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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 학교라도좋아요


컨테이너 학교라도좋아요
- 재한몽골학교의 선교적 의미와 비젼


1998년 1월부터 우리 나섬공동체는 무료급식을 하기 시작했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많은 노숙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던 시기이다. 처음에는 외국인근로자들을 위한 무료급식을 하기로했으나 점점 많아지는 한국인 노숙자들과 노인들에게까지 무료급식의 대상이 확대되었다. 그 당시 우리 공동체는 강변역 테크노마트 건너편의 어느 작은 지하실에서 사역을 하던 중이었다. 우리도 먹고 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나눔이란 넉넉할 때에 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할 때에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무조건 무료급식을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어디에서 왔는지 엄청난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모여들었다. 우리 교회는 예배당과 식당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었다. 예배당은 예배 후엔 곧바로 식당이 된다. 얼마나 어수선한 분위기였는지! 
늘 반찬냄새가 가시지 않는 예배당이었다. 교회에 오면 그 자리가 곧 예배의 자리이며 동시에 밥먹는 자리인 셈이다. 좁고 냄새나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 작은 지하 예배당에 가득했다. 그러던 중 언제부터인지 아이들이 찾아와 점심을 먹는 것이 아닌가? 노숙자들과 외국인근로자 그리고 노인들만 모여서 밥을 먹는 시간에 웬 아이들인가? 처음에는 한두명에 불과하던 아이들이 어느새 대여섯명으로 늘어났다. 아이들은 매일같이 밥을 먹으러 교회에 왔다. 우리 아이들과 똑같이 생겼으니 처음에는 한국아이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배가고파 찾아온 아이들이려니 하면서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이 지하 작은 예배당 식당에서 뛰고 장난을 친다. 무심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너는 이름이 뭐냐?" 
"... ..."
"너는 왜 말을 못하니?"
"우리는 몽골에서 왔어요."
"몽골? 그런데 왜 학교에 갈 시간에 교회에 왔니?"
"우리는 학교에 갈 수 없어요."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한국에 일하러 온 몽골인 근로자들의 자녀들이었다. 아이들은 갈 곳이 없어 교회에 온 것이다. 부모가 일하러 간 사이에 밥을 먹기 위하여 우리 공동체에 찾아온 것이다. 
나는 곧바로 몽골 아이들을 위하여 작은 교실을 하나 만들었다. 그리고 그 교실 문에 '재한몽골인 자녀학교'라는 팻말을 붙였다. 그것이 재한몽골학교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여덟명의 아이들로 시작했다. 당시 봉사자로 찾아온 지은정이라는 자매에게 부탁해서 한국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조금씩 아이들이 늘어났다. 그러던 중 홀트아동복지회의 회장으로 계시던 송재천 목사님에게 부탁을 해서 자원봉사자들과 필요한 재정을 일부 지원받게 되었다.
아이들은 무척이나 좋아했고 그 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얼마되지않아 우리 지하 예배당에서 공부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오게 되었다. 한 30명쯤 되었을까? 
그 전부터 알고 지내던 집사님 한분이 우리 학교 아이들을 위하여 자신의 지하실을 내놓겠다고, 거기서 학교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을 해왔다. 얼마나 감사하던지! 
우리는 곧바로 그 곳의 내부를 교실로 쓸 수 있도록 공사를 한 후 학교를 옮겼다. 재한몽골학교만의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비록 30평정도의 작은 공간이었지만 우리 아이들만을 위한 학교 공간이 생긴 것이다.

어느 날, 그 당시 울란바타르 시장이 한국 방문 중 몽골학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을 했다. 엥흐볼트 시장이다. 지금은 몽골의 총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앞으로 몽골을 이끌어갈 대표적인 정치인이기도하다. 그런 엥흐볼트 울란바타르 시장이 우리 학교에 온 것이다. 마침 지하실에 몽골학교를 이전하고 처음 맞는 손님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 우리 몽골학교가 있는 지하실로 가게 되었다. 그때에 일어난 일이다.
지하실로 인도하는 나에게 시장은 매우 놀라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여기가 학교입니까?"
"예, 여기가 몽골학교입니다."

