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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와 퍼스트레이디 [오늘과 내일/최영훈]



  
1년여 전, 40대 한국인 남편에게 모진 매를 맞고 숨진 베트남 신부(19)의 넋을 달래는 칼럼(2008년 1월 15일자 A34면)을 쓴 일이 있다. “밤하늘에 작은 별 하나가 스친다. 혹시 후안마이의 원혼이 차가운 겨울하늘을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후안마이… 가슴 깊이 맺힌 한을 풀고 남십자성이 보이는 따뜻한 고향 하늘로 어서 돌아가렴.” 글을 맺던 필자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되풀이되는 후안마이의 비극

베트남에 이어 네팔 처녀들도 최근 사기결혼 피해를 보았다. 네팔 누가코트 출신의 다와 셰르파(22)는 젊은 남성(32)과 결혼한 줄로 믿고 한국에 왔다. 그러나 늙은 농부에게 팔려가 중노동에 시달리다 도망치는 신세가 됐다. 얼마 뒤 붙들린 그는 다른 농부에게 팔려가는 고초까지 겪었다. 샨티 마가르(21)는 100만 네팔루피(약 1850만 원)를 주고 젊은 남성과 결혼한 걸로 철석같이 믿고 한국에 왔다. 역시 늙고 병든 신랑과 중노동이라는 엄혹한 현실에 직면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왔던 후안마이, 그의 삶을 짓뭉개버린 비극이 셰르파나 마가르에게 되풀이돼선 결코 안 된다. 

‘풍선효과’로 치부하거나 쉬쉬하고 넘길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국제사회에서 코리아 브랜드는 실추될 수밖에 없다. 국가브랜드위원회를 만들고 홍보를 강화해봤자 말짱 헛일이다. 후안마이나 네팔 신부들의 사례는 다문화사회로 진입한 우리 사회의 그늘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국제결혼 중개업을 허가제로 바꾸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진 않는다. 우리의 발상과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10년 뒤면 훨씬 더 중요해질 ‘다문화 화두’는 ‘미래형 국가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지금부터 법과 제도, 의식을 함께 정비하지 않으면 호미로 막을 일을 나중에는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된다. 이 부처 저 부처가 비슷한 일을 중복해서 하고 여기에 지자체까지 가세하다 보니 선택과 집중이 안 된다. 다문화 정책 수립 및 집행에 관해선 대한민국에 제대로 된 컨트롤 타워가 없는 상태라고 전문가들은 꼬집는다. 

게다가 미증유의 경제대란 앞에서 이 화두는 국정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임기가 4년밖에 남지 않은 대통령은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창출, 제2의 국가부도 방지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처지다.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는 다문화가정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김 여사는 지난해 이런저런 다문화 행사에 자주 참가했다. 올 들어서도 설 직전인 1월 22일 서울 동대문구 제2여성복지관에서 베트남 네팔 몽골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신부들과 만났다. 김 여사는 “한국 사람도 시집가면 어려움이 있는데 낯선 나라에 시집와서 언어도 다르고 얼마나 힘들겠느냐”고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했다. 





발등의 불을 끄기에도 대통령은 바쁜 처지다. 다문화 화두에 김 여사가 관심을 갖고 챙기는 것은 단순한 내조의 차원을 넘는다. 먼저 언어소통과 자녀교육 문제로 고통 받는 결혼이주 여성들을 돕는 것이 중요하다. 농촌 지역의 다문화가정 주부들 중에는 가부장적 인습과 인종차별이라는 이중의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도 많다. 대한민국이 건강한 다문화사회로 진화해야 한다는 구호는 이들에겐 사치스러운 말이다. 

대통령부인이 팔 걷고 나섰으면

김 여사는 한국 퍼스트레이디의 원형으로 꼽히는 고 육영수 여사를 역할 모델로 여긴다는 말이 들린다. 육 여사는 생전에 한센병 환자의 손을 잡고 그들이 건넨 음식을 나눠 먹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또 민의를 듣기 위해 낮은 곳으로 임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들의 민원 해결에 열과 성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심성이 후하고 넉넉해 보이는 김 여사가 발품을 팔고 손을 내밀 곳은 우리 사회 응달진 곳 여기저기에 많을 것이다. 그래도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다문화가족들에게 먼저, 그리고 더 자주 발품을 팔고 따뜻한 손길을 건넨 최초의 퍼스트레이디로 오래오래 기억되시길 빈다. 아직 구천세계를 떠돌지 모를 후안마이의 한도 그래야 풀릴 것만 같다.

동아일보 2009/3/4    최영훈 편집국 부국장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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