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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성공경영학5<열정과 집념으로 운명을 바꿔라>



열정과 집념으로 운명을 바꿔라
창세기 25:29-34


우리는 열정이 있는가?
우리는 열정이 있는가? 만약 열정이 있다면 어느 정도의 열정인가? 그리고 그 열정이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는 무엇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오늘 내 삶과 내 열정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주목한다. 지금까지 목회와 사역을 감당하면서 내 나름대로 남다른 열정으로 살아왔다는 판단을 하지만 실제로 그 열정이라는 것이 내 삶과 어떤 상관관계를 가졌는지 다시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사회적기업 나섬을 세우고 커피볶을 만들어 운영한지 불과 5개월도 되지 않은 신출내기 사회적 기업가가 한 일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말한다. 엄청난 추진력과 열정이라면서 칭찬인지 질투인지 알듯 모를듯한 말들을 한다. 열정은 이렇게 나와 나섬을 지배하는 소중한 자산이며 삶의 모습이다.

내가 구로공단에서 눈에 문제가 생겨 더 이상 사역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 내게 주어진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절망 뿐이었다. 30대 초반의 젊은 목사가 당하는 고통은 눈이 안보인다는 단순한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과 두려움'이었다. 남은 인생에 대한 처참한 무기력과 슬픔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막막함이었다. 이제 내 삶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한없는 무서움이었다. 정말 이렇게 될 수도 있는 것인가를 수도 없이 물으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집에는 작은 아이가 장애를 갖고있고 나는 눈이 안보이는 엄청난 장애를 평생 쥐고 살아야 한다는 그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마주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  아침에 폭격 맞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처럼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울고 또 울었다. 저주받은 인생에 대한 내 속 가장 아픈 곳에서 나오는 피눈물이었다. 단돈 오백원이 없어 나는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선배에게 공중전화를 했었다. 한번 만나 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바쁘니 나중에 만나자는 것 뿐이었다. 차비가 없어 몇 정거장을 걸어 집으로 왔었다. 아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을 흘려본 사람만이 인생을 제대로 안다고 했던가? 나는 너무도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나는 그때에 내 눈물의 의미를 가슴에 새겨놓았다. 둘 중에 하나였다. 다시 일어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내 삶을 정리하는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그 고통을 안고 살 것인가 아니면 고통의 사슬을 끊기 위하여 목숨을 끊을 것인가의 선택이다.

얼마 전 아내가 극동방송 간증수기 공모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방송에서 아내의 간증을 들었다. 또 눈물이 난다. 아직도 내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그때 내 아픔과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아내의 아픔이 교차했다. 나보다 더 아팠구나 하는 생각에 또 그렇게 한없이 눈물이 났다. 그 당시의 우리 가족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큰 아이는 지금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놈은 말은 안해도 마음에 그 시절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산산 조각난 삶이다. 더 이상 어떻게 추슬러볼 수 없는 인생이 되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나는 속절없이 추락했다. 추락하는 것에는 정말 날개가 없었다. 다 떨어진 줄 알았는데 더 추락할 공간이 남았는가 싶었다. 얼마나 더 아파야 하는지 하늘에 묻고 싶었다.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창백한 주검의 얼굴을 한 채로 꿈속에 나타나기도 했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보다 이제는 죽어야 하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전달되었다.
  
내가 다시 죽음으로부터 삶에 대한 열정으로 마음을 바꾼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렇다고 눈물이 마른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고통의 눈물은 단 하루도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는 매일 같이 울며 산다. 나는 정말 울보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이 가득하다. 이것이 차이다. 고통의 눈물은 여전히 흘러도 이제 죽고싶다는 생각이 아니라 더 의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오기가 나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것은 집념이고 열정이다.
나는 다시 일어나기로 했다. 1995년 뚝섬으로 사역지를 옮기고 정말 열악한 정도를 넘어 밑바닥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가난하고 엎신여김의 한 복판에서 살았지만 그래도 그때가 행복했다. 나는 모든 이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었다. 먹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물며 배설하는 것까지 눈치를 보아야 했다. 결국 우리는 그곳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마음은 행복했다. 없어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돈이나 세상의 가진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마음이다. 생각이며 가치이다. 우리가 지향하고 꿈꾸는 것으로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를 상상하는 그 비젼이 오늘 우리의 존재를 행복하게 한다. 가진 것으로가 아니라 가질 것으로 행복하면 우리는 살 수 있다. 우리를 살게하는  힘은 열정이며 집념이다.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 나는 운명을 안다. 주어진 운명이 얼마나 우리를 슬프게 하는가?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러한 운명이 주어져야 한단 말인가? 아이와 나의 장애를 바라보았을 아내의 한숨이 들리는 것 같다. 그러나 아내는 운명을 이겼다. 그래서 아내는 극동방송 간증수기 공모에서 일등을 한 것이었다.
운명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운명이다. 마치 내가 미국 사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태어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두 번째는 내가 후천적으로 만든 운명이다. 물론 이것도 원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원치 않아도 가져야 하는 운명이다. 둘 다의 공통점은 이런 것이다. 갖고 싶어 가진 것이 아니라 갖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가져야 하는 운명이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우리 아이는 선천적 운명이며 중간에 내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는 후천적 운명이다.

야곱이 그랬다. 둘째로 태어나는 운명이었다. 쌍둥이 형제의 순서는 단 몇 초 혹은 몇 분의 태어나는 순서에 따라 달라진다. 장자의 운명과 차자의 운명은 다르다. 그 차이는 자신들만의 것이 아니고 미래의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진다. 운명의 대물림이다. 야곱은 이 딜레마를 극복하고 싶었다. 운명을 넘어 새로운 미래를 만들고 싶었다. 결코 주어진 운명에 맡겨 사는 그 복종의 삶에 대하여 거부하고 싶었다.
태생적 한계와 원초적 운명에 대한 거부였다. 이것이 역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새로운 역사의 주체는 야곱같은 사람이다.
우리에게 운명은 한계이며 고난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역사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운명을 거스르려는 사람을 쓰시기  때문이다. 운명을 극복하려는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열정적인 삶을 살라
사다리는 더 높이 오르려는 사람의 열정에 의하여 만들어 진 것이다.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려 하는 사람만이 사다리를 만든다.
'나는 99%의 가능성이다'의 저자 전신애의 고백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새로운 세상에서 성공한 인생을 살게 된 것은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녀는 이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서 타국으로 떠난 이주자였다. 유학이나 직장생활을 하려는 어떠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아이들 키우면서 살려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생각을 가지고 떠난 이주민의 삶이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런 의욕도 없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열정적으로 살기로 한다.
그리고 그녀는 부시 정권에서 차관보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입지전적인 인물이 된다. 마치 성서의 요셉처럼 말이다. 그녀를 성공하게 한 것은 열정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 삶을 반전시킬 수 있다. 문제는 집념과 열정이다. 자기를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려는 일시적 유혹을 극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야곱 같은,  전신애 같은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열정과 집념은 인생의 한계와 장애를 극복할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다. 나는 이미 그것을 경험했다. 우리 나섬공동체와 나의 삶속에는 야곱의 피가 흐른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장애나 고난도 이길 수 있었다. 운명은 바꾸려는 사람 앞에서는 결코 운명일 수 없다. 운명도 바뀌어진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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