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시대의 바람직한 교사상-재한몽골학교 이사장 유해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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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7-21 18:14 조회9,12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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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다문화의 현실과 흐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다문화 사회라고 부른다. 2000년대를 맞이하면서 우리사회는 급속도로 다문화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현재 120만 명이 넘는 이주자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으므로 전체 인구의 약 2.4%를 외국인이 차지하는 실제적인 다문화 사회가 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사회가 다문화 사회로 변모하게 되면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다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이 미래 사회를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주자들은 이미 우리의 이웃이며 자녀이다. 다문화 사회에서 파생할 많은 문제와 갈등은 이미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특별히 교육현장에서의 다문화 가정의 자녀 문제는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다. 이 문제는 곧 큰 대세가 되어 우리 모두의 고민거리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문화를 모르고 우리 아이들이 미래 글로벌시대에 리더가 될 수 있을까? 다문화에 대한 교육은 거듭 강조한다고 해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미래 사회를 살아가야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필수적인 교육이다.
다문화는 대세다. 다문화를 알아야 미래가 보인다. 특별히 전세계를 무대로 살아야 하는 우리 자녀들에게는 더욱이나 중요한 문제이다. 다문화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트랜드인 것이다. 이미 미국의 대통령이 다문화 가정의 배경을 갖고 있으며, 우리 주변에서도 그런 일들은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다문화는 미래 사회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트랜드인 것이다.
나.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1. 우리는 단일민족국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배우기 시작한 교육은 '우리는 단일민족국가'라는 것이었다. 혈통이 하나라는 말인지, 아니면 문화가 하나라는 말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그 단일민족국가라는 말에서부터 우리는 일종의 문화적 동질성과 자긍심을 갖고 살았다. 그래서인지 과거 해방이후 한국전쟁을 겪어가면서 우리 사회에 혼혈이라는 말은 무척이나 배타적이며 단일민족국가의 자존감을 잃어버리게 하는 무슨 주홍글자의 의미처럼 되어버리기도 했었다.
그래서 혼혈은 안된다는 유교적인 문화는 우리의 유전자속에 잠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긴 이미 이 사역을 십수년을 해온 내게도 그런 이중적인 잣대가 숨어 있음을 숨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 우리 아들이 외국여성을 데리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을 순순히 수용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아직 나 자신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단일민족이라는 문화적 자긍심은 다문화 사회를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는 큰 딜레마이다. 단일민족국가라는 말은 결국 다문화 사회를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큰 장애임에 틀림없다.
이제 더 이상 단일민족국가라는 말이 자랑거리이거나 우리 문화나 사회의 자긍심으로 표출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단일민족국가가 아닌 다문화 사회, 다민족국가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단일민족국가가 아니다. 우리는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과거의 기억은 지워야 한다. 새로운 미래는 다민족국가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특별히 최근의 다문화 이주자들에대한 우월감과 영미권의 외국인에 대한 열등감은 동시에 극복되어져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이중적인 잣대로 다문화와 이주자들을 바라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단일민족국가라는 자부심은 과거의 것이다. 그것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통용되고 있다면 그것은 불행의 씨앗이 될 것이다.
2. 이주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현실
우리는 얼마나 이중적인가? 혼혈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조롱하던 시대를 살아오면서부터 우리는 이중적인 사회적 모순을 갖고 있다.
백인과 영어권, 선진국에 대한 열등감과 그들과 한국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이중문화 가정의 자녀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기억하고 있다 기지촌을 마치 도피성 같은 범죄자의 소굴처럼 바라보던 우리 사회의 시각을 기억하여야 한다.
열등감과 편견이 지배하는 문화는 결코 선진국으로 갈 수 없다.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그러한 지난 과거의 시간들 위에 새로운 다문화 사회가 오버랩 되어 버렸다.
몇 년 전 미국의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났던 조승희 사건을 기억하는가? 전형적인 다문화 가정에서 자란 이주자였던 그 사람의 저주스러운 마지막 분노의 표출은 과연 미국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아니다. 이제 그런 일들은 우리사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유사한 상황이 야기되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편견과 차별은 또 다른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다. 이미 그런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던진 분노와 냉대와 저주의 부메랑이 우리의 미래를 소름끼치게 하는 괴물이 되어 다가오고 있다.
나는 수도 없이 이방인에 대하여 편견과 차별의 감정을 갖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경험해왔다.
그것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인종차별의 극치였다. 나그네에 대한 차별을 그렇게 서럽게 경험하며 소외의 한숨을 쉬었던 우리가, 이제는 시어머니가 되어 며느리를 시집살이 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야, 몽골 거지새끼들 너희 나라에 돌아가!"
우리 몽골학교 아이들이 인근 중학교 아이들과 싸움을 하게 된 발단이다. 거지새끼라는 말속에 아이들은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운 몽골 아이들이라도 그 말을 듣고 참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패싸움 끝에 찾아온 중학교 선생님과 학부모의 폭력적 언어에 나는 불쾌감을 넘어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물음도 묻게 되었다. 저 사람이 선생님이고 부모인가에 대한 회의도 생겼다. 이기적인 폭력적 언어 앞에 나는 할 말을 잊었다.
하마터면 큰소리가 날 뻔했다. 조금만 참지 않았다면 그들은 내게서 험한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염치없는 말을 하고 있으며, 얼마나 우리 한국아이들을 잘못된 인격과 마음으로 교육시켰는지에 대하여 반성하지 못했다. 아니 이것은 우리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의 경직되고 이기적이며 천박한 인격과 마음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투영된 것이라는 판단이 생겼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도 못하고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싶은 대로 행동하고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의 저 단세포적인 삶은 누가 만들어 준 것인가? 바로 우리다. 어른들이다. 교사와 학부모가 그렇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그것을 받아먹고 자라고 있는 것이다. 왜곡되고 비뚤어진 인격과 마음을 가진 우리 자녀들이 미래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라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못한 우리 어른들의 책임이다. 다문화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천박하고 이기적인 편리주의를 가르쳐 준 우리 어른들의 잘못이다.