나는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랐다. 나중에 몽골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통해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지하실이라는 개념이 없는 몽골이다. 땅이 넓은 그들에게 지하실은 상상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굳이 지하실을 파야할 이유가 없는 그들이다. 그런 몽골인 지도자를 데리고 지하실로 들어갔으니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지하실에 학교가있다는 사실을 생각이나 했을까? 멈칫거리며 나에게 묻는 엥흐볼트 시장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지하실로 내려간 우리 일행은 어디선가 소리는 나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는 짧은 시간을 마주했다. 지하실을 학교로 만들자니 작은 공간을 칸막이(자바라)를 이용해 여러 개의 교실로 나누어 놓은 것이다. 아이들은 그 작은 교실 안에 있었던 것이다. 사람만 보이지 않을 뿐 소리는 함께 어우러져 소란스러움은 그대로이다. 선생님들의 강의소리, 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
맨 앞의 자바라를 열어젖히니 아이들이 가득하다. 똘망똘망한 아이들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아니 눈물이 날 정도로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애처로움이 느껴진다. 이렇게 해서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픔으로 다가온다. 그냥 말없이 서있는 엥흐볼트 시장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아무말도 못하고 그저 놀라워하는 그의 모습은 놀라움과 함께 그냥 감동이었을까? 그 후로 나와 엥흐볼트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언제고 내가 몽골에 가면 그는 만나주었고, 그가 서울에 온다면 또한 환영하며 만남을 지속했던 것이다. 작은 몽골학교가 우리의 사이를 친구로 만들어 준 것이다. 그는 무척이나 나에게 호의적이다. 그가 몽골의 총리가 되었을 때, 우리 몽골 문화원 일행을 영빈관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2007년 5월에 몽골의 엥흐바이야르 대통령 영부인 어철멍 여사가 우리 학교에 다녀갔다. 몽골 대통령의 공식 방한 일정 가운데 하나였다. 어철멍 여사는 불교에 매우 심취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있었던 터라 주변의 사람들이 무척 걱정하는 눈치였다.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우리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옳다는 생각으로 주저하지 않았다. 영부인의 방문 일정에 맞추어 경호와 점검 사항이 얼마나 복잡하던지... 청와대 경호실은 물론이고 지역 경찰서와 각 부처에서 방문하여 며칠전부터 난리다. 언론에서도 다양한 몽골관련 기사가 나기도 했고, 몽골학교에 대한 기사가 언급되기도 했다. 하긴 우리나라에 있는 유일한 이주 노동자 자녀학교이며, 동시에 몽골의 유일한 국제학교라는 특성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센 바이노!"

어철멍 여사가 우리 학교에 왔을 때에 나와 나눈 유일한 대화다. 하긴 나는 그 말 외에 몽골말을 못하니 당연한 것일게고, 문제는 영부인의 눈빛이나 표정이 그저 녹녹하지 않다는 것이다. 무척이나 굳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악수만 했다. 교회에 오는 것이 싫은 눈치였다. 주변의 사람들이 우려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일정상 잡혀 있으니 온 것일 뿐이다. 교회가 싫다는 표정이 확연했다.
몽골대사관 사람들도 긴장을 한다. 그러니 대사관에서 나온 사람들이 오버를 한다. 기자들이 들어와 취재를 하는 것까지 문제 삼고 취재를 방해한다. 기자들은 또한 왜 이렇게 취재를 방해하느냐며 항의를 한다. 온통 소란스러움 뿐이다. 모두가 그렇게 그 시간을 맞이했다.

영부인은 우리 학교 예배당으로 내려갔다. 예배당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고, 어느 누가 보더라도 그곳이 예배당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맨 앞자리에 영부인과 나란히 앉았고 아이들이 준비한 환영행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시간이 흘러 빨리 이 어색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삼십여분의 환영공연이 끝나고 영부인 차례가 되었다. 이제  영부인의 마지막 격려사만 남은 것이다. 그러면 모든 행사는 마쳐지는 것이다. 이런 행사는 한두번이 아니다. 그저 일년에 몇 번씩 이런 일은 있었다. 일상처럼 맞이하는 연례행사일뿐이다. 그렇게 몽골의 지도자들이 왔다가 돌아가면 그만이다. 우리에게 몽골의 지도자를 만나거나 방문하는 것쯤은 그냥 일상이다. 그날도 그런 마음이었다. 그것도 굳은 표정으로 교회에 오기 싫다는 모습으로 방문한 어철멍 영부인을 보면서 오히려 내가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왜 자기가 기분이 나빠? 내가 기분이 더 나쁘다. 
5분만 견디면 된다. 5분의 격려사만 끝나면 이 사람들은 여기를 떠난다. 그러면 나는 이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만날 하등의 이유도 없다. 5분이다!

