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주제로 설교 준비를 하는데 왠지 모를 답답함이 한주 내내 사라지지 않는다. 나그네를 선교하는 내게 본문의 탕자는 바로 우리 사역의 대상자인 나그네라는 사실이 절실해서다.
집 나간 아들은 누구인가? 아버지를 떠나 살아가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 자기 스스로 살아보려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찌 인생이 자기 마음대로 되던가? 먹을 것도 잠자고 쉴 곳도 없이 방황하던 탕자가 찾아갈 곳은 아버지 집뿐이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보여준 아버지의 모습은 무척 감동적이다. 아무런 책망도 없다. 한마디 꾸지람도 없다. 오직 아들이 돌아온 것에 기뻐하고 잔치를 베풀어 아들을 받아들인다.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아들은 달랐다.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는 큰아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자신만이 아버지의 집에 머물며 아버지의 마음이 자신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허랑방탕하다 돌아온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행동은 이해할 수가 없다. 큰아들은 아버지에 대하여 배신감마저 느꼈을지도 모른다. 큰아들은 도저히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동생과 자신이 동등한 한 식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사랑 그 자체다. 사랑에는 설명이 필요 없다. 아들이 돌아왔으므로 아버지는 기뻤다. 그래서 잔치를 배설하고 환영한 것이다. 그러나 큰아들은 율법이었다. 그에게 아버지의 사랑은 못마땅한 것이었다. 동생은 분명히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나가 탕진하였으니 분명 다른 레벨의 사람이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이 우리의 시각이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들 자체였다. 아들이 돌아온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탕진한 재산보다 아들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 사람은 사랑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선교적 관점이다.
몇 년 전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난민 문제로 시끄러웠던 때가 있었다. 그들이 무슬림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한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교회가 그들을 거부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거절당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다. 죄인이라는 이유로 혹은 더럽다는 이유로 말이다. 탕자 같은 이들이 거절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탕자는 다름아닌 우리 자신이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탕자 같은 존재다. 거절당하는 사람들이 없어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거절당하는 이들을 선교하자고 나선 것이 나섬의 사역이다.
작은 자가 예수다.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예수 자신에게 한 것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작은 자가 탕자이며 그들이 오늘날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교회의 자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정작 교회가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큰아들이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탕자 같은 이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율법에서 사랑으로 교회의 패러다임이 전환되어야 함을 가르쳐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