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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섬사람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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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해야하나? [김종철장로]

'오두막'을 읽으면서 내가 겪었던 일과 대비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다.
먼저보낸 사랑하는 딸 '성연'이에 대해 썼던 글도 올리라는 마음을 주셔서
여기에 다시 올린다. 곧 성연이의 소천일이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9장 1절 ~ 3절) 




   1998년 2월 17일. 나는 케냐의 나이로비한인교회 본당에 엎드려 있다. 

   여기 온 게 새벽 1시쯤. 같이 왔던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고 마지막까지 
뒷자리에 앉아계시던 목사님이 모기향과 새 촛불을 가져다 놓고 나간 것도 
벌써 시간여 전이다. 어둠 가운데 절박한 마음으로 엎드려 있으면서도 이런 것을 
모두 알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나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팔이나 고개, 아니, 몸의 어떤 부분이라도 움직이면 나를 
지탱해 온 모든 것이 사라지고 허물어 질 것만 같아서다. 일어난 일이니 인정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말해보지만 도저히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성연이가 - 내 딸이!!!! - 내 귀엽고 사랑스런 아이가 죽다니~ 


   이 긴 밤이 시작되던 어제 저녁 8시경.  교통사고가 있었고 딸이 다쳤는데 부상의 
정도는 알 수 없다는 전갈이 여행사를 하는 이집사에게서 왔다. 상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다방면으로 수소문을 했으나 사고지점이 ‘나만가’라는 오지(奧地)이고 케냐의 
통신망은 1960년대의 우리나라 수준이어서 답답한 가운데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9시 반. - 성연이 친구로부터 차에 함께 탔던 다른 이들은 거의 부상을 입지 않았고 
성연이만 다쳐 나이로비병원으로 후송중이라는 전화가 왔다. 다른 이들은 다치지 
않고 성연이만 다쳤다면 그리 큰 부상은 아닐 것이라고 좋게 생각하면서도 
나이로비병원으로 가는 내내 엄습해 오는 불안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병원에 도착해 어수선한 응급실을 보니 더 불안해졌고 곧 도착할 거라던 
앰뷸런스는 1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아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려 주셔야 합니다.’ ‘꼭 살아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건 들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향한 애원, 간청, 간구가 절규가 되어 
가슴을 맴돌다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소리가 되어 목구멍을 넘어 나오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제 뜻대로 마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면 최악의 상황도 받아드리겠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이해할 수도 있으니 그런 기도는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 
애써 그 생각을 외면했다.  


   11시쯤 목사님이 오셨다. 소식을 전해준 이 집사 내외, 송 집사 부부, 식당을 하는 
이 집사, 그 외에도 몇 사람은 이미 도착해서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드디어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11시 20분 - 


   응급실에서 앰뷸런스까지 걸어가는 짧은 몇 초 사이에 수많은 생각이 명멸했다.  
‘살았나, 죽었나? 부상이면 어느 정도일까? 평생 불구가 되는 건 아닌가?’ 
의식을 잃고식물인간이 된 아이 곁에서 안타까이 아이 이름을 부르며 애통해하는 
아내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기억상실로 아무도 못 알아보는 건 아닐까?’  ‘얼굴이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 
갈 수 없게끔 훼손되었으면 어쩌나?  아니야,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지.  그래 ~ 한쪽 
팔에 단순골절 입은 정도일거야. 1, 2개월 지나면 교통사고가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걸.’  그러나 어느 틈엔가 길한 쪽보다는 불길한 쪽으로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앰뷸런스 문에 다가섰을 때 허 집사가 ‘장로님, 보지마세요.’ 하며 내 앞을 가로 
막는다. 허 집사를 밀치고 차안으로 들어갔다. 자는 것 같이 평온한 얼굴로 아이가 
누워있었다. 아이의 턱밑까지 끌어올려져 몸을 감싸고 있는 담요가 너무 낡고 초라해 보였다. 


