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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에 가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마28:1~10)---<세상과 빛>원고
어김없이 또 부활의 계절이 돌아왔다. 무척이나 매섭게 춥던 지난겨울이 생각난다. 얼마나 추웠던지... 내가 섬기는 다문화 이주자들의 삶은 그런 추위에 더한층 고통스럽다. 특히 더운 나라에서 온 외국인근로자들이거나 결혼이주여성들의 경우에는 그 추위가 가장 무서운 적이다. 낯선 이국땅에서의 삶이란 누가 뭐라고 하지 않더라도 그저 아프고 눈물나는 고달픔 자체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추운 겨울의 한파는 생소함을 넘어 고통 그 자체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한 몽골인도 한국생활에서 가장 힘겨운 것이 겨울이란다. 아니 몽골의 겨울이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록 더 추울텐데 어찌 그런가 물으니, 한국과 몽골의 추위의 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의 추위는 속살을 파고드는 추위이고 몽골의 겨울은 그저 '짱!' 하는 겉 추위란다. 속 추위가 겉 추위보다 더 추운 모양이다. 하긴 지난겨울은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도 몹시 추운 계절이었다. 
그러나 빛을 이기는 어두움이 없다는 말처럼 봄의 기운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 모든 것을 꽁꽁 얼어붙도록 만들 것 같았던 그 겨울도 봄의 햇살을 이기지 못한다. 벌써 남쪽에서는 개나리가 피고 목련이 피어온다. 이제 벚꽃도 피우고 세상은 언제 그런 아픔이 있었는지 초록으로 바뀌어 간다. 삶도 이런 것일까?

우리에게 부활의 사건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은 분명 우리를 구원하는 통로다. 그러나 그 고난의 끝에 부활이 있었기에 구원은 완성되어진다. 절망하고 좌절한 채, 엠마오로 돌아가던 제자들에게 부활은 빛이었다. 죽음으로 끝난 것처럼 보이던 역사는 새삼 희망의 빛으로 부활한 것이다. 다들 예루살렘을 떠나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들에게 지난날 예수와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은 오히려 고통이었다.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은 어떤 충격이었을까?

예수께서는 부활한 자신과 만나려면 갈릴리로 오라 하신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분명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다. 그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신다. 갈릴리로 가야 부활하신 주님과 조우한다. 왜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일까?   

나는 벌써 20년 전에 이주자 목회를 시작했다. 나그네들이라고도 불리며 혹은 이방인이라고도 하는 사람들이 내 삶과 목회의 중요한 대상이다. 성서적 표현대로 하자면 갈릴리 사람들이다.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다. 편견과 차별의 삶에 몸부림치던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러다보니 내게는 어떤 내성이 생겼다. 우리 이주자들을 차별하는 것이 곧 나와 내 삶에 대한 차별이라는 공동체 의식이다. 자연스럽게 예루살렘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갈릴리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우리 주님이 부활하시고는 곧바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을 알게 되었다. 왜 주님은 갈릴리를 부활의 첫 만남의 장소로 선택하신 것일까?
갈릴리에서 만나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갈릴리 사람들은 운명처럼 소외와 차별의 삶을 살아야 했다. 절망이 그들에게는 일상이었다. 유대인들의 편견과 차별, 그리고 가난과 억압의 그늘에서 살아야 했던 낮고 천한 삶이  운명이었다. 그들에게 고난은 벗어날 수 없는 옷처럼 붙어 다니는 일상, 그 자체였다. 희망은 사라졌고 모든 것은 절망적이었다. 마치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모습을 바라만 보아야 했던 제자들의 마음처럼 말이다. 모든 것은 끝이었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부활의 소식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기쁘고 반가운 복음이었다. 빛은 어두움이 깊을수록 더 강열하다. 절망이 깊어야 희망의 빛이 위대해 진다. 주님의 부활은 그런 것이다. 절망적인 삶이 운명이었던 사람들에게 부활은 더 이상 추상이거나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어야 했다. 그것마저도 환상이라면 그것은 비극을 지나 잔인한 고문이다.  

희망을 잃어버린 갈릴리 사람들이 가장 바라던 것이 부활의 소식이 아니었을까? 오히려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공범이다. 로마의 군병들처럼 그들은 구경꾼의 죄를 지은 공범이다.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지르던 무지몽매한 민중과 공범이다. 그들에게 과연 예수님의 부활이 무슨 의미를 던져 줄 수 있었을까? 그 의미와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진리는 여전히 쓰레기처럼 보일 뿐이다. 아니 불편한 진실일 뿐이다. 그 진실을 거부하고픈 인간의 욕망 앞에서 예수님은 죽어야 했다. 십자가는 그런 것이다. 불편한 진실 앞에서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의 집단적 선택이었다. 자신들의 죄 없음을 주장하고 싶겠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공범이었다.

예루살렘에 있던 자들과 갈릴리에서 절망하던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다. 조건이 다르고 고민이 다르고 삶의 내용이 다르다. 모두가 죄인이지만 그렇다고 똑같은 자들은 아니다. 여전히 이 땅에도 예루살렘과 갈릴리는 존재한다. 어디가 예루살렘이며 또 어디가 갈릴리인가? 우리는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예수님이 오신다면 우리는 과연 어느 편에서 예수를 바라보고 있을까? 예수는 또 죽는다. 예루살렘으로 가려던 사람들의 무지와 욕망 앞에서 십자가는 세워진다. 골고다는 황폐한 땅이 아니라 욕망의 사슬을 끊지 못한 교회 자체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욕망의 신앙을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우리가 예수를 죽인 공범이다. 부자가 되고 싶고 병이 낫고 싶고 그저 성공하고 싶은 그 욕망이 예수를 죽인다. 
욕망으로 가득한 교회가 십자가다. 예루살렘은 바로 여기, 교회가 아닌가? 갈릴리의 빈곳으로 가야 한다. 절망만이 남아 있는 곳에 가야 드디어 부활의 환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갈릴리로 가자. 그래야 예수를 만날 수 있기에 우리는 갈릴리로 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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