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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교회의 역사 (History of the Indian Church) Part 1

 

인도교회의 역사 (1)   전반적인 개관

 

1. 도마전승에 의한 기원

 

1) 남인도의 도마 전승 : 인도의 남동부 도시인 첸나이(마드라스)에는 도마의 선교를 기념하는 유적지들이 있다. 도마의 무덤이 있는 성도마교회, 도마가 기도했던 동굴, 도마가 잡혔던 언덕 등이다. 도마의 인도 선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도마의 인도 선교가 근없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한다. 이장식 교수에 의하면 '사도 도마가 인도에 선교하러 왔다면 그것은 아마 기원후 50년 경일 것이다.'라고 하며, 그의 선교여행은 애굽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일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서 육로를 통하여 홍해안에 도착 배를 타고 페르시아만을 항해해서 인도 서해안에 상륙했거나, 아니면 시리아에서 동남으로 향하여 인도의 남북쪽 인더스강 유역에 도착해서 선교하다가 남하했을 것이라고 한다.

현재의 첸나이에 있는 도마의 유적은, 6게기경 페르시아에서 들어온 아르메니아인들이 도마의 무덤을 발견하고 그 위에 비석과 교회를 세우면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그 마을을 산 톰(San Tomas)이라고 불렀다.

 

1293년 남부 인도의 말라바르 부근에 위치하는 작은 마을 코로만델을 방문했던 마르코 폴로는 그의 견문록에 도마의 무덤과 기독교인들의 공동체를 보았다고 기록하였다. 네스토리우스교도뿐만 아니라 회교도까지도 그 무덤에 와서 존경을 표하고 그 무덤이 사라센의 예언자의 무덤이라고 하면서 치유의 효력이 있는 흙을 퍼갔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도마의 사인이 이교도의 박해가 아니라 사냥꾼이 쏜 빗나간 화살이 도마를 맞힌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 지역의 전서에 의하면 도마는 남인도의 말라바르에 도착한 후 성공적인 전도사역을 수행한 후 마일라포르에 와서 왕과 주민에게 전도한 뒤 다시 마일라포르로 돌아와서 은둔의 생활을 하다가 특히 공작이 많던 그 지역에 공작사냥을 하러 온 사냥꾼의 시루로 화살에 맞았다는 것이다. 이를 전설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점은 사포로 2세의 박해를 피하여 345년경에 시리아에서 카나의 토마스가 선발대가 되어 말라바르지역을 답사했을 때 거기에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사제단과 교인들을 데리고 말라바르에 왔을 때 기존 그리스도인들의 환영과 안내를 받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이미 2세기경에 시리아교회의 인도 전래가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이 마르코폴로의 사적지 소개로 서방 로마제국의 학자들을 자극하였고 포르투갈의 식민정권이 인도에 왔을 때는 활발하게 발굴작업을 벌이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인도 방문 이전에 이미 로마교황 이노센트3세는 중국선교를 위해서 프란시스 승단과 도미니코 승단을 파견하였다. 이 때 몬테가르비노의 요한이 중국 여행도중에 인도에 들렀을 때 말라바르 지방에서 소수의 기독교인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많은 자료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최소한 로마 가톨릭의 전교이전에 인도의 전교가 사실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1세기 당시 인도 남서부 코친에는 유대인 정착촌이 해안선을 따라 흩어져 있었고 이곳에 온 도마는 처음 이들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 했다고 한다. 그 결과 남서 해안에 7개의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그 후 동남 해안인 마일라뽈르(Mylapore-현재의 마드라스)로 옮겨 복음을 증거 하다가 기원후 72년 브라민들에 의해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세워진 사도적 기원의 교회를 말토마(성도마)교회라 부른다.