          ‘어 ~ , 쟤가 왜 저런 걸 덮고 있지?  그리고 이마의 저 멍은 언제 생겼을까?’ 
하고 있는데 이 집사와 송 집사가 양쪽에서 팔짱을 끼어 나를 차에서 끌어내렸다. 
‘왜 이렇게 아프게 잡을까? 내리자고 말로해도 순순히 내릴 건데.’ 혼잣말로 
중얼거렸는지 속으로만 생각한건지 분명치 않지만 나는 그들에게 끌어내려지는 
모양새로 차에서 내려졌다.  


   병원마당의 한 쪽에 서있는 내 주위로 사람들이 마치 꿈속에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앰뷸런스가 앞에 서더니 성연이가 누워있는 환자운반용 침대를 내려놓는다.
‘장례식장의 보관소에 임시 안치하기로 했습니다.’ 누군가가 얘기해 주었다. 침대가 
안으로 들여지고 철문이 닫혔다. 갑자기 몸이 떨리며 그 떨림이 목을 타고 소리가 
되어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놀라 몸 깊은 곳에서 다시 치솟는 울음을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교회에 가서 있고 싶습니다. 목사님, 데려다주세요.’ 그렇게 해서 난 지금 
나이로비 한인교회의 본당에 엎드려있다.       


   울음은 나오지 않지만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진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처해야 한다고 필사적으로 정신을 모은다. 
죽은 건 확실하다. 의사가 심장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 사고 후 반시간도 안 되어 
명을 달리했을 거라고 말했을 때 ‘고통은 없었을까요?’ 라고 묻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아니, 죽지 않았어. 그럴 리가 없어!’  ‘하나님, 아니죠? 성연엄마를 애처로이 
여기셔서라도 정말로 애를 데려간 건 아니시죠?’ 생각이 조각나며 파편처럼 
흩어져서 집중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장례식은 어떻게 치러야 하지? 얘는 여기서 산 것이 서울에서보다 더 
오랜데~  7살 때 와서 올해 19살이니까 여기가 고향이나 마찬가지야. 여기 묻히길 
원 할 거야.’ ‘혹시 화장을 하게 되면 어차피 태울 거니까 관은 비싸지 않은 걸 써서 
모범을 보여야겠군.’ 다시 엉뚱한 길로 달아나는 사념을 붙든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경우가 성경에 많으니까 주(主)님께 구해야 해.’  
‘주(主)여!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처럼 제 딸도 살려주세요.’  ‘아니야, 나사로를 
살린 것처럼 살려 달라는 게 더 확실하지.’ ‘주(主)여! 나사로를 살리신 것처럼 
제 딸도 살려주시길 바랍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셨으니
믿어야 해.’  ‘주(主)님, 제가 당신을 믿습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없으나
주(主)님은 죽은 이를 다시 살리는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크신 능력으로
우리 성연일 다시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  ‘믿-ㅅ습니다. 주(主)여!!! 믿습니다.~’ 


          ‘엘리사는 선지자고 베드로는 사도지만 나와 같은 사람인데 기도로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렸고, 다비다를 살렸으니까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된다고 하셨으니, 모든 게 나한테 
달렸어.’ ‘간구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내가 믿으면 -  성연이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성연인 살아날 수 있어.’  ‘암, 그렇고 말고~’ 
그러나, 머리와 입으로는 살아난다고 하면서도 정작 장례식장으로 달려가 부활을 
확인하려하지 않는 나를, 내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회의가 서늘하게 비웃는다. 


          ‘그래도 이대로 물러설 순 없어.’ 어느 틈에 성연이에 대한 부활의 소망은 나의 
공허한 ‘믿습니다.’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이제 딸을 다시 살려달라고는 
안하겠습니다.’ ‘대신 일어난 일에 대해 해명을 해 주십시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생겼고 도대체 어찌된 겁니까?’ ‘저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요?’  ‘좋습니다. 나도 
야곱만큼 당신을 붙들고 늘어지겠습니다.’ 나는, 나의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명에 의해 사랑하는 아들인 이삭을 번제 제물로 드려야했던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삭을 태어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당신이 
거두어 가시겠다면 할말이 없습니다. 기꺼이 명에 따르겠습니다. 하면서 아무 
망설임 없이 흔쾌히 받아들였을까?’ ‘하긴 욥의 경우도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욥은 어떻게 그렇게 말 할 수 있었을까?’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라니~’ 소름끼칠 정도로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정확히 생각난다. 


