? 루이스 자매의 냄새도 안다. 그 아이들의 흙냄새도 그립다. 이제는 가서 그들이 사는 집에서 하루는 머물고 와야 할지도 모른다.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다. 꼭 간다. 기다려라 루이스, 그리고 비하우의 작은 아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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