 

2)도마행전이야기

도마행전에는 예수님 사후에 그의 제자들이 세계 선교를 위해 자신들이 떠나 갈 장소를 결정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한 결과 도마는 인도가 결정 되었다고 한다. 인도에 가기 싫었던 도마는 불순종하고 있다가 인도의 왕 군다포러스의 신하 하반이 왕의 궁전건축을 위한 목수를 구해오라는 명령을 따라 팔레스타인에 왔다가 도마를 구하여 갔다는 것이다. 추측하기로는 도마에게 궁전을 짓도록 부탁한 인도의 왕 군다포러스는 기원후 19년에 왕이 되어 기원후 45년까지 통치한 시토-인도(Scytho-Inia: Punjab제국)의 군다파르로 생각된다. 이는 아랍식 이름인데 헬라식은 군드라포로스인 것이다. 파르티아(Parthia: BC 225-AD 226)의 미드라다테스 대왕 사후에 그 왕국의 동부가 독립하였는데, 이 지역에서 파르티아인과 싯디아인들이 칸다바르에서 동남진하여 아라코시아와 펀자브 왕국을 세웠다. 기원후 19년에 이 왕국에 왕이 된 사람이 바로 이 군다포러스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면 도마행전의 인물과 국가가 가상의 것이 아니라 인도의 북서부 지역 펀잡왕국의 왕으로, 역사적 실존 인물임을 입증할 수 있다.

 

도마행전에서는 도마가 결국은 왕을 개종시키고 인도왕국의 다른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마가 남인도로 이주하여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의 말년을 거기에서 보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으며, 남인도에서 발견되는 다른 여러 실마리들과 조합한다면 인도교회가 사도적 전승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도마의 복음 전래의 시기로 여겨지는 시기의 인도는 마우리아 왕조가 무너지고 슝가 왕조에서 쿠샨왕조가 새롭게 세워진 때로 볼 수 있다. 마우리아 왕조시대와 그 이후의 분열의 기간동안 인도에서는 힌두교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제도적인 형태의 힘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도마행전을 통해서 나타나는 힌두교의 문제는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마우리아 왕조 시대와 그 이후에는 불교, 자이나교 등의 브라만 사상의 입장에서의 이단 종파들이 성하여 브라만 중심의 사회질서가 흔들리고, 그리스인, 샤카족, 파르티아족등의 외국인들이 이주해 온 것 등의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카스트 사이에 큰 혼란이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2. 시리아 교회와 네스토리아 교회의 전래

4세기의 페르시아 제국과 8세기의 이슬람 세력은 시리아 교회를 압박하였다. 그래서 시리아로부터 선교 이민 운동이 시작되어 5세기 말경 네스토리아 교도들이 에뎃사를 거점으로 하는 아시아 선교의 운동이 왕성하여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에 시리아 교회가 들어왔으며 서서히 동양교회는 네스토리아 교회의 영향력 안에 들어왔다. 이미 200년경에는 알렉산드리아의 판테너스가 인도에 선교하였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4세기와 8세기에 두 차례에 걸쳐 시리아 교회의 이민 선교단이 인도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345년에 시리아 교회의 신자들은 카나, 혹은 쿠나이의 토마스의 인도를 받아 페르시아 제왕 샤풀2세의 박해를 피하여 약 400명이 집단 이주하여 말란카라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지방 왕 페루말에게 환대를 받았고 토마스는 말라바르의 귀족인 나이아라는 높은 칭호를 받았다. 795년에도 역시 카나의 토마스라는 감독이 이민단을 이끌고 말라바르에 정착하였으며, 정착지의 대표자는 그 지방의 왕으로부터 '마니그라만'이라는 상권자임을 인정하는 명칭을 부여받았다. 이 명칭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부여한 것인데 이 말은 힌두교 관습을 고수하는 인도의 그리스도인들로서 그 관습을 배반할 수 없다는 뜻을 표현한 말이다. 이 시기는 7세기말부터 시작된 이슬람 세력의 진출로 인도 내부에서 힌두교인들은 다른 종교가 자신들의 관습과 제도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인도에 정착한 시리아 교회와 인도의 재래종교의 관습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성서적 윤리에 어긋나거나 시리아 교회의 관습과 충동하는 경우에 생기는 분열이 있었다. 퀼른 지방에서 힌두교의 관습에 따라 한 교회감독의 시체의 화장을 주장한 신도들은 시리아 교회로부터 온 72가구들과 충돌하여 116가구가 떨어져 나가 별도의 마니그라만을 형성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현재 인도 기독교 신자 1422만명중 440만이 있으며 이 중 도마교회 신자는 250만이 넘는다고 한다. 그들은 이미 상업에 종사하여 부를 많이 축적하고 있었기에 쉽게 인도에서 그들의 터전을 일굴 수 있었다. 현재까지 이들은 인도 전역에서 관료나 상인 은행가들로 활동하고 있다. 케랄라 주에서는 힌두교와 기독교가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상황은 8세기의 시리아 교회와 힌두교와의 관계가 그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이민단이 정착하면서 그들은 특혜를 통해 광대한 토지를 얻었으며 6백명에 달하는 군대가 배속되었다. 그리고 혜택과 특권은 72종에 달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말라바르의 기독교인들은 자존심을 갖고 이러한 권리의 수호를 위하여 열심히 생활하였다. 그들은 왕족과 힌두교도 다음에 가는 고위의 계급으로 인정 받았으며 이 계급을 세습하였다. 그들은 어디를 가나 토착민의 풍습과 융화 내지 모방을 시도하였다. 이는 기독교 본래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며 순수 기독교 정신으로 볼 때 일종의 부패이며 타락이라 하겠다.