          ‘물론 사람이 한 번은 죽지요. 그러나 보통은 나이가 들어서 죽고 부모가 
자식보다 앞서가는 것이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딸의 죽음을 욥이나 
아브라함이 받아드린 것처럼은 받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욥도 사람이니 인간적 갈등과 번뇌가 있었고 부모로서의 아픔, 
슬픔이 있었겠죠? 당신에게는  피조물의 감정은 아무런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당신도 그런 아픔을 겪으셨다고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 달리게           
할 때의 그때, 그 심정을 아느냐고 물으시는 겁니까, 지금?’  불현듯 성연이를 
귀여워하시던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그래 성연이도 외할머니는 
알아보겠지. 음~, 고집사 동생도 만나겠다. 우리 성연이~ - 외롭진 않겠다.’ 다시 
가지를 치기 시작하는 상념을 잘라버린다. 

          ‘참~!, 아브라함과 욥은 시험을 당한거지.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고자 하신 
일이니 내 경우와는 다른 거야.’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는 말씀에 
따라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주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시는 것이라고 여길 수는 없다. 
‘혹시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 믿음이 이런 일을 이겨낼 만한 분량이 되었다고 
생각하셨나?’ ‘하나님! 그렇다면 큰 오햅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그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사람이며 이런 일을 감당할 만한 믿음은커녕 아직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자(者)입니다. 제 처(妻)는 더욱 여리고요. 우리부부는 이 일로 당장 쓰러질 것입니다.’
갑자기 울음이 터지며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사고 후 혼자서 죽어갈 때의 
성연이가 느꼈을 무서움과 외로움이 내게 슬픔을 더하며 꺼이꺼이 통곡하게 한다. 


      ‘다윗이 자식을 여럿 앞세웠는데 그가 어떻게 했더라.’ ‘큰아들 암논이 
이복누이를 범(犯)한 죄 때문에 이복동생인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다윗이 
자기 옷을 찢고 땅에 엎드렸다고 했지, 아마.’ ‘자식 잃은 슬픔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랬겠지. 공의(公義)의 하나님이시니까’  
‘공의의 하나님~그렇다면 성연이가 죽은 것도 하나님의 공의란 말인가?’   
‘압살롬은 이복형 암논을  죽이고 아버지 다윗을 배반하였다가 주살되었지.’ 
죄(罪)와 벌(罰). 그렇다. 죄에 대한 응징이겠다. 하나님은 당신의 명령과 율법을 
어긴 죄를 물어 당신의 선민이자 사랑하는 백성인 이스라엘민족을 광야에서 
다 죽게도 하신 분이다. 선(善)과 악(惡)의 제재를 공평히 하는 하나님의 품성이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일컫게 한다고 알고 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이 아파온다. ‘성연이가 당신 앞에 그리 큰 죄를, - 
죽을 만큼 큰 죄를 저질렀나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당신도 알고 저도 아는 것 
아닙니까?’ ‘물론, 조그만 과실(過失)이야 있었겠죠. 죄가 없다는 건 아닙니다. 
그것을 추궁하신 겁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니면 율법의 잣대를 그 애에게만 원칙대로 적용하신 겁니까? 그건 공의라고 
부를 수 없죠, 하나님!’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 봐도 하나님이 성연이의 죄에 대해 값을 치르게 하신 
것이라고 여길 수는 없다. ‘그러면 제가 저지른 죄 때문입니까?’ 무거운 돌멩이가 
가슴을 짓누르듯 답답해온다. 다윗의 소위(所爲)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여, 
여호와께서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치시자 아이가 앓다가 이레 만에 
죽은 얘기가 생각난다.  


     ‘~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라고 나단이 말하지 
않았는가?’ ‘아비 다윗의 죄로 인하여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무고한 어린자식이 
죽은 거야.’ ‘그래, 내 죄 때문에 성연이가 대신 벌을 받은 거야. 내 죄 때문에~!!!’ 
비수로 가슴을 마구 찌르는 듯한 아픔과 함께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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