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에 눈이 무척 아팠다. 최근에 괜찮았는데 다시 아프기 시작한다. 눈이 아프면 정말 미칠 만큼 괴롭다. 게다가 안압이 올라가면 그때는 죽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싶은 정도다. 잠 못 이루는 날이 반복되어서인지 눈이 아프기 시작한다. 눈이 안 보이는 것도 힘든데 눈의 통증이 극심하니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눈이 아픈 밤 나는 몰래 울곤 한다. 아내가 잠에서 깨어날지 모르니 속으로 운다.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프고 눈도 아프니 서러워 운다. 너무 속이 상하고 서글퍼 울지 않을 수가 없다.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걸까? 아직도 내가 더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있는 걸까? 안 보이는 것을 넘어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고통은 나를 새롭게 한다. 하루라도 육신의 가시가 나를 찌르지 않으면 다시 구습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내 눈을 찌르시는 것 같다. 눈이 아프기 시작하면 ‘또 시작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나를 두려움으로 몰아간다. 나는 이 고통을 어떻게 이겨야 할까?
다음날 병원을 찾았다. 일죽의 작은 시골병원 의사가 내 눈의 고통을 안다. 그는 주사로 내 눈의 고통을 치료하고 가라앉게 한다. 그도 나와 비슷한 병을 경험했으므로 내 고통을 잘 안다. 며칠 동안 눈이 아팠다고 하니 그의 주삿바늘이 내 목뒤를 사정없이 찌른다. 그러나 그 정도의 고통은 눈이 아픈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 주사를 맞고 눈이 안 아플 수 있다면 하루에 몇 번이라도 주사를 맞을 수 있겠다. 주사를 맞고 조금 나아졌는지 전날보다는 한결 덜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눈에 순간적으로라도 가시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생기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아무튼 나에게 육신의 고통은 나를 살리는 시간이다. 나는 아픔으로 살아간다. 내가 사는 방법은 고통을 통해서다. 그러므로 눈이 아픈 날은 역설적이지만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역설의 은혜다. 아픈 것보다 더 아픈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잃어버리는 삶이다. 눈이 아픈 밤이면 주님께 울면서 기도를 한다. 살려달라고 말이다. 아픔으로 나는 나를 찾아간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자족함도 배우고 내 안의 주님이 얼마나 강하신지를 새삼 고백하게 된다. 나는 아픔으로 주님을 만나고 아픔으로 나를 회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