3. 다문화 이주자 그들은 누구인가?
우리 공동체에 이란 사람 호잣트씨는 약 18년 전에 한국에 왔다. 그는 외국인 근로자의 신분으로 한국생활을 시작하였다. 성수동의 어느 인쇄공장에서 일을 했다. 불법체류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고단한 외국인근로자의 삶을 살았다. 그러던 호잣트는 우리 공동체를 알게 되었고, 어느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무슬림에서 기독교인이 된 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세상 앞에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더 이상 이란으로 돌아갈 수 엇게 된 호잣트는 법무부에 난민지위를 달라고 난민신청을 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2004년 12월, 호잣트씨에게 난민지위가 주어졌다. 그의 신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 후 그는 우리 공동체의 한 여성과 결혼을 했다. 물론 한국 여성이다. 그래서 두 아이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는 또 하나의 신분 즉, 결혼 이민자가 된 것이다.
미래를 준비하던 호잣트씨는 이제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그는 유학생의 신분이 된 것이다. 외국인근로자, 난민, 결혼이민자, 유학생까지 그의 신분은 계속 바뀌고 있는 것이다. 지금 그는 귀화신청을 한 상태이므로 올 연말에 한국 주민등록증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한국 사람으로 살아가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문화 이주자이다.
다. 바람직한 다문화 교육
1. 선생님이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강사님, 오늘 강의 짧게 해주세요.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청에서 다문화 연수를 받으라니까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거예요. 선생님들이 바빠요. 그러니 가능한 짧게 해주세요."
안산시 어느 초등학교에 교사들을 대상으로 다문화 연수 강사로 갔다가 그 학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이다. 강의가 시작하기도 전에 어처구니없는 부탁에 그만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저런 분이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하실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무척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아이들의 교육 현실이 이렇게 되었구나!'라는 자괴감이 나를 송두리째 분노하게 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 짧게 강의를 하고는 학교를 나왔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교육의 현실인가?
나는 다문화를 주제로 여기저기서 많은 강의를 한다. 특별히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가서 선생님들이나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를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우리 선생님들이 너무나 수동적인 자세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다. 어느 학교에 가서 강의를 하다보면 정말 황당하기도 하다. 시험점수 채점하는 선생님, 핸드폰 가지고 문자보내기에 바쁜 선생님, 눈을 감고 아예 주무시는 선생님...
정말 믿기지 않는 우리 선생님들의 모습이다.
교사가 변해야 학생이 바뀐다. 이것은 진리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과 행동을 통해 배운다. 선생님들의 그런 모습으로는 아이들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소외되고 가난하며 어려운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선생님들의 관심과 눈빛을 아이들은 배운다.
하기 싫은 다문화 교육이라며 짧게 해달라는 퉁명스러운 교장선생님이 계시는 한 우리 학교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다문화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귀찮아하는 선생님들의 그 수동적인 태도로는 우리 아이들이 살아야 할 미래의 다문화는 없다.
폐쇄적이며 닫힌 아이들을 만드는 것은 오늘 선생님들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고민하며 미래를 준비하고 약한 자들에 대하여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선생님이 그립다.
학생들에게 다문화를 가르치기 전에 선생님과 학부모가 먼저 변해야 한다. 먼저 우리 어른들이 다문화에 대한 이해와 적극적인 수용의 태도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다문화 교육일 것이다.
2. 우리 아이들은 다문화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다문화 체험학습장을 활용하자. 몇 년 전 경기도 양평군에 '다문화생태체험마을'이 생겨 인기다.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서 체험마을을 방문하고 있으니 아직은 부족하지만 우리 의식이 많이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처음에는 다문화 체험학습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문화 체험을 통해 아이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며 체험학습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피부와 언어와 종교와 문화의 경계선이 무너지면서 우리 아이들은 새로운 다문화 사회에 적응하고 있다. 다문화 교육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두 번째는 재한몽골학교 견학을 권하고 싶다. 몽골아이들과 함께 하는 다문화 캠프도 좋다. 이것은 정말 새로운 친구들을 만들어 주는 소중한 캠프다. 그동안 몽골학교는 몇몇 단체와 학교에서 그런 만남의 캠프를 함께 했다. 나는 직접 그들에게 강의를 하고 우리 한국아이들은 몽골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다. 함께 몽골 음식도 만들어 나누어 먹어 보기도 하였다. 미래 지도자들의 소중한 만남이었다.
3. 솔롱거스와 무지개가 뜨는 마을
몽골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솔롱거스', 즉 '무지개의 나라'라 부른다. 몽골어로 무지개를 '솔롱거'라 하는데, 한국을 '솔롱거스'라 한다. 이 말은 무지개가 뜨는 나라라는 말이다. 즉 몽골 사람들에게 한국은 무지개 같은 나라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무지개 같은 나라인가?
다양성이 인정되고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은 공동체가 무지개 공동체이다. 다양성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가치이다. 다양성이 인정되고 배려되는 세상이 진정 미래의 아름다운 무지개 공동체인 것이다.
우리 학교가 솔롱고스 학교, 우리가 사는 지역이 무지개 뜨는 마을, 우리나라가 진정한 무지개의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무지개 뜨는 세상, 무지개 뜨는 학교를 만드는 것은 바로 여러분 선생님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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