 

3. 로마 가톨릭교회(포르투갈 교회)의 선교

1542년 예수회 소속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가 인도에 도착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선교의 장이 열렸다. 그는 평범한 선교사이기보다 포르투갈 왕의 대표로서 군사력과 왕과 직접 교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왔다. 그는 국가의 권위를 배경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불완전한 통역의 조력으로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의 번역을 거칠게 나마 마련하였다. 가톨릭이 인도에 복음을 들고 들어가기 시작한 시기는 16세기에서 19세기 중엽으로 무굴 왕조가 서 있던 시기(1526-1859)이다. 이 시기는 힌두교와 회교 양문화의 혼용이 현저하였다. 서구 식민지와 함께 한 가톨릭은 아직도 건재한 인도 왕국의 비위를 거슬려 사역할 수 있는 입장이지 못해서 인도의 전통을 존중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역에 관심을 가졌던 포르투갈은 인도 서부, 고아를 중심으로 몇 몇 식민지를 통해 집단 개종자를 얻었다. 사실상 파라바와 같은 낮은 카스트의 힌두교도들은 기득권에서 제외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 없이 다른 종교로 개종을 꺼리지 않았다. 그러나 기득권층이었던 브라민은 결코 개종하려 하지 않았으며 신분의 상승을 미끼로 제공된 천민들의 개종은 그들에게 반발심을 부추겼다.

 

이러한 반발심은 종교적인 이유에서 생긴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요인으로 인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물론, 무엇보다도 고아 대감독 교구가 로마 교황청의 지도를 받기보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권의 호위를 받는 대종단의 선교사들에 의해 방치되다 시피 하였던 것이 문제였다. 이렇게 선교사업이 중앙권력의 지도를 받지 못하는 동안에 교구내에서는 유대교와 회교가 뒤섞여 있었고 부유한 가톨릭 교도의 무분별한 생활은 왕으로 하여금 칙령을 내려 자제를 요구하게 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가톨릭이 대종단 선교사들과 상인들의 강력한 경제력과 함께 들어와서 집단적인 개종을 종용하면서 브라만의 위치를 위협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반발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초기 가톨릭 선교에 있어서의 문제점은 힌두교도들의 반발이라기보다는 브라만들에 대한 포르투갈 사람들의 편견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고아 지방의 최초의 대리 감독에 임명된 두 사람 중 한 명이 인도 사람 매튜 드 카스트로(Matthew de Castro)였는데 고아의 대감독은 그를 감독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가 받은 안수식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직책을 박탈당하고 직책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이러한 인도인들에 대한 편견과 모욕적인 상황을 바라보는 힌두교인들에게 인도인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그들의 편에 서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문제이며 정치적인 문제였다. 포루투갈인들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사람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면 그들의 식민지 세력을 강화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초기 개종자들의 영적 성장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에 개종자들은 새로운 신앙의 결과로서 진정한 인격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1)프란시스 자비에르

