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취급방침
오시는길

TEL : 02-446-4195
FAX : 02-458-2982

서울시 광진구 광장로 1
(광장동 401-17)
나섬교회

COPYRIGHT© 2016
NASOMCHURCH
ALL RIGHTS RESERVED.



노마드톡

> 유해근목사 > 노마드톡
bible
   
몽골 평화캠프와 평화경제공동체의 비전과 가능성

몽골 평화캠프와 평화경제공동체의 비전과 가능성

 

나섬공동체 대표 유해근 목사

. 한반도의 평화와 몽골의 역할

 

1. 북한선교의 현실과 한계

 

북한선교를 말하자면 한국교회의 이념적 성향과 정치적 진영논리의 향방에 따른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이념지향적인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북한선교는 그 한계를 노출할 수밖에 없다. 특히 진영논리가 강한 우리의 정치상황에서 북한선교는 언제나 정치적 변수에 의하여 나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북한선교는 탈북자 지원사업, 북한돕기 운동, 북한교회 재건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 이후 탈북자 지원사업은 매우 제한적이며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탈북자의 숫자가 크게 감소함으로 인하여 사역의 힘을 잃어가고 있다. 특히 탈북자들 중 현재 교회에 출석하는 숫자는 6%에 지나지 않는다는 보고가 있다. 우리의 탈북자 지원사역이 매우 헌신적인데 비하여 그 결과는 매우 미미함을 의미한다. 탈북과정에서 한국교회는 매우 많은 액수의 경제적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전시적이며 개교회 중심의 사역으로 인하여 그 실익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탈북자 선교에 엄청난 돈이 들어감에도 선교적 결과를 얻는데 실패한 이유는 교회마다 과시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교회에 출석하는 탈북자들에게 교통비나 지원금 등의 명목으로 돈을 주는 행위는 탈북자 선교에 결코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일부 교회의 현금성 지원은 다른 교회의 탈북자 선교를 방해함은 물론 궁극적으로 선교의 문을 닫게 하는 매우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탈북자 선교 중 그나마 가능한 것은 중국현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탈북여성 중심의 사역이다. 그 숫자는 선교단체들마다 분분한데 적어도 5~10만 명쯤 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중국 현지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현실이다. 중국선교의 문이 닫힌 현재 중국 내의 탈북자 지원사역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두 번째의 북한선교는 직접적인 북한 돕기다. 그러나 이 사역은 북한에 들어갈 수 있거나 북한 당국자들과 접촉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동안 고아원 또는 빵공장 설립과 지원, 병원과 약품지원, 평양과기대 등 의료와 교육 사업 등 다양한 방면으로 펼쳐지던 북한선교는 현재 크게 줄어든 상태다. 그 이유는 북한에 대한 우리나라의 정치권력의 지형에 따른 변화와 북한에 대한 국제적 환경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현재는 제3국을 통한 일부 지원이 있을 수 있으나 그 사역도 제한적이다.

 

세 번째 북한선교의 전략은 북한교회 재건이다. 이 문제는 거론할 상황이 아니다. 언제 북한에 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불투명함을 넘어 그 가능성이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아가 북한에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북한선교라는 등식의 한국교회의 근본주의적 입장은 매우 논쟁적 사안이다.

 

이렇듯 북한선교의 현재는 한계를 갖고 있거나 매우 불확실하다. 특히 한국교회와 정치현실의 이념적 진영논리가 지나치게 앞서는 상황 속에서 북한선교란 지속가능하지 않다. 지속가능한 북한선교를 위해서는 현재의 이념적 신앙과 신학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교회의 북한에 대한 이해와 관용이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2. 왜 몽골인가

 

