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워싱턴 외곽에 작은 공동체가 세워졌다. 그 공동체의 이름은 세이비어 교회다. 설립자인 고든 코스비 목사는 2009년 죽는 날까지 그 교회의 목회자로 살았다. 그가 마지막 임종을 한 곳은 자신이 설립한 노숙자 병원 ‘그리스도의 집’이었다. 자신이 설립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자신이 세운 노숙자 병원에서 죽기까지 그는 평생 그렇게 살았다. 미국 예일대학교 교수였던 헨리 나우웬도 세이비어 교회에서 세운 공동체에서 사역을 배웠으며 침묵의 공동체에서 영적 변화를 경험했다. 세이비어 교회의 두 축은 내면의 영적 변화와 외면의 실천적 삶이다. 내적 영적 변화와 외적인 삶의 실천력이 세이비어 교회를 있게 하는 큰 힘인 것이다.
영적 에너지와 실천적 삶의 조화롭고 균형적인 사역만이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을 가져온다. 사실 이런 내적 영성과 외적 실천적 삶은 어느 하나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다. 영적인 면만 강조한다면 머리만 크고 손과 발은 작은 기형적 모습이 될 것이며 영적 에너지가 사라진 외면적 모습만 포장된 공동체는 속 빈 강정과도 같이 허무한 것으로 끝날 수 있다. 내적 영성과 외적 사역은 불가분의 필수적 조건이다.
수십 년 전 신학교에서 배운 해방신학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한 손에는 총을 다른 한 손에는 성경을!' 그때에도 깊이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자신의 실존적 결단과 삶을 설명하고 해석하려면 반드시 성서적 배경과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 왜 나는 오늘 이 고난의 삶을 살고 있는지 자신의 삶을 인도하신 주님의 은혜와 고백의 삶이 전제되지 않는 공동체는 오래가지 못한다.
문제는 ‘영성’이라는 것인데 영성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영성은 바로 내면적이며 영적인 변화와 힘이고 외적으로 드러난 삶과 실천적 고백이다. 진정한 영성이란 내면의 영적인 체험과 깨달음이며 동시에 일어나는 외면적 고백인데 그것을 우리는 사역이라 혹은 실천적 삶이라 부른다. 내적 영성과 외적인 고백 중 하나만 있는 영성은 없다. 함께 이뤄져야 진정한 영성의 조건이 되고 세상을 바꾸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세이비어 교회를 공부하면서 고든 코스비라는 목회자에게 눈길이 간다. 과연 그의 영성과 삶은 어떤 것이었기에 그토록 위대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을까? 교인이 불과 150명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은 숫자에 연연하지 않았고 강한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것은 연 2,000만 불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재정적 자립과 다양한 사역이 일어나는 힘이 있었다는 점이다. 세이비어 교회는 전 교인이 힘을 모으고 세상에서 빛 되고 소금 되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공동체를 이루었다. 단순히 자기들만의 영적 공동체를 넘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였다. 세상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고통받는 이들의 친구로 남으려 했다.
특히 방주공동체라는 장애인 공동체에서 헨리 나우웬은 놀라운 경험을 한다. '그들과 함께 살아라. 그들이 너를 낫게 하리라'라는 내면의 소리를 들은 것이다. 결국 나우웬은 그 경험 후 후일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장애인 사역자로 여생을 헌신하였다.
‘토기장이의 집’ ‘그리스도의 집’ ‘카이로스의 집’ ‘방주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세이비어 교회는 위대한 주님의 공동체로 쓰임 받고 있다.
다시 나섬을 생각한다. 우리의 갈 길이 이것이다. 깊은 영성의 고백이 필요하다. 많이 지쳤다. 그것은 내면의 영적인 힘이 떨어졌음을 말한다. 겉을 만드는 것은 내면이다. 속이 없는 외적인 모습은 안개 같은 것이다. 그것은 곧 사라질 것이므로 속을 다시 채워야 한다. 알갱이 없는 겉은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다. 깊은 영성의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일어나야 한다.
오늘 우리가 세이비어 교회를 배워야 한다. 부흥과 성장이 아닌 성숙함과 건강한 교회를 생각하여야 한다. 세이비어 교회는 작지만 강한 공동체로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다. 왜 커야 하는지를 의심하고 그것을 거부한 세이비어 교회에 성령이 역사하셨다. 세이비어 교회와 같은 교회가 우리 한국교회에 필요하다. 거대한 대형교회가 아니라 작아도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부흥하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다운 교회가 필요하다. 나섬이 바로 그런 교회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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