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교회로 집회가던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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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고 부흥회인지 사경회인지 집회를 인도해 달란다. 장신대 강의 갔다가 무슨 큰 감명(?)을 받았는지 알지도 못하는 신학생이 찾아와 자기네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해 달란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마땅한 강사를 찾지 못했다고 하지는 않지만 아마 내가 제일 만만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연신 작은 교회라며 미안하고 죄송하단다. 죄송하긴? 불러 주기만 해도 황송한데 말이다.
누가 나 같은 삼류를 집회강사로 초청 하겠는가마는 그런대로 기분은 나쁘지 않다. 만만해 보였든 아니면 대단해 보였든 그것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부르시는 곳이라면 그곳이 지하 끝이라도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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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전도사라는 여신학생은 30세가 훨씬 넘은 노처녀란다. 어머니가 개척한 선교회는 얼마 전 교회로 전환하여 여러 명의 사역자들이 함께 동역하고 있는 작은 선교공동체라고도 했다. 어머니 권사님은 작년에 소천하셨다고 한다. 사역을 맡아서 좀 더 활성화시키라고 권했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혹시 세습이라고 할까 봐요’ 라고 말한다.
“전도사님, 고난을 세습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그런 세습이 아니지요. 부와 권력을 세습하려는 것이 문제일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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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노처녀 신학생과 나눈 대화가 한참이나 오래간다. 오늘 집회가려고 준비를 하는데 자꾸만 이 말이 생각나서 가슴이 그냥 아파온다. 어머니 권사님이 만드셨다는 선교회는 열악한 가운데서도 군선교와 해외선교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 같았다. 지금도 지하실에서 어렵게 살아간다는 그 강해 보이지 않는 노처녀 김전도사의 말 한마디가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어머니가 하시던 가난한 선교회를 계속 맡아 사역하는 것이 혹시 세습이랄까 봐 걱정하는 이 척박하고 야속한 교회의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란 말인가!
가난한 노처녀 전도사의 눈물은 세습의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 아니다. 그녀의 눈물은 가난한 선교회의 현실까지도 세습이라고 매도당할지 모른다는 아픔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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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세습하라고 하신다. 영광과 기득권을 세습하는 것이 아니라 맨바닥의 가난과 고난을 세습하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세습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영광을 세습하라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큰 교회 세습하는 것보다 가난한 선교회 세습하는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교회의 권력과 부를 세습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리도 가난해서 더 내려갈 곳 없는 지하실 선교회를 세습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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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