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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다문화 이주자 선교와 디아코니아 ----- (사)나섬공동체 대표 유해근 목사


한국교회의 다문화 이주자 선교와 디아코니아
- 나섬공동체의 사역을 중심으로-

                                                                             
가. 한국교회의 선교와 다문화 이주자

한국 교회가 전세계에 파송한 선교사의 숫자가 적어도 15,000명을 넘어 거의 20,000명에 이른다는 보고가 사실이라면 우리의 선교적 열정과 열심은 가히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교에 대한 이러한 관심과 사명감은 전세계 어디에서도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땅끝까지 복음을 들고 나가려는 이러한 현상 속에서 매우 의미있는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그것은 다문화 시대에서 일어나는 변화다. 곧 이주민들의 유입이다. 선교와 다문화 이주민의 유입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한마디로 땅끝까지 가려는 선교의 전통적 방법이 이주민 즉 땅끝에서 온 사람들을 통한 새로운 선교의 패러다임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선교적 열정은 이제 다문화 시대를 맞이하여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21세기 새로운 유목민의 시대에서 선교와 목회의 컨텐츠도 변화되어야 한다. 보다 효과적이며 신속한 선교로의 변화다. 경제적이며 직접적인 선교로의 변화다. 보내는 자와 보내심을 받은 자가 구별되지 않아도 좋다. 모두가 함께 공감하며 동시에 그 선교적 열정을 열매로 확인할 수 있는 선교의 시대가 된 것이다. 선교라는 이름으로 직장에서 사표를 쓰지 않아도 좋다. 결혼을 미루고 선교하러 가야한다는 강박관념도 없다. 이제 내 이웃 속에서 선교가 가능해 진 것이다. 선교적 열정과 조금의 시간을 내면 얼마든지 세계선교가 가능해 진 것이다. 비행기를 타거나 비자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다. 이제는 내 주변과 이웃 공동체에서 땅끝선교의 대상을 찾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선교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누구이며 어떻게 그들 옆으로 다가서는가의 문제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열린 마음만이라면 얼마든지 선교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제 그 새로운 선교로의 도전이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나. 다문화 이주자들의 현황과 문제점

  필자는 1992년 겨울에 구로동에서 외국인근로자로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다문화 이주자 사역의 역사요, 시작이다. 당시만해도 구로동은 얼마나 척박한 지역이었던지... 그곳에 벌집이라 불리는 작은 골방에서 나는 그들을 만났고, 그것은 거의 생존의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최악의 인간 군락지처럼 보여졌다. 생존만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몸둥아리 하나만이라도 누일 수 있으면 되었다. 큰소리는 그만두고 작은 숨소리만 낼 수 있어도 감사하다고 여기고 살았다. 그뿐이 아니다. 공장에서는 사람취급을 받을 수 없었다. 한국인들의 인종차별은 독일의 나찌보다 결코 약하지 않았다. 한국인 사장님들과 한국인 동료들은 외국인근로자들을 동물로 바라보거나 혹은 노예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임금체불은 거의 90%의 외국인노동자들이 경험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임금체불은 그래도 나았다. 산재문제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손가락이 잘라지거나 혹은 목숨을 잃어도 보상받을 수가 없었다. 참으로 참혹한 노동현장이었다. 
그리고 지금 거의 십 수 년이 지난 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외국인노동자들의 문제는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고 그들의 생존과 노동조건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다문화 계층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바로 다문화 결혼 가정이다. 결혼 이민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얼마 전 통계에는 그들과 더불어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국내 거주 외국인의 수가 120만 명에 이른다고 발표하였다. 우리나라 인구의 2%를 넘어 다민족 국가로의 진입이다. 전에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생겨난 것이다. 다문화라는 용어는 2000년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용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다문화라는 용어는 일반적이 되었고, 정부나 민간단체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추세라면 다문화 이주자의 숫자는 앞으로 우리 인구의 10%에 이른다니 참으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까지 단일민족이니 순혈주의라는 말을 서슴치않고 자랑스럽게 배웠거나 가르쳤던 우리 사회의 변화라는 점에서 정말 뜻밖의 변화다.

