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활을 믿는다. 바울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지만 부활을 믿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이 부활을 증언하고 있는 것은 그도 부활의 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바라보았기 때문이리라. 부활의 사건과 승천의 목격이 기독교 즉 그리스도교를 탄생하게 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교회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하고 재림에 대한 확신을 가진 이들의 공동체다. 그러니 기독교는 부활의 증인 공동체인 것이다.
부활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죽여도 죽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부활의 능력은 어떤 종교에서도 가르친 적이 없는 기독교만의 특별한 경험이다.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이 부활의 능력을 땅끝까지 전파하려 했던 삶을 선교적 사명이라 한다. 선교란 부활을 보고 경험한 이들의 삶 자체인 것이다. 얼마나 큰 충격과 감격을 맛보았길래 그들은 죽음을 부활로 이긴다는 초인간적 상상력을 증언하였던 것일까? 부활이 있었으므로 고난도 박해도, 나아가 순교의 자리까지도 담대하게 감당할 수 있었던 초대교회의 믿음이 부럽다.
부활의 계절이 되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능력이 어김없이 올해에도 새록새록 일어난다. 죽은 것 같았던 땅과 나무와 풀들과 꽃들이 피어나 풍성하고 아름답다. 배반과 절망의 겨울이 훌쩍 지나가고 어느새 잃어버린 희망과 찬란한 꽃들의 축제가 열린다. 죽음으로 끝난 것처럼 여겨지던 역사가 반전된다. 죽었던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절망하던 이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부활은 역사의 진리다.
요즘 들어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한다. 병원에 다녀온 후 건강에도 이상이 생긴 듯하여 마음이 불편하다. 몽골학교의 미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머리가 아프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들어오던 후원이 줄어드니 역파송 선교사들에게 선교비를 보내기도 버겁다. 그렇다고 하던 사역을 줄이거나 멈추기도 어렵다. 한국 학교가 저출산의 파도에 휩쓸려 엄청난 속도로 무너지는 바람에 몽골학교 사역은 물론이고 다른 사역도 만만치가 않다. 미래가 불투명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없으니 혼란스럽다. 다시 안압이 오르고 눈이 아프기 시작한다. 숙면을 이루지 못하니 머리는 무겁고 온몸이 얼어붙어 긴장하다 녹은 생선처럼 흐물거린다. 가슴은 숨쉬기가 힘든지 자꾸만 큰 숨이 나온다. 나 스스로에게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깊은 상념에 빠진다.
십자가 사건의 한 극점에서 우리 주님이 느끼셨던 그날 밤 겟세마네의 깊은 고뇌가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러나 믿는다. 그렇게 죽어서라도 살리시려는 하늘의 큰 뜻을 믿는다. 다시 살아나 죽음도 고통도 아픔도 불안함도 한 번에 날려 보내신 그 뜻 앞에 모두 묻어버린다. 잠시 불편했던 몸들이 일어나 꿈틀거린다. 다시 살아나야 한다. 일어나 절망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불안과 걱정의 마음을 부활의 믿음으로 부수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우리는 참 못난 존재다. 그렇게나 믿음 없이 살아가는 나 자신이 미워진다. 이제 다시 부활의 아침을 기다린다. 일어나 빈 무덤 앞에서 황망히 예수를 찾던 여자들이 어디선가 우리에게 소리를 지른다. 예수가 부활하시어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