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드개는 그들을 시켜서 에스더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하였다. "왕후께서는 궁궐에 계시다고 하여, 모든 유다 사람이 겪는 재난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때에, 왕후께서 입을 다물고 계시면, 유다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라도 도움을 얻어서, 마침내는 구원을 받고 살아날 것이지만, 왕후와 왕후의 집안은 멸망할 것입니다. 왕후께서 이처럼 왕후의 자리에 오르신 것이 바로 이런 일 때문인지를 누가 압니까?"
에스더는 다시 그들을 시켜서, 모르드개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하였다.
"어서, 수산에 있는 유다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시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게 하십시오. 사흘 동안은 밤낮 먹지도 마시지도 말게 하십시오. 나와 내 시녀들도 그렇게 금식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는, 법을 어기고서라도, 내가 임금님께 나아가겠습니다. 그러다가 죽으면, 죽으렵니다."
(에스더 4:13-16)
나그네를 섬기는 우리 나섬공동체에는 많은 이란인들이 있다. 적어도 오천명이 넘는 이란인들이 한국에 있다는 소식이다. 나는 지금도 저들을 볼 때면 왜 하나님이 이란을 흩으셨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흩어진 이란인들은 흩어진 유대인들처럼 전 세계로 흩어졌고, 급기야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모슬렘인 저들 중 상당수가 우리 나섬공동체의 식구가 되었다. 복음은 살아있는 능력이다. 복음은 저들을 향해 구원의 감격으로 드러나고 있다. 얼마 전 우리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이란인 헌신예배가 있었다. 모슬렘들이었던 저들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예배다. 어느 누가 저들의 헌신과 예배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은 모슬렘들의 헌신을 받으실까? 내겐 그런 우문이 생겼다. 이란인들 스스로 기도를 하고 말씀을 읽고 찬양을 드렸다. 그 자리에 참석한 나섬교회 성도들은 두 눈과 귀로 그것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분명 이란인들이었다. 전 세계의 악의 축이라고 불려지는 이란인들이었다. 미국과 한판 붙을지도 모를 전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이란인들이었다. 테러와 핵으로 전 세계를 협박하는 바로 그들이 지금 하나님 앞에 헌신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것은 가상이나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며 실재했던 사실이다.
왜 하나님은 이 마지막 때에 저 이란인들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일까? 나는 언제나 그런 물음으로 저들을 바라본다. 그것은 너무도 중요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는 물음이며,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우리 사역의 정체성과 나그네를 바라보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가장 본질적 시선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나님은 저들을 흩으셨고, 저들 중 많은 무리가 우리 나섬공동체 안에 있다. 그들은 지금 이곳에서 말씀을 듣고 헌신을 다짐한다. 왜? 무엇을 위하여 저들은 이곳에 온 것일까? 지금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
에스더서는 내게 그런 물음의 답을 가르쳐 주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향해 마지막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있는 유대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왕후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냐는 믿음과 고백을 한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은 에스더의 마음을 움직이고 결국 유대민족은 구원을 얻었다.
이때를 위함이 아닌가?
하나님은 정말 그 멸망의 자리에 있던 자기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에스더를 왕후로 세우신 것이다. 구원을 위하여 세우신 자리였다. 구원을 위하여 이란인들을 흩으셨고, 우리에게까지 보내신 것이다. 그들은 이란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미리 보내신 요셉 같은 사람들이다. 위기 가운데 있는 이란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리 하신 것이다.
이란인들을 향한 믿음의 고백은 그들을 구원하게 하는 힘이 있다. 저들은 에스더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이란의 부림절을 만들어 낼 사람들이다. 나는 그것을 확신하며 믿고 있다.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이때를 위함이駭? 정말 놀라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