몽골에서 온 어느 결혼이주여성에게서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다. 

"목사님, 우리 몽골에서는 여자가 아이를 낳고 무엇을 먹는지 아세요? 저는 처음 한국에 와서 아이를 낳고 정말 힘이 들었어요. 시어머니가 미역국이라는 것을 한 솥 가져다주면서 매일같이 먹으라는 겁니다. 우리 몽골은 바다가 없어서 미역은 처음 보았는데 말이에요.”

"정말 많이 힘이 들었겠군요. 그 다음에 어떻게 했어요?"

"저는 미역국을 먹을 수가 없었어요. 우리 몽골에서는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양고기나 양젖을 먹어요. 그러니 정말 힘이 들 수밖에 없었지요."

그 다음에 베트남에서 온 한 여성이 말한다.

"목사님, 우리 베트남에서는 돼지 족발을 삶아서 먹어요. 그것을 먹어야 하는데, 시어머니가 계속해서 미역국만 먹으라니 정말 힘이 들었어요. 미역국을 먹다가 토하기까지 했는 걸요?"

그녀들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시어머니와의 갈등은 말할 것도 없고, 남편과의 갈등도 매우 심각했다. 이혼을 생각한다는 결혼 이주여성도 있었다.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아이들의 문제다. 아이들이 엄마에 대한 열등감으로 움추러든다는 것이다. 어느 일본인 결혼 이주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아이가 처음 한국 학교에 갔을 때에, 자기 엄마가 일본 사람이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어느새 아이들이 우리 아이를 놀리는 겁니다. 엄마가 일본여자라고 놀리니 아이가 그 다음부터 엄마의 존재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지요.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아예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다른 한국 아이들에게 엄마가 일본여자라는 것을 숨기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우리 공동체에 한국인 아빠와 필리핀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한필이라는 아이가 있다. 물론 다문화 가정의 아이다. 엄마는 아직도 한국말을 하지 못하니 아이도 한국어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다. 다문화 가정의 아픈 이야기는 자녀 교육이라는 공통의 문제 앞에서 가장 극에 달한다. 언어 소통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문화적 갈등과 자녀 교육 같은 가장 일차적인 욕구도 제대로 채워지지 않으니 그들의 절망감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이러한 문제가 이제 노출되어 우리 사회와 교회의 과제로 남겨지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결혼이민자와 외국인노동자의 문제가 항상 일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 사회의 가장 본질적이며 기본적인 욕구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여기서부터 교회의 디아코니아적인 사역과 선교의 접촉점이 시작되는 것이다.


다. 다문화  이주자 선교와 디아코니아

1. 선교적 접촉점으로서의 디아코니아

  예수는 디아코니 선교사의 모범이시다. 예수의 목회와 선교는 모두 다 디아코니적 요소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실제로 예수의 선교를 보라. 아프고 병든 사람에게 무엇을 우선하였는가? 배고픈 민중에게 무엇으로 먹이시고 입히셨는가? 가난과 소외의 그늘 속에서 떨고 있던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주시는가? 이방 여인에게 다가서 따뜻한 말 한마디로 디아코니적  삶을 실천하신다. 감동이다. 디아코니는 감동의 선교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선교의 접촉점은  디아코니로부터 시작한다.
다문화 이주자들을 향한 교회의 마음도 디아코니적이어야 한다. 그들은 가장 많은 아픔과 절망감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말로만 빵을 말하거나 사랑을 주장하는 것은 위선이다. 다문화 이주자들의 삶속에 함께 걸어 들어가는 결단이 없이 그들을 복음의 친구로 초청할 수 없다.

