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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반역의 삶,그리고 고독한 유목민


오늘도 나는 혼자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내 작은 공동체와 구석진 내 방은 여전히 냄새로 찌들어 있다. 홀아비 냄새일까 아니면 내 인생까지 푹 삭혀버린 홍어 같은 냄새인가? 나도 모르겠다. 그것이 내 냄새이고 내 삶의 잘 삭혀진 그 냄새인지 그저 오늘도 나는 그 냄새와 함께 내 방문을 열고 닫는다. 아무도 오지 않을 그 방문을 그래도 조금은 열어놓고 혹시 누군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그 소박한 기대감으로 언제나 내 귀는 그쪽을 향한다. 누가 찾아와도 누가 왔는지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이곳에 산지가 꽤나 되었어도 나는 사람이 그립다.

언젠가 몽골 고비의 유목민 가정을 방문해서 느낀 것이 있었다. 그 유목민의 경계심과 반가움 그리고 기다림에 지친 한 인간의 혼합된 표정이다. 놀라움의 눈동자와 표정, 그리고 동시에 작게 웃고 있는 그 반가움이 그것이다. 두렵고 반갑고 이것이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유목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외롭고 지쳐서 사람 냄새가 그립고 홀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럽고 무서운 것인지를 느꼈을 그 유목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니 앞으로 더욱 그런 고독의 삶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세상과 더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 삶의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한다. 어울리고 춤추고 노래 부르던 세상에서 멀리 보이는 것이 '사람일지도 몰라' 하면서 홀로 그리움에 젖은 입술로 그렇게  뇌까리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가고 싶지 않아도 나는 입버릇처럼 떠난다고 했으니 이제는 그 말을 책임져야 하기에 고독하게 살아야 할 것 같다. 언젠가 읽었던 소설가 박범신의 귀향 이야기가 생각난다. 홀로 떨어져 고향 근처 작은 호숫가에 집을 짓고 살아가던 그 노작가의 이야기이다. 절필을 선언하고 떠난 후 방황하고 다시 돌아오면서 때론 히말라야를 오르던 그 작가의 인생살이처럼 나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유목민처럼 살기원한다면 고독은 당연하다.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삶을 살기원한다면 외로움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 자유와 고독은 함께 사는 친구 사이니 말이다. 자유하고 싶으면서도 외롭기를 주저한다면 그것은 모순이다. 유목민은 자유하지만 그만큼의 고독은 함께 살아야 할 그 무엇이다. 

내가 1990년 군목을 전역하고 선택한 것은 자유였다. 당시에 나는 유목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노마드니 나그네니 하는 말은 나중에 내가 외국인 근로자들을 만나면서 도입한 신학적 언어일 뿐이다. 당시 내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자유였다. 자유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했다. 지극히 낭만적이고 단순한 선택이었다. 누군들 자유를 그리워하지 않으랴마는 내게는 왜 그렇게 그 자유라는 말이 크게 느껴졌을까? 어쩌면 반역의 삶을 꿈꿔왔기 때문에 주어진 강박관념이었을 수도 있다.
그랬을 것이다. 반역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오랜만에 사용하는 단어 '반역'이다. 내겐 의심하고 거부하고 싶은 반역의 욕망이 있었다. 그것은 분명 욕망의 일종이었으리라. 반역을 말하지 않는 자는 자유를 말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반역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온전한 신앙을 소유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젖어 살았던 시절이었다.

얼마 전 나는 리차드 도킨슨의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읽어 보았다. 영국의 생물학자이며 20세기 가장 유명한 무신론자인 저자의 대표적인 책이다. 그가 책의 서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자신의 이 책을 읽으면 분명히 위대한 무신론자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썼으니 대단한 논리와 이야기꺼리가 있는 책이다. 순간순간 내가 믿고 있는 진리와 가치에 대하여 난도질을 하듯이 질근질근 씹어버리는 저자의 거침없는 주장에 할 말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신은 만들어졌을 뿐 우리가 그 악몽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저자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반역의 삶을 넘어 부정의 삶을 선택하라고 강요하기도 한다.
인류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종교라고 말하면서 그는 종교가 사라지면 위대하고 당당한 무신론자로서 살아갈 수도 있다고 유혹한다. 내겐 분명 유혹처럼 느껴졌으니 놀라운 변화다. 예전의 나 같았으면 적어도 1990년 군목을 전역하고 처음 군에서 나왔을 때의 자유와 반역을 살아가고 싶었던 거의 불가지론자에 가까웠을 내게 지금은 유혹이라니. 유혹이라는 말은 지금의 나를 부인하지 않겠다는 신념과 의지를 내포한다는 말이다. 전 같았으면 분명 이럴 수도 있겠지 하면서 한발 더 그 앞으로 다가섰을 내가 지금은 왜 이렇게 늙어버린 종교인이 된 것일까. 

나는 태생적으로 무신론자가 될 수 없는 존재였으리라. 겨우 반역의 선택정도가 있을 수 있었을 유신론과 무신론의 경계를 넘나들며 관념과 추상의 지적 놀음이 전부였을 한없이 가벼운 사람이다. 그러니 리차드 도킨슨의 그 책을 읽으며 동의하고 싶었을 마음도 억누르며 지금 내가 신앙하는 종교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말은 매우 옳았다. 나는 도킨슨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할 어떤 논리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무신론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그들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말할만한 지적 자산을 갖고 있지 못하다. 신앙은 과학이나 학문의 범위를 넘은 초월적인 것이라고만 할 수 있을 뿐 나는 설득이나 논리로서의 학문을 배워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유목민으로 살아가면서 반역했던 지난 시절과 자유를 가장 소중한 가치라며 내 삶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리고 포기해야만 했던 그 때를 기억하고 있다. 차라리 그때에 반역을 넘어 무신론자가 되어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유와 반역 그리고 고독은 세쌍둥이처럼 연관되어 있다. 나는 자유를 위하여 현실을 반역했고 여지껏 고독을 친구로 삼고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 남은 미래도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야 하리라. 그러나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삶을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다. 또다시 살아야 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나는 이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나섬의 사역자로 자유와 반역의 삶을 벗 삼아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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