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위기다. 교회 스스로 위기를 자초했으니 그 책임은 전적으로 교회와 목회자에게 있다. 어떤 이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교회를 돌아보면 그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인정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반복적으로 위기를 맞이했고 그때마다 위기를 넘어서는 결단을 통해 성숙하고 성장했다. 교회는 살아있는 생명체다. 생명은 아프다가 회복되고 그러다 또 고통을 당하는 상황에 봉착한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반복된 역사의 법칙에서 교회도 예외일 수 없다.
그 위기가 지금 한국교회에 찾아왔다. 한국교회 140주년이 되는 2025년에 말이다. 1885년 부활절 아침 인천에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선교 이후 지금까지 여러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질적인 면에 있어 지금의 위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는 일제 강점이 시작되기 직전이었으며 위기는 교회가 자초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교회는 외부의 위기를 신앙의 힘으로 이겨나가는 힘을 발휘했다. 그것이 1907년의 대부흥 운동이었다. 마침내 일제 식민 지배를 당하며 105인 사건과 신민회 사건 등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잠시 핍박과 고통을 당하였지만 초대교회의 역사에서 보듯 오히려 교회를 강하게 하는 통과의례에 불과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교회가 앞장서는 민족교회로서의 모습은 세계 교회사에서도 매우 특별했다. 교회와 민족의 운명이 이렇게 신앙고백적으로 일치할 수 있었다는 것은 교회가 고통받는 민족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그러나 3.1운동이 실패하면서 교회는 갈라지는 운명을 맞이한다. 현실의 문제에서 벗어나 피안의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신비주의 신앙으로 또 하나는 일제의 교회 탄압에 굴복하여 신사참배와 친일교회로 그리고 소수의 독립운동에 헌신하려 한반도를 떠난 기독교인들까지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물론 그들 중에는 교회로서의 의미를 묻고 찾아가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교회주의와 농촌 계몽운동과 학교를 세우며 교육을 통하여 인재를 키워낸 이들도 있었다. 어떤 기독교인은 사회주의자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들도 식민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며 선택한 것이었으니 불행한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다. 그렇다고 교회의 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교회의 모습은 신사참배와 같은 일제의 문화통치에 순응함으로 일어난 타협이 더 위험한 것이었다. 아이러니다. 일제에서의 교회의 처신은 결국 교회의 분열로 이어졌고 해방 이후 그 분열의 양상은 진보니 보수니 하는 신학적 논쟁과 교권을 두고 벌어진 다툼의 결과로 교회가 분열되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교회의 위기는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60년대를 지나면서 유신독재를 지나 군부독재와 같은 엄혹한 시기에도 교회는 각자의 위치에서 목소리를 내거나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고 일부는 독재에 타협하며 교회의 성장이라는 목적을 이루기도 했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각자의 신앙고백이었다는 점에서 그것도 교회의 위기는 아니었다. 결국 교회는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하며 그 다양성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 공동체라는 최소한의 신앙고백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교회는 이념의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분단이 만든 불행한 교회의 현실이다. 일제시대를 지나 해방 과정에서 교회는 청산해야 할 잔재를 해결하지 못함으로 일제와 분단의 과정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거대한 반공 트라우마와 친미라는 어쩔 수 없는 우리 교회의 모순이 함께 어우러지는 배경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한마디로 친일과 반공과 친미라는 구조가 한국교회의 오늘을 만든 것이다.
친일교회에 대한 회개가 없었고 반공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기억이 있었으며 미국을 앞세운 해방 과정에서 우리의 정치구조가 교회의 거대한 배경으로 자리를 잡았다.
교회가 이념에 종노릇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해도 우리 교회는 어쩔 수 없는 그런 세 가지 중요한 이념적 배경을 갖고 성장했으며 그 성장주의가 오늘 한국교회의 주류가 되어 모든 논쟁에 그들이 주류가 되었다. 거기까지도 인정하고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로 교회는 이념으로 덧칠된 공룡과 같은 괴물들을 양산했다. 불행하게도 그 괴물들이 한국교회 극단의 극우집단으로 드러났다. 한국교회의 극우화는 우리 모두 죽는 길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몇몇 이해관계가 있는 이들의 극우화를 막지 못함으로 이제 우리는 심각한 위기 앞에 섰다. 그렇지 않아도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상황에서 막무가내의 극우적 목소리는 교회의 미래를 절벽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모두가 죽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누군가 그 길을 막아서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절연하여야 한다. 그들은 교회가 아니며 정치집단일 뿐이고 예수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이비라고 이야기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미래를 준비하는 새로운 길을 찾아갈 때가 되었다. 이념과 정치권력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나라를 향한 선교적 교회로서의 길을 가야 한다. 교회의 위기를 여기서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 교회는 종말을 고할 것이다. 마치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의 교회들처럼 말이다. 아직 교회의 그루터기는 남아 있다. 그루터기가 될 마지막 남은 자들을 모으려 한다. 그래서 교회는 여전히 존재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 공동체임을 보여주고 싶다.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의 모델을 찾고 그들을 소개하고 싶다. 작아도 강한 교회, 작지만 결코 약하지 않은 교회, 큰 것보다 작은 것이 더 좋다는 열등감 없는 교회가 그것이다. 생명 목회, 생태적 선교, 참 자유함을 보여주는 교회, 진리와 정의가 이기는 교회의 모델이 그리운 시대다. 통일 선교와 이주민 등 사회적 약자들이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가르쳐 주는 교회가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교회라 믿는다. 대안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길을 다양성이라는 거대한 흐름에서 읽어내는 목회자가 필요하다. 청년을 비롯한 가나안 교인들에게 다가서는 열린 생각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한다. 과감하게 과거의 관습에서 벗어나고 미래 교회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 교회를 찾아야 한다.
어딘가에 그런 교회가 있다. 누군가 그런 목회를 하고 있다. 드러나지 않지만 조용히 대안을 찾아가는 고수가 있다. 목소리는 내지 않아도 그들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들을 만나고 싶다. 그래서 교회가 죽지 않았다고, 오히려 위기 속에서 그들이 희망이라고 소리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