몽골은 1921년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후 소련에 이어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가 된 나라다. 그 후 몽골은 1948년 북한과 공식외교관계를 맺어 소련에 이은 두 번째 사회주의 동맹이 되었다. 1990년 남한과 외교관계를 맺기 전까지 몽골과 북한은 매우 밀접한 형제국가였다. 그러나 남한과의 외교관계 이후 우리나라에 엄청난 수의 몽골인들이 입국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현재 몽골인들은 공식적으로 5만 여명이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외국인근로자, 유학생, 비즈니스와 결혼 이주 등 다양한 목적으로 입국하여 살아가고 있다. 공식적인 숫자가 5만 여명이며 단기 체류자를 포함하여 실제로는 10만 여명에 이른다. 몽골인구 약 350만 명 중 3% 정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몽골은 우리와 한 형제국가다. 1206년 칭기즈칸은 몽골제국을 세웠으며 그의 손자 쿠빌라이칸이 원나라라는 이름으로 중국을 통합한 1271년부터 1368년까지 우리는 고려였다. 고려는 약 100여년을 원의 부마국으로 살았으며 많은 몽골 공주와 고려의 왕은 부부가 되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교류와 관계가 형성되었겠는가? 문화와 언어와 사람이 얽히고 섥혀 우리는 자연스레 몽골이 되었고 몽골은 우리가 되었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몽골은 우리와 하나의 민족이었는지도 모른다. 몽골초원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의 혈통이 우리에게 깊숙이 들어온 흔적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와 그들은 처음부터 남이 아니었다.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하나로 만드셨는데 중간에 흩어져 그들과 우리는 가인과 아벨로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나의 민족이 중간에 갈라진 분단의 형제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몽골은 북한과 남한을 잇는 다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다. 동북아시아에서 우리의 평화와 통일, 나아가 선교적 다리가 될 수 있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일본인가 아니면 중국 혹은 러시아인가? 아니면 미국? 그들은 훼방꾼일지언정 결코 평화와 통일의 다리가 될 수 없다. 그들의 속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굳이 더 언급할 필요도 없을 만큼 그들은 우리의 분단과 갈등을 조장하고 하나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몽골만이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다. 적이 아니라 친구를 만들라는 칭기즈칸의 유언처럼 우리와 몽골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영적으로 몽골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라이며 형제다.

 

 

3. 나섬과 몽골학교

 

이것은 우리를 드러내려는 자만이 아니다. 현실이며 역사이고 그 결과를 서술하는 것이다. 나는 양안의 시력을 잃었으며 이 고통의 삶을 죽는 날까지 살아내야 하는 불행한 인생이다. 그럼에도 내가 살아온 삶속에서 가장 잘한 일이 무언가를 묻는다면 그중 하나가 몽골학교를 세운 일이다. 몽골학교는 1999년 시작되었다. 8명의 몽골아이들을 데리고 학교를 시작할 때에 나는 큰 미래를 상상한 것이 아니고 그런 통찰도 없었다. 단지 우리 아이들이 불쌍한 고아 같은 아이들이었으므로 그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전부였다.

개교한 지 올해로 24년이 되도록 수없이 많은 일들이 있었으며 지금 우리학교는 300명이 넘는 작지 않은 학교가 되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몽골학교를 세울 것이라 말하고 다니는데 그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만큼 몽골학교는 소중한 내 운명이며 나의 인생 그 자체가 되었다. 그동안 우리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간 학생 수는 700여명에 달하며 그 아이들은 몽골정부를 비롯하여 경제, 언론, 외교 기관 등 곳곳에서 매우 소중한 인재로 쓰임 받고 있다.

()몽골울란바타르문화진흥원(이하 몽골문화원)2001년 몽골정부로부터 위임을 받아 설립한 외교통상부 산하 사단법인이다. 그동안 몽골문화원은 많은 대몽골관계의 사업들을 시행하고 감당하면서 준 외교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몽골문화원과 몽골학교를 통해 나는 수많은 몽골 지도자들을 만났으며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몽골문화원과 몽골학교가 어느새 우리나라와 몽골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된 것이다.

 

 

4. 몽골의 역할을 기대하며

 

20세기를 지나 새로운 2000년을 시작할 때에 나는 그동안의 몽골사역을 돌아보며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중국과 북한 변방을 돌아보며 탈북자들과 꽃제비들을 수없이 만났다. 한민족의 평화와 선교를 위한 연구소를 설립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북한선교와 우리민족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준비모임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뜻밖에 몽골을 발견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며 역사의 부르심이었다. 하늘의 뜻이었고 그 뜻 안에서 나는 존재하며 살고 있었다. 그 뜻은 몽골학교와 몽골문화원이라는 현실적 사역으로 이어졌으며 그 사역은 내 삶을 갈아 만들만큼 중요했다. 나는 시력을 잃고 건강을 해쳐가며 그것들을 이루어왔다. 시력을 잃고 건강을 잃은 것을 후회할 겨를도 없이 나는 이 일에 미쳤고 그만큼 사랑했다.

그즈음 몽골을 통하여 탈북자들의 30%가 우리나라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몽골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나는 몽골이 우리와 뿌리가 같은 공동체임을 알았다. 몽골과 하나가 되는 것은 역사의 필연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상상도 해보았다.

먼저 다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몽골과의 다리는 몽골학교가 하면 되었다. 그동안 학교를 설립하고 건축했으며 그것은 내게 죽을 만큼 힘든 일이었지만 지금 나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 희망과 비전이 나를 살게 했다. 꿈을 꾸는 자에게는 고통도 기쁨이 된다.

