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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계신 그곳에서 당신과 만나고 싶다.


내가 다문화 이주자들을 선교하기 시작한지 벌써 18년이 지났다. 처음 구로동에서부터 시작한 외국인 근로자 선교 사역에서부터 현재 광장동 나섬공동체 사역에 이르기까지 돌아보면 그리 긴 것 같지도 않은데 이렇게 시간이 흘러간 것이다. 처음에는 잠시 경험을 한다는 단순한 생각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이제는 내 인생과 목회에 전부가 되었으니 참으로 사람의 생각과 계획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미천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도 된다. 그러나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가치와 의미가 있으니 이 사역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실천하고 살아야 할 가장 중요한 ‘긍휼’의 덕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이다.

우리는 얼마나 이중적인 신앙인인가? 이러한 자괴감은 나 혼자만의 고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이다. 신앙이 얼마나 추상적이며 관념적인가? 단세포적 도덕이나 낮은 수준의 윤리 교과서처럼 전락한 성서에 대한 이해와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태도가 너무 얄팍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삶은 없고 말만 무성하고, 실천은 없으면서 사랑은 쉼 없이 고백하는 우리가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다.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 위선이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허구적이며 진정성 없는 것인지를 증거한다. 세상에서 빛되고 소금되어야 한다는 것의 의미를 잃어버린지는 꽤나 오래된 것 같다. 이미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기독교라는 말과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야 하는 사명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임에도 이제 그러한 사명은 잊혀졌음에 분명하다. 오히려 세상이 교회가 변화와 개혁의 대상이라고 손가락질 하니 그 처참함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린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의 오늘은 분명하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에 대한 것이다. 이제 그 존재이유와 목적을 상실한 교회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이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명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종말의 때가 되면 우리 믿는 자들을 양과 염소로 나누어 분리하겠다고 하신다. 양은 누구이며 염소는 누구인가? 그 기준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긍휼과 섬김의 삶이 종말의 순간에 우리를 나누는 기준이다. 주님은 스스로 작은 소자이며 가난하고 굶주리며 허기진 이웃이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이 옥에 갇혀 있는 존재이며 길거리의 노숙자이고, 이제 급기야 외국인 나그네로 스스로를 규정하신다. 바로 예수가 나그네이며 노숙자이고 가난한 이웃이며 장애를 가진 병든 사람이고 옥에 갇혀 억울함을 호소하는 친구이다. 예수를 만나려면 낮은 곳으로 가야한다. 높은 곳에서 예수를 찾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낮고 소외된 자들이었다. 누구하나 관심을 가져주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다 이제는 스스로 그들 낮은 자와 병든 자와 나그네된 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하신다. 작은 소자가 곧 '나'다. 예수가 곧 작은 자다. 그것도 구별하지 않는 엄청난 선언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소자가 곧 예수라는 선언을 들어야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예수는 어디에 계신가를 묻자. 서울역 노숙자들을 보았는가? 거기에 예수가 계심을 보았는가?  어느 날 저녁 늦은 시간에 나는 파고다 공원 뒤편의 종묘에서 술취하고 소리지르는 아픈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갈 곳 없는 노인들이었으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밤이 깊었으나 그들에게 집은 그곳이었다. 몸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과 영혼까지 지친 우리의 이웃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정말 놀라고 또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화려하고 잘 정돈된 교회는 왜 이 뒷골목의 사람들에게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가? 이주자들을 선교한답시고 낮은 자를 말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섬겨야 한다고 말하는 나조차 그 때 그곳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그곳에 예수가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가 작은 자이며 스스로가 그곳에 계심을 말씀하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오늘 그 예수가 계시는 곳으로 우리가 달려갈 수만 있다면 세상은 우리를 욕하거나 손가락질 하지 못한다 .아니 그들은 우리를 바라보며 감격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올 것이다. 전도가 무엇이며 선교가 무엇인가? 예수가 계신 곳으로 찾아가려는 우리의 치열함과 고백이 바로 전도이며 선교다. 아무리 길거리에서 블신지옥을 외치고 예수천당을 소리쳐도 이미 그 안에는 어떤 감동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힘 있는 전도와 복음 증거는 곧 삶이다. 예수가 계신 그곳으로 찾아가고 함께 더불어 눈물짓고 보듬어 안아주는 그 작은 사랑의 실천이 곧 전도이며 복음 증거인 것이다. 
