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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톡556_몽골 초원의 기독교를 찾다

올해 6, 몽골의 아르항가이를 여행하며 마음에 품었던 바람은 800여 년 전 제국의 수도 하라코름에 있던 십자사라는 교회터를 찾는 것이었다. 어떤 책에서 분명 교회터가 그곳에 있다는 글을 읽고 몇 년 전에도 일부러 그곳을 찾아갔었다. 하지만 찾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당시에도 몽골에 사는 지인들을 통해 그 교회터를 찾아달라 부탁했지만 정작 그곳에 사는 이들은 그곳에 교회터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하라코름은 제국의 수도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고 보잘것없는 도시였다. 제국의 수도라 하면 엄청난 건축물에 놀라운 문화유산이 남아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교회터는 물론이고 제대로 된 성터도 남아있지 않았다. 성을 쌓지 않고 길을 만든다는 유목민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었다. 그들은 성을 쌓지 않았다. 유목민은 길을 만드는 사람이었으므로 하라코름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교회터만은 꼭 찾고 싶었다. 초원의 기독교의 흔적을 찾고 싶었던 것은 한국 교회사가 초원의 기독교와 연관되어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A.D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았던 네스토리우스와 그를 추종하던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에베소에 도착하지도 못한 채 시리아로 도망쳐야 했다. 그 후로 그들은 동방으로 흘러들어와 당나라에서는 경교라 불리었고 후일 몽골제국의 수도 하라코름에까지 전파된 것이다. 적어도 하라코름은 칭기즈칸 이후 오고타이칸과 구육칸 그리고 몽케칸까지 제국의 수도였다. 그곳에는 분명 교회가 있었고 그 당시 그 교회를 십자사라 불렀다 한다.

늦은 시간 일행과 함께 하라코름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하라코름의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오직 십자사였다. 이번 몽골 아르항가이를 여행하기 전부터 나는 몽골의 현지인 보르마 목사님에게 하라코름의 교회터를 찾아보라 주문했다. 보르마 목사님도 아직 찾지 못한 듯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티벳 불교사원의 언저리에서 놀랍게도 십자사의 흔적을 찾았다! 기적 같은 발견이었다. 정말 반가웠다. 물론 교회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곳에 교회가 있었다는 작은 표식이 있을 뿐이었다. 그곳은 지금도 초원이다. 메뚜기가 많고 초원의 냄새가 가득했다. 창조의 냄새 허브향이 풍겨 나왔다. 행복했고 감사했다. 드디어 초원의 교회를 찾은 것이다. 동방기독교의 흔적을 찾은 것이다. 원나라의 태조 쿠빌라이의 어머니는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이었다. 쿠빌라이의 막내딸은 고려 충렬왕의 왕비가 였고, 그 후로 몽골의 공주는 공민왕 때까지 고려의 왕비가 되었다. 몽골의 공주를 따라 수많은 몽골인이 고려에 왔을 터이니 그때 초원의 기독교도 따라오지 않았을까? 고구려가 망하고 만주 지역에는 발해가 일어났고 지금도 발해의 유적지에서는 당시 네스토리안 기독교의 흔적이 출토되고 있다는 고고학의 보고가 있다. 신라에서부터 고려와 발해 등 우리 역사 속에는 분명 동방기독교의 흔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주목한다. 이제 한국교회의 역사는 서방기독교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역사관이 아닌 새로운 동방기독교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십자사 교회터의 발견은 작은 일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시작이다. 한국교회의 숨겨진 비밀을 찾는 일이 시작되어야 한다. 아르항가이 하라코름에는 십자사가 있었다. 올여름에 나는 그 십자사를 찾았다. 초원의 교회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날은 잊을 수 없는 감격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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