  난소암에 걸린 필리핀 여자는 걷지도 못한다. 우리에게 찾아온 그 여자의 절망적인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여러번의 방사선 수술과 치료가 이어져야 한다. 돈도 없고 돌볼 친구도 없다. 병들어 죽어가는 그녀에게 예수는 치료자의 모습이어야 한다. 교회가 그녀를 돌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그녀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돌보려했다. 물론 지금 그녀는 천국에 가고 없다. 죽음의 절망 속에서 사랑은 마지막 희망의 불씨이다. 사랑은 어느 누구에게나 나누어져야만 한다. 그것이 교회가 다문화 이주자들에게 나누어줄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배가 고프거나 갈 곳이 없어 노숙자가 되는 이주민들도 있다. 타국에서 거지가 되거나 노숙자가 된다는 것은 죽음 이상의 고통이다. 그들에게는 빵과 거처할 쉼터가 필요하다.
  특히 한국의 외환 위기와 금융대란 그리고 엄청난 실업의 위기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운명은 어떠했을까? 자살을 하거나 거리의 노숙자가 되거나 혹은 미치광이처럼 알콜중독자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 생겨났다. 한국인 노숙자의 거친 문화 속에도 들어갈 수 없는 밑바닥의 걸인들을 본적이 있다. 그들에게 디아코니의 사랑은 복음 자체이다.

  다문화 이주자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가 바로 선교의 접촉점이다. 문제가 있어야 복음이다. 복음은  제가 많은 사람에게 더 크고 소중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문제가 많아야 복음의 필요도 가중되는 것이다. 복음과 문제는 언제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아니던가!

  다문화 이주자들이 겪고 있는 문제가 선교의 접촉점이다. 상담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따뜻한 상담과 위로가 필요하다.  예수가 수가성의 여인에게 한 것처럼 말이다. 병들고 아픈 사람에게는 교회가 병원이 되어야 한다. 베데스다의 병자에게 예수가 한 것처럼 말이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오병이어가 맞다. 나그네 같이 인생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삭개오에게 하신 것처럼 해야만 한다. 모든 문제는 가장 좋은 선교의 접촉점이 된다.


2. 디아코니아와 사회통합

  다문화 이주자들에게 일방적인 디아코니아는 그들을 국제 거지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 사랑이 인간을 존엄하게 하고 자기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어야 한다면, 우리의 다문화 디아코니 선교가 결코 그들을 노예근성에 사로잡힌 거지로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강하게 이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우리의 지나치고 일관성없는 디아코니에 대한 경계를 말하려는 것이다. 디아코니가 물질의 문제를 반영하는 것도 경계하여야 한다.

"목사님, 왜 이 공동체에서는 우리에게 저쪽 사람들처럼 하지 않아요?"
"저쪽 사람이라니요?"
"저 교회에서는 매주일 레스토랑을 빌려서 스테이크도 사주고, 겨울이면 비싼 오리털 점퍼도 주는데... 그뿐 아니라 휴일이면 비싼 놀이시설에 데리고 가서 재미있게 해주는데..."

"저 교회에서는 우리가 교회에 나가면 돈을 줘요. 돈 받으러 우리는 교회에 가요"
"저기에서는 참 이상하지요. 우리들을 거지취급을 해요. 저는 그것이 싫어요. 우리를 완전히 애들처럼 다루지요. 물론 좋은 것도 주지만 그 좋은 것이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요"

  우리의 디아코니는 최소한의 디아코니이다. 빵과 약 그리고 쉼터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모두가 최소한의 것들이다. 가장 좋은 것으로 먹이고 재우는 것이 디아코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기독교적 사랑의 실체를 왜곡하는 것이다.