엄청난 재정을 들여 교회를 짓고 땅을 사서 기도원을 짓는 것을 대신해 낮은 자들을 위한 섬김의 삶으로 대체된다면 우리 교회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을텐데... 교회를 성장시키고 대형교회가 되는 것을 대신해 이웃의 작은 자들과 나그네를 위한 목회가 진정 큰 교회가 되는 지름길임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과연 예수님은 오늘 이렇게 큰 교회당에 계실까를 생각한다. 잘 지어지고 꾸며진 궁전 같은 예배당, 그러나 성탄절이면 예수님은 일시적으로 지어진 주차장  한 켠의 작은 마굿간과 구유 안에 마네킹처럼 누워계셨다. 나는 언제나 그렇게 누워계신 죽은 예수를 보고 진저리를 쳐야 했다. 이것이 예수가 계신 한국교회다. 한국교회는 이렇게 예수를 이야기 한다.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빈방있습니까?'라는 연극이 기억난다. 작은 시골 교회에서 일어난 성탄절 전야의 교회학교 성극을 묘사한 연극이다. 덕구라는 지적 장애를 가진 아이에게 맡겨진 베들레헴 어느 여관주인의 이야기다. 예수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예수를 낳기 위하여 여관을 찾아 여기저기 문을 두드릴 때에 빈방을 찾는 그들에게 한마디 하는 것이 덕구가 맡은 대사의 전부이다.
'빈방 있습니까?'
'빈방 없어요'
그러나 그날 성극 도중 덕구는 고민한다. '우리 집에는 빈방이 있는데, 지금 저분은 갈 곳 없는 나그네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이신데...'
결국 덕구는 '빈방 없어요' 대신 '빈방 있어요'로 대답해 연극을 망쳐 놓았다.
나는 그날 그 연극을 보면서 말없이 울었다. 사실은 우리 작은 놈이 저 덕구같은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였기에 그랬고,  또 하나 그 모습이 나그네를 섬기고 선교한다는 나에게 큰 도전과 아픔을 주었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 한국교회에 빈방이 있는가 묻고 싶다.  갈 곳 없는 노숙자와 나그네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린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저렇게 화려하고 잘 지어진 예배당에 더러운 노숙자와 나그네가 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사실은 그들이 숨겨진 모습으로 찾아오신 예수임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물질과 겉의 모양만을 보며 예수는 버리고 있다. 예수는 갈 곳 없어 방황하는데 우리는 예수없는 예배와 찬양에만 몰두하고 있다. 예수는 서울역 노숙자들과 이주자 나그네로 서러워 울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끼리 서로 사랑한다며 얼싸안고 웃고 있는 것이다. 예수없는 사랑이 넘친다. 우리는 우리만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마지막 때에 우리를 양과 염소를 나누는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한다. 마태복은 25장 31절 이하의 말씀은 거짓이거나 협박이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위선이나 허위도 용납되지 못한다. 양과 염소의 기준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준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인가? 그리고 그러한 교회 공동체인가? 를 묻고 계신다. 이것은 우리의 종말과 관계가 있는 엄연한 선언이다. 이 기준에 합당하지 못하다면 우리가 쌓은 새벽기도와 엄청난 헌금과, 잘 지어진 예배당은 물거품이다. 그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 같은 것들이다. 아무리 오래된 신앙인이라고 잘난척하고 싶어도 이 기준에 합당하지 못하다면 그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하여 우리는 그것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경건이라는 허구로, 잘 치장된 종교인으로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불행하게도 염소다. 
한국교회는 양인가 염소인가? 지금 우리는 그 한계정점에 서 있다. 심판의 판정이 곧 내려질 것이다. 문제는 그 안에 신앙한다고 말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이다. 이것은 분명히 현실의 문제다.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고, 갖고 싶은 현실의 문제다. 축복받고 싶다고 그렇게 애타게 기도하고 사모하던 그 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예수가 계신 그곳으로 가야 한다. 낮고 천하고 버려진 땅, 나그네와 가난한 이들이 살아가는 그 벌집의 한 평짜리 골목집으로 가야 한다. 병들어 신음하는 자들과 불법 체류했다고 어느 날 묶여진 인생으로 전락한 이주자들의 땅으로 가야 한다. 거짓과 위선의 건물 속에서 차라리 광야 같은 곳이지만 예수가 진정 살아계시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마지막 때에 믿는 자를 그 곳에서 만나고 싶다.
(플러스인생9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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