1542년에 고아(Goa)지역에서 사역을 시작한 자비에르도 같은 맥락의 사역을 하였다. 이미 유럽 문화의 영향을 받아 도덕적으로 심히 부패하여 있었던 그 지역은 힌두교도들로부터 빈축을 사고 있었으며 가톨릭이 도덕적으로 부패한 종교라는 인상을 힌두교인들에게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남부 해안으로 사역지를 옮겨 가톨릭에 대한 반발이 적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역하였다. 그들은 진주조개 잡이를 하는 천민계급들로 개종에 대한 부담이 적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수없이 몰려와서 세례를 받고 신조를 암송하는 것을 교육받았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지극히 피상적인 것이었다. 그에게 세례를 받은 소년이나 어른들은 기도문이나 교리서들은 오늘날 살펴보면 너무나 터무니없는 엉터리 번역이었다. 사실상 그는 힌두교의 문제를 고려하기보다는 완전히 도피하여 사역을 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힌두교적 성향이 발달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십계명이나 주기도문을 암송케 하면 힌두교인의 사고방식을 가진 그들의 부모님들에게 가서 개종을 설득하게 하거나 우상숭배의 문제에서 그들의 부모에게 굴복하지 않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차적인 방법으로 힌두교와 접촉이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본질적으로 그는 힌두교와의 마찰이 없는 사역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2)로베르트 드 노빌리(Robert de Nobili)

1605년에는 예수회 신부 로베르트 드 노빌리가 인도의 상류 사회를 위한 선교를 전개하였다. 그는 자칭 브라민으로 행세하며 브라만 계층민의 개종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그가 '파랑기'포르투갈 오랑케)가 아니며 로마에서 보내어진 현지인들을 위한 사람임을 자처하였다. 그래서 힌두의 귀족계급인 브라민의 복식과 생활양식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토착화에 힘썼다. 그러나 그는 지역감정과 카스트제도의 문제로 많은 고난을 겪었다. 게다가 본국에서는 그가 힌두의 미신을 묵과한다는 비판을 혹독하게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브라민의 계층만을 위한 독자적인 교회를 세웠다.

 

자비에르에 비해 노빌리는 직접적으로 힌두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가 인도의 남부에 정착하여 사역하는 기간은 북부인도의 고전적 전통과는 현저하게 다른 힌두철학과 종교같은 형태들을 발전시키던 기간이었다. 그리고 타밀 사상과 문학에 고유하고 창의적인 것이라는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으나 종교에 대한 관심과 들으려는 열의가 대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빌리는 브라만의 관습과 선입견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포기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고아와 말라바르의 관할사제에 의해 견책의 대상이 되었고 로마로 상소를 올리게 되었으며 예수회에서도 제재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의 반응이 어떠하든, 그리고 그의 방법론이 기독교의 입장에서 어떤 문제점을 갖고 있건 간에, 노빌리의 방법은 힌두교인들에게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의 방법이 힌두교인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가장 주된 이유는 그의 정체성 문제와 관련이 있다. 그는 힌두교인들에게 이방의 종교를 전하는 포교자로 여겨지지 않았다. 당시의 힌두교인들은 노빌리를 기독교의 포교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 가운데서 수행하는 종교적 교사로 인정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정체성에 의심을 가진 개종자들도 있었으나 노빌리의 사역에서 힌두교인들이 보인 반응은 집단적 대상이 포교활동이 아닌 경우 개인적 차원에서 얼마든지 접촉점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노빌리의 사역에서 과도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적절한 상황화는 그가 브라민이라는 동질성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부분적으로는 계급의 문제를 초월한 사역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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