그런데 5분이 지나간다. 그보다 어철멍 영부인의 표정이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굳어있던 얼굴은 완전히 풀려 환하게 웃고 있었다. 교회를 싫어하던 표정이 역력하였는데 사랑이 담긴 눈빛으로 변한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다. 5분만 격려사하고 떠나기로 했는데 말꼬리가 계속 이어진다. 이제는 거꾸로 몽골대사관측이 난리다. 시간을 나누어 쓰는 공식일정이니 안절부절이다. 다음 스케줄에 늦겠다며 이 사람들 정말 난리가 난 것이다. 5분이면 끝날 줄 알았던 격려사가 웬걸 10분이 넘어도 끝나지 않았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나 많았는지 영부인의 격려사는 30분 가까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어철멍 영부인이 돌아가고 불과 몇 십 분이 지났을까 어디선가 연락이 왔다. 방금 전 영부인 곁에서 통역하던 사람이다. 영부인이 무척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차안에서 계속해서 우리학교 이야기만 하더라는 것이다. 그날 저녁 나와 우리 몽골문화원 이사장이신 김건철 장로님께서 몽골 엥흐바야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훈장을 받았다. 훈장을 받는 것이 기분이 나쁠리야 있겠는가마는 그 사실 말고도 기분이 좋았던 이유는 몽골 대통령이 나에게 훈장을 달아주면서 내가 눈이 안보인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는 무척이나 나를 배려해준 것 때문이다.
아마도 어철멍 영부인이 남편인 엥흐볼트 대통령에게 내 처지를 이야기해준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내가 눈이 안보이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그렇게 신경써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어느새 우리 학교는 몽골 선교의 모판이 되었다. 위로부터의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무척이나 많은 몽골 지도자들이 우리 학교를 찾아온다. 그들 대부분은 우리 학교에 와서는 감동을 받아 돌아간다.
라마불교에 젖어 있던 몽골의 지도자들이 교회라는 곳에 들어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마음도 바뀌어 간다. 나는 그것을 아주 쉽게 그리고 빠르게 느낄 수가 있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다. 기적의 역사다. 사람들이 우리 학교에 오기만하면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재한몽골학교가 세워지고 점점 성장해 가면서 우리에게는 큰 기도의 제목이 생겼다. 학교 시설이 너무 협소하고 열악하여 학생들을 제대로 교육할 수 없다는 것이다. 50명 정원의 우리 학교는 현재 80명이 넘는 몽골 아이들이 다니고 있다. 이미 정원을 초과한 것뿐만 아니라 더 들어오고 싶어도 더 이상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이다. 학교에 오고 싶어도 다닐 수 없어 그냥 돌아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무척이나 마음 아프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것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어느 날 컨테이너 하나를 들여 놓았다. 아이들의 교실로 쓰려는 것이다. 컨테이너 학교다. 지하실에서도 학교를 운영해 봤는데 이제는 컨테이너까지 우리 학교가 된다. 
아이들은 참으로 천진난만하다. 컨테이너가 그렇게 재미있어 좋아한다. 아침이면 컨테이너 교실에서 울려나오는 선생님의 우렁찬 강의가 광나루 골목 한 켠의 전경이다.
운동장이 없고, 비록 컨테이너에서 공부를 해도 우리 아이들은 행복하다. 행복은 주어진 조건에 만족할 때 생기는 것이다. 자기들만의 공간이 있음으로 그 빈약함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행복하다. 가진 것이 없고, 비록 너무 협소하여 무릎이 맞닿는 불편함에도 우리는 행복하다.
그냥 이대로 학교에 다니는 것만으로 충분히 아이들은 행복하다. 초라함 속에서도 우리는 진지하고, 고민하며 아파함으로 행복하다. 누가 뭐라고 손가락질해도 '그래, 우리는 이렇게 산다!'라고 주저없이 답할 수 있어 행복하다 이제 어떤 아픔도 받아들일 당당함이 있어 행복하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결코 울지 않는다. 그냥 웃을 뿐이다. 만약 참을 수없는 아픔이 있어 눈물을 흘려야 한다면 그날은 모두가 함께 운다. 그러나 결코 길게 울지 않는다. 짧고 굵게 울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제 우리 학교는 무척 중요한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학교를 지으려는 것이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반드시 세워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면 아무리 인간적인 노력과 돈이 있어도 우리 학교는 이대로 존재하여야 한다. 결코 하나님을 앞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조용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때를 기다린다. 어쩌면 지금 이대로 컨테이너 학교가 더 좋을지도 모른다. 자꾸만 그런 마음이 든다. 좋은 시설보다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있는 곳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우리 몽골학교 아이들은 천국의 아이들이다. 비록 컨테이너에서 공부하고 뛰놀 공간은 없어도 아이들은 천국의 아이들처럼 아름답고 소중하게 자라고 있다. 열악한 공간과 시설의 조건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제 무언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준비를 하여야 한다. 정말 하나님의 뜻이라면 학교는 세워질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의 컨테이너라도 좋다. 그것이 중요하다. 억지로 세워지는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다. 정말 소중한 것은 우리가 더불어 사는 삶이며 고백이다. 몽골아이들과 우리 학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천국의 아이들과 컨테이너에서 사는 것도 결코 나쁘지만은 않다는 마음이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순수한 마음과 하나님 나라를 향한 정직한 비젼을 담아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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