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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교회의 역사에 대한 (History Of Indian Church) 개신교의 선교 Part 2

4. 개신교의 선교

18세기초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이 쇠퇴하고 기독교 국가인 네덜란드와 영국이 식민지 확장의 주도권을 장악하자 개신교 선교도 아울러 시작되었다. 개신교의 선교역사도 그 주체가 바뀐 것이지 역시 식민지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유럽에서 경건주의 운동이 활발히 일어날 때 덴마크 국왕의 요청으로 독일 할레 대학의 바돌로뮤 지켄발크와 헨리 플뤼챠우가 170676일 인도의 타밀지방 트란케발에 상륙하였다. 이들은 현지인이나 덴마크인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인도 성경 번역인 타밀어 신약성경을 출간했다. 1793년 영어권의 최초의 선교사인 윌리암 캐리(William Carrey)가 자신이 설립한 침례교 선교협회의 파송으로 인도에 도착했다. 그는 동인도회사의 반대로 캘커타에 들어가지 못하고 벵갈지역에서 일하다가 세람포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캐리는 마쉬맨과 와드와 함께 팀사역을 했다. 가능한한 많은 곳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목표로 한 그는 30년 동안 신구약성경을 6개의 언어로, 신약을 23개의 언어로 번역하였다. 자신이 직접 번역한 성경으로는 벵갈어, 산스크리트어, 마라티어 성경이다. 1830년에는 스코틀랜드 국교회에서 파송한 알렉산더 더프가 인도에서 교육선교사역을 담당하였다. 더프 이후의 1833년에 비영국권 교회의 선교가 허용되면서, 미국장로교회가 펀잡에 선교부를 설치하였고(이미 미약한 회중교회의 선교사 1813년 봄베이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루터교회는 1814년에, 미국 감리교회는 1856년에 선교부를 설치하였다. 19세기의 인도선교는 주로 교육사업형태로 이루어진다. 미국 여성선교사 토번은 1887년에 인도 최초의 기독교 여성대학을 설립하였다. 1877년에는 불가촉 천민 계층에서 선교사 시작되어 집단개종이 일어났으며 미국의 침례교와 장로교가 현재는 인도령인 북동부 산지역의 몽골지역에 선교하여 집단 개종이 일어났다. 1934년에는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 루터교 선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들의 사역으로 인도의 북동부 지역에 선교사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 바돌로뮤 지겐발크와 헨리 플루챠우(Bartholomew Ziegenbalg and Henry Plutchau)

유럽에서 경건주의 운동이 활발히 일어날 때 덴마크 국왕의 요청과 영국 교회의 지식보급선교회의 후원으로 독일 할레 대학의 지켄발크와 플루챠우가 170676, 인도의 타밀 지방의 트란케바르에 상륙하였다. 덴마크의 식민지였던 그 곳에서 이들은 현지인들이나 덴마크인 모두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후에 인도인의 도움으로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을 반대했던 인도인들은 브라만들로 보인다. 이들의 선교정책은 교회와 학교를 병행하는 것, 성경을 조속히 번역하는 것, 원주민들의 의식구조를 가능한 이해한다는 것, 개인회심에 힘쓰는 것, 인도교회에 인도인 지도자를 세운다는 일종의 자립정책과 토착화 선교였다. 6년후 건강이 악화된 플푸챠우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지켄발크는 13년 동안 350명의 신자를 얻었으며 루터교회를 인도땅에 처음으로 세웠다.

 

지켄발크의 후임으로 입국한 크리스챤 슈바르츠는 48년 동안 사역하면서 4천명의 신자를 얻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교회내에서 예수회의 선교처럼 카스트 제도를 용납하는 잘못을 하였다. 그 이유는 가톨릭 선교의 과정에서 나타난 집단 개종과 상황화의 문제를 이제 막 태동하는 인도 개신교 선교가 충분히 검토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가톨릭 선교와 개신교 선교와의 단절이 한 원인이 될 수도 있으며 근본적으로 힌두교라는 특수한 상황을 적절하게 파악하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성육신적 선교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2) 윌리암 캐리(Wiliam Carrey)

1793년 영어권의 최초의 선교사인 윌리암 캐리가 자신이 창립한 침례교 선교협회의 파송으로 인도에 도착하였다. 그는 동인도 회사의 반대로 캘커타에 들어가지 못하고 벵갈 지역에서 일하다가 세람포로 이전하여 세람포의 3인으로 유명한 조슈아 마쉬맨과 윌리암 와드와 함께 팀 사역을 하였다. 1793년 윌리암 캐리가 상륙하였을 때 수백만의 인도인들은 가난과 무지 그리고 분쟁에 휩싸여 있었다. 인도는 여러 부족들과 언어 그리고 종족적인 가지들로 얽혀진 혼합체였다. 그가 도착할 당시 인도는 선교사역을 시작할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동인도 회사는 혹시 선교사역 때문에 상업적 이익에 손해를 볼까 두려워하였는데 윌리암 캐리는 이를 재빨리 알아채고 언제 추방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가족들을 데리고 내륙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은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곳이었다. 그후 캐리는 말다로 가서 한 농장의 지배인 자리를 얻었으며 1795년 그곳에서 침례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벵갈 지방에서 7년 가까이 땀을 흘렸지만 단 한명의 인도인 개종자도 얻지 못하였다.