  어느 쉼터의 일이다. 그곳에 가면 모든 것이 완벽하다. 먹고 자고 쉬고 하는 것에 아무런 불편이 없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무진장의 사랑이다. 아니 사랑보다 더 많은 물질이다. 먹고 사는 것에 불편이 없는 정도를 지나 더 이상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 그냥 머무르는 것이 좋다. 누구도 나가라는 사람이 없다. 먹고 자면 그 다음날에도 여전히 냉장고에는 먹을 것들이 무진장이다. 이것이 사랑인가?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지는 외국인 노동자의 저 안락한 삶은 누구의 책임인가? 그들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것이다. 고향의 가족들과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나그네의 삶을 선택한 사람이다. 그에게 안락함의 추구는 가장 본질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대신 그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그의 가족들은 그의 안락함 때문에 고통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사랑인가?

지금 그들은 밖으로 나가서 일해야 한다. 그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권면하여 세상으로 내  보내는 것이 더 큰 사랑이다. 먹을 것이 많아서 더 이상 일하기 싫어하는 것보다 이제 더 이상 먹을 것을 주지 않겠으니 나가서 돈을 벌기 위하여 일하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어디까지가 디아코니인가? 예수가 모든 것을 기적같은 디아코니로 해결하셨다면 좋았을 것을 그의 사역은 거기서 머물고 말았다.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 중 몇 명에 대한 디아코니다.
디아코니가 목적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회통합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목적이다.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것보다 스스로 먹을 것을 찾도록 인도하는 것이 더 귀한 사랑이다. 디아코니의 가장 본질적인 목적은 뿌리를 내린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디아코니가 사회통합의 디아코니이다. 디아코니가 만능이 아니라 스스로 디아코니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세워주는 것이 더 소중하다. 받아먹는 거지가 아니라 거지의 삶을 버리고 나누어 주는 삶으로, 디아코니의 대상이 아니라 디아코니의 주체가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공동체의 영성이 저들에게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나눔의 삶을 실천하도록 그들을 권면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가 아프다고 찾아 왔다. 치료해 달라는 것이다. 공짜라면 얼마나 좋은가? 자기들끼리의 사랑은 없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의존한다. 의존적인 인간이 되 버린 것이다. 전부 그렇게 했으니 이번에도 공짜로 치료받아야 한다?

"이번에는 당신들끼리 먼저 돈을 모으시오. 그러고 나서 부족한 부분만 돕겠소"

  그 후부터 그들은 공동체적 생활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눔은 우리만의 삶이 아니다. 나눔과 봉사는 저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마땅하다.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기를 원한다면 그들 스스로 공동체적이어야 한다. 서로 사랑할 줄 모르면 결코 진정한 사회통합으로 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디아코니아는 최소한의 것이다. 죽지 않을 만큼의 것이다. 배고파 얼어죽지 않을 만큼의 봉사다. 물론 그 다음도 소중하지만 그 마음만은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야 그들의 운명이 달라진다. 그렇게 강하게 키워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주는 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스스로 세워지는 것이 내가 주는 것보다 더 크고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일방적인 베품이 아니라 절제된 책망도 필요하다. 때론 매몰찬 냉혈인간처럼 보이겠지만 그래서 그들이 우리 사회에 통합될 수만 있다면 그래도 좋다.



라. 나섬공동체의 사역과 디아코니 선교

1. 서울외국인근로자선교회

1996년에 설립된 본 선교회는 우리 공동체의 모태가 되는 기관이다. 현재 25,000명 정도가 등록되어 있으며, 현재 몽골권과 서남아권, 이란을 포함한 이슬람권, 필리핀을 비롯한 영어권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매주일 약 200명 정도가 예배를 비롯한 다양한 디아코니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본 선교회에서 만들어 운영하는 디아코니아 프로그램은 상담과 언어교육 등 문화 적응 프로그램, 치과를 비롯한 의료 서비스 지원 사업, 실직한 외국인근로자들을 위한 쉼터 선한사마리아인의 여인숙 운영과 무료 급식 사업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일 년 중 몇 차례에 걸쳐 우리 국토순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외국인근로자와 함께 떠나는 한국 문화 탐방 프로그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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