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새벽 문득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다. 만약 내가 건강한 몸으로 살았다면 과연 온전한 사람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그것은 분명 섭리였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주님의 선물이었다. 내 장애는 선물이었다!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나는 어리석고 교만한 사람이었다. 너무 괴로워 하나님을 원망했고 주변 사람들을 괴롭혔다. 스스로 자학했으며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죽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어딘가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살겠다고 무작정 가출을 생각해 본 것이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러다 눈이 완전히 안 보이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고 나는 스스로 광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내 안에 광야를 만들었고, 고독한 섬 안에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이미 광야에, 무인도에 살고 있다. 굳이 광야를 찾아가지 않아도, 무인도를 찾지 않아도 드디어 내가 바라던 광야와 무인도에서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살고 싶은 곳이 광야였고 무인도에서 낚시하며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나 자신이 광야와 무인도가 되었으므로 나는 온전히 그곳에 있다. 내 삶이 광야이고 내 인생이 무인도가 되었다. 누군가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답하겠다. 나는 여기 이 자리가 좋다.
만약 내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확신하건대 나는 죽었을 것이다. 나를 이 자리로 이끄신 분은 주님이 분명하다. 지금의 내 불행과 비극은 오롯이 은총의 선물이다. 보기에 좋은 것만이 선물이 아니다. 때로 은총의 선물은 아프고 괴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기도 한다.
모세에게 광야가 그랬다. 그에게 광야의 삶이 없었다면 쓰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의 모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광야의 은총이 있었음으로만 가능했다. 무인도 같은 광야에서 모세는 물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말이다. 그의 고난은 저주였던가? 저주가 아니라 선물이었음을 후에 알았다. 그는 후에야 비로소 광야와 무인도 같은 삶이 은혜의 선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이제 알았다. 내 장애가 섭리이며 은총이었다는 것을! 사실 눈이 제대로 보였다면 나는 한사코 세상으로 달려 나갔을 사람이다. 세상에서 사고나 치고 문제나 일으키고 가족들은 나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였을 것이다. 마지막에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노숙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나를 주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오늘 나섬의 목회자로 인도하셨으니 내 고통은 얼마나 큰 은총인가?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어디든 스스로 갈 수 없다. 누군가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다. 앞뒤가 막힌 삶이란 이런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함, 그 자체가 내 인생이다. 나는 무능하고 불행하고 아프지만 그것이 은혜가 되어 나를 살린다. 광야와 무인도처럼 아무도 없는 막막함 속에서 나는 산다. 오직 은혜로만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