 

1800년 말다를 떠나야 될 형편에 놓이자 캘커타 가까이 있는 덴마크령 세람포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다. 처음 이곳에 가게 된 것은 그들의 요구에 의해서 갔지만 이후 세람포는 캐리의 선교사역의 본부가 되었다. 그는 벵갈어를 배웠으며 뱅갈어로 신약을 번역하였다. 캐리는 그가 인도에서 보낸 초년기에 준비했던 문법과 사전류를 포함하여 이 번역 성서를 거듭해서 개정해 나갔다. 번역하는 일 외에도 캐리가 할 수 있는 대로 말씀을 전했던 것이다. 이외에 교육가로서 그리고 사회개혁가로서 사회 사업가 등으로 인도 사회의 전분야에 걸친 캐리의 활동은 광범위하였던 것이다. 윌리암 캐리의 선교정책은 팀사역으로 가능한 한 많은 곳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 다양한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보급하는 것이며, 교회를 설립하고 가능한 속한 시일에 원주민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세람포 팀은 30년 동안 신구약성경을 6개의 언어로, 신약을 23개의 언어로 번역하였다. 자신이 직접 번역한 성경은 벵갈어, 산스크리틍, 마라티어 성경이다. 1834년 그 땅에서 사망한 윌리암 캐리의 업적은 언어학적, 교육적, 목회적 공헌뿐 아니라 과부화형이나 유아살해 등의 나쁜 관습과도 싸워낸 점이다. 그는 서구 문화를 인도에 이식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인도문화를 존중하며 현지인 지도자에 의한 토착교회와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과 그들의 가락으로 된 찬송을 부르게 한, 그 시대에 앞서가는 선교사로 평가받는다.

 

3) 알렉산더 더프(Alexander Duff)와 이후의 선교사

1830년에는 스코틀랜드 국교회에서 파송한 알렉산더 더프가 입국하였다. 그는 인도에서의 선교사역은 모두 실패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개종자들이 대부분 하층민에서 나왔고 그들은 동족에게 복음을 전파하지도 못하고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선교회에 의존만 하고 있는 것에 불만이 많았던 그는 인도에서 혁신적인 선교사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선교정책은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학문적인 노력을 통한 선교였다. 학교를 세우고 서양의 문물에 관심이 많은 식자들에게 영어로 과학과 기술을 가르치며 성경공부도 하였다. 3년만에 4명의 개종자에게 세례를 주었고 결국 수천명의 학생중에 33명이 개종하였다. 사역에 진전이 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다른 선교사들은 신랄한 비판을 하였지만 윌리암 캐리는 그를 끝까지 격려하고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그는 인도선교 후언과 동원을 위해 영국과 미국을 순회하였고 그의 노력으로 귀한 선교의 헌신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의 자녀들은 본국에서 10년이상이나 부모를 만나지 못하고 살아야만 했으며 그로 인해 자녀들로부터 아버지로서의 정이 없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더프 이후의 선교사들은 주로 힌두교의 카스트가 강한 인도에서는 고등교육을 통한 선교가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봄베이의 존 윌슨, 마드라스의 윌리암 뮐러등이 그러하다. 1833년에 비영국권 교회의 선교가 허용되면서, 미국장로교회가 펀잡에 선교부를 설치하였고 미국 루터교회는 1841년에, 미국 감리교회는 1856년에 선교를 설치하여 현지 북인도교회의 가장 큰 교단이 되었다. 다른 유럽에서는 바젤선교부와 라이프치히 루터교 선교부가 인도선교를 시작하였다. 1865년에는 미국 침례교 선교회 출신 죤 클라우 박사부부가 인도 옹골의 론 스타 선교회에서 천민계급들 사이에서 큰 부흥을 이룩하였고 1978년 여름에는 하루에만 2,222명에게 침례를 준 일도 있었다. 1830년대부터 미국의 침례교와 장로교가 인도령인 북동부 산악지역의 몽골지역에 선교하여 집단개종이 일어났다.

 

4) 개신교 선교의 특징

첫째 Pax Britanica와 함께 한다.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인도를 식민지화 하였고 선교가 이과정에서 수행되었다. 둘째로 식민주의에 대한 반발은 민족주의를 고취시켰고 인도인들의 특유의 민족주의는 지성인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등을 돌리게 하는 것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셋째, 인도교회는 외국선교에 너무 의존하여 자립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선교의 약점이다. 넷째, 인종, 문화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개인주의적 선교보다는 집단개종에 의존한다(19세기말과 20세기 초). 동시에 집단개종은 곧 개신교 선교사 상층계급의 사람들보다는 하층민들을 상대로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인도교회의 한계로 작용한다. 인도의 개신교는 주로 힌두교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대거 기독교로 몰려 들었다. 따라서 사회적 상황이 기독교 선교에 유리하게 작용한 반면 이 자체는 개신교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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