작은 다리였지만 다리는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다면 그 다리는 현실이 될 것이다. 먼저 한국과 몽골의 다리다. 몽골과 북한의 다리는 오래전 만들어진 다리를 복원하면 될 일이다. 섬 같은 국가로 살아온 우리다. 남한도 북한도 몽골도 모두 섬 같은 나라다. 비루하고 외로웠으며 누구도 도우려 하지 않던 나라였다. 그러나 우리는 꿈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섬들을 이으면 그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니라 육지가 된다. 육지는 다시 대륙으로 이어져 동해에서 지중해까지 연결될 것이다. 동해에서 지중해까지 길을 만들고 싶다. ()실크로드다. 나는 길이 되고 싶어 광야에서 살았다. 광야에 길을 내는 것이 내 삶이라 고백하며 버티어 왔다.

 

몽골의 시대가 올 것이다. 한반도와 연결된 다리로 몽골이 우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몽골과 한국과 북한이 하나가 되자. 그 역할을 몽골이 할 수 있다. 몽골을 통하여 한반도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만들어가자. 북한선교도 평화와 통일도 몽골이 지름길이며 다리다.

 

 

. 새로운 평화경제를 위한 제언

 

1. 평화캠프를 만들다.

 

2018년 나섬은 몽골 울란바타르 외곽 거르더크에 평화캠프라는 작은 집을 지었다. 구소련공군기지가 있던 거르더크는 폐광지역이기도 하다. 내가 2000년도에 처음 거르더크에 갔을 때에 그곳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그곳에 교회를 세운 곳은 당시 허성환 목사님이 목회하던 울산평강교회다. 3000여평의 넓직한 땅을 얻어 교회를 세웠고 그 옆에 드디어 평화캠프를 지은 것이다.

하지만 평화캠프를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비록 작은 규모의 집이었지만 그마저도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평화캠프를 4년여 방치해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20237월 나는 30명의 일행과 함께 그곳에 찾아가 나무를 심었다. 나무가 심기어진 거르더크 평화캠프는 달라지고 있다. 그곳에 꿈을 심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한다. 그동안 거르더크는 매우 큰 도시로 성장했다. 울란바타르가 성장하면서 그곳이 중요한 곳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교회는 부흥하고 그곳 사람들은 우리를 환영한다. 새로운 느낌이다. 처음의 그 황량했던 곳이 아니다. 무언가 가능성과 미래가 태동하는 곳으로 바뀐 것이다.

하나님이 기다리라 하셨는가보다. 그곳을 새롭게 바꾸어 놓으실 때까지 우리로 더 세밀한 꿈을 꾸며 참고 기다리라 하셨나 보다.

 

 

2. 평화경제

 

우리는 경제적 동물이다. 경제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정치적 인간보다 우위다. 정치가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경제적 욕구를 넘어설 수는 없다. 경제적 삶이 보장되지 않는 어떤 이념도 쓰레기이며 경제보다 더 중요한 삶의 가치는 없다고 해도 과한 것은 아니다.

탈북자들이 국경과 강을 넘어오는 것은 결국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북한이 싫어서기보다는 더 잘살고 싶고 당장 굶어죽을 수 없다는 생존본능 때문이다.

그러나 남한에 와서도 그들의 삶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무너지고 차라리 굶어죽더라도 자존감만은 잃고 싶지 않다는 마지막 발버둥을 친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한에 와서 사는 것이 그들 탈북자들에게는 유일한 생존방식인지도 모른다. 당장은 굶어죽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생존권이라도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어도 극단적 자본주의 앞에서 그들의 한계는 노출되고 열등감과 패배감은 젊은 탈북자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불같이 일어난다. 나는 젊은 탈북자들의 창업지원사역을 하면서 그런 현상을 뚜렷이 깨닫게 되었고 그런 경향은 어쩌면 심각한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장 35천여 명의 탈북자들도 책임질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취약함을 돌아볼 때에 탈북자들의 국내입국이 최선인가를 묻고 싶다.

 

그래서 할 수 있다면 탈북자들이 제 3국에 머물며 사는 것도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그중 한 곳이 몽골이다. 몽골은 한반도의 7배가 넘는 큰 땅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하자원을 보유한 자원부국이라는 점도 매우 중요한 장점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인구는 35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다. 특히 탈북자의 30%가 몽골을 통하여 온다면 몽골은 통일의 중요한 정거장이다



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