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근로자 선교와 인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28:19-20)
외국인근로자 선교를 시작한지 벌써 13년이 넘었다. 그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나는 지금도 여전히 이 선교의 현장에 있다. 그러나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외국인근로자를 바라보는 시각과 선교적 관점은 큰 변화가 있었다. 적어도 내겐 외국인근로자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심각하고 중대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993년의 외국인근로자들은 무지막지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임금체불과 산업재해는 물론이고 욕설을 포함한 폭행과 강간, 비인간적인 노동현장에서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인권의 문제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당시 외국인근로자의 90% 이상이 임금체불의 경험을 갖고 있었으며, 거의 대부분의 외국인근로자들은 심각한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교회 외국인노동자선교협의회를 발족하고 초대 총무를 맡았던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문제에 접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인권은 곧 생존권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그들을 위한 투쟁과 저항만이 목회자로서의 최소한의 양심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사실이었고, 나는 그 인권의 문제가 내 사역의 전부라고 믿었다. 출입국관리소는 물론이고 노동부와 때론 정부에 강경한 입장을 전달하는 창구로 일하게 된 것이다.
1994년 1월, 급기야 임금체불과 산재에 고통받던 외국인근로자들이 당시 경실련을 점거 농성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고, 당시 한국교회외국인노동자선교협의회의 총무였던 나는 그 농성에 깊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달여 동안의 농성은 그야말로 치열한 싸움이었다. 외국인근로자들의 인권문제에 무관심했던 언론과 정부가 나서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언론에서는 이들의 인권문제를 소상히 보도하기 시작했다. 때론 너무 오버한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 주었다. 정부도 문민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더 이상 외국인근로자들의 인권탄압국가라는 더러운 이미지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는지 상당한 변화를 보여 주었다.
한달 동안의 경실련 점거 농성은 상당한 효과를 얻어내었다. 당시 내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외국인근로자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목회자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카톨릭의 명동성당에 상담소가 있었지만 개신교 목회자인 우리의 집중력과 비교할 때 상당히 뒤떨어져 있었으며, 불교의 경우는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을 하는 그룹에서는 오히려 외국인근로자가 있음으로 한국인 노동자들의 임금상승 효과가 억제되고, 노동운동 전반에 걸림돌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진보적인 시민운동단체도 거의 없었고,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 그들은 외로웠고 절망했다. 그런 상황에 서 있던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외국인근로자들의 인권문제가 목회자로서의 내 사역의 전부였다. 그 이상 어떤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 치열한 인권문제의 제기와 투쟁의 덕분이었을까 외국인근로자들의 문제는 상당히 해소되기 시작했다. 1995년을 기점으로 외국인근로자들에 대한 정부나 우리 사회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변화는 그때까지 냉소적으로만 대하던 진보적인 노동운동가들이 적극적으로 외국인근로자 인권투쟁의 대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전의 70, 80년대 산업선교의 경험을 살려 매우 저돌적이고 전략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권투쟁과 운동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럴 즈음 내겐 중요한 깨달음이 있었다. 외국인근로자 선교를 하다 중도에 심각한 안질환을 얻게 되었고, 급기야 시력이 떨어져 장애를 갖게 된 내게 외국인근로자들을 인권의 문제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선교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게된 것이었다. 기독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의 사랑과 관심으로 조금씩 복음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이전의 인권 운동과 다른 새로운 세계선교의 가능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그대로 노출되어 신음하던 외국인근로자들에게 나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존재였었다. 아무도 그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뀐 것이다. 나보다 더 열심히 적극적으로 인권운동에 앞장서려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생전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전문가랍시고 운동을 지휘했다. 인권투쟁이 목적인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인권운동이나 투쟁이 목적이 아닌 그저 하나님 앞에 작게나마 부름 받은 목회자였다. 내게 인권은 선교의 도구이며 수단일 뿐 본질적으로 나는 신본주의자였다. 나는 인본주의자가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사고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선교가 인권의 문제에 개입하거나 혹은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관계를 가질 수는 있으나, 선교가 곧 인권문제는 아니다. 인권은 선교의 도구이며 선교를 위한 전략적인 수단일 뿐 그것이 목적은 아니다. 내게 선교는 인권을 포괄하는 더 넓은 의미의 사명이었다. 외국인근로자들의 인권문제가 생존의 문제로 부각되었을 때, 그리고 아무도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때, 나는 운동과 투쟁의 선봉에 있어야 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이 된 것이다.
나는 다시 선교의 현장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것은 옳았고 분명했다. 내가 만약 여전히 인권 운동의 현장에 머물러 있었다면 나는 목회자가 아닌 시민운동가로 성공했었을런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하나님 앞에 부르심 받은 목회자로서의 삶은 아니었을 것이다. 목회자가 인권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선교와 인권을 나누어 생각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적어도 외국인근로자를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너무도 확연한 차이가 있기에 외국인근로자선교와 인권의 문제는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은 것이다.
선교와 인권이라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사항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느 쪽에 우선권을 두느냐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인권이 선교적 의미를 갖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선교의 전부는 아니다. 선교는 나그네들을 복음 앞에 서게 하는 것이다. 그들을 데리고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 나그네를 순례자로 고백하게 하는 것이 선교다. 그러나 인권투쟁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기엔 너무 인간적이며 멀리 있어 보인다.
나는 외국인근로자들을 선교의 관점에서 다시 보기로 했다. 비겁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있겠지만 나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마지막 땅끝 선교의 기회라고 믿는다. 그들은 세계선교의 모판이며 지렛대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목회자들은 적어도 선교와 목회의 현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인권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무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그리고 이전보다 더 강력하게 투쟁하고 싸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목적은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선교다. 선교하라고 세운 목회자이지 싸우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와 싸우는 모세가 아니다. 우리에겐 투쟁보다 사랑이 필요하며 저주보다 관용이 필요하다. 선교는 절대적인 의무이며 목적일 뿐 아니라 전부일 수 있다. 그러나 인권투쟁은 상황 속에서 제한적으로 선택할 문제일 뿐이다.
외국인근로자 선교의 현장으로 돌아와 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인권과 선교가 나눌 수 없는 보편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믿지만 그러나 내겐 인권보다 선교가 더 중요하다. 내가 부르심 받은 이유가 선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