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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섬사람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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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강원도 양구 21사단 전방부대 군목시절 비무장지대 안에서 병사들이 지뢰를 밟은 사건이 터졌었다. 두 명의 병사가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당한 큰 사고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런 관습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병사들이 사고로 사망하면 군목이 병사들의 사체를 염하는 곳에 따라가거나 그 가족들을 만나 위로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곤 하였다. 나 자신도 어린나이였던 군목 40개월 동안 6명의 병사들이 사고로 혹은 자살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었다. 도대체 이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무엇으로 설명하여야 하는지 묻고 또 묻곤 하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죽음들이었다.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무엇을 위하여 이처럼 젊고 어린 병사들을 죽게 두셨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역사는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깨달음의 문제인 것을  그 당시엔 몰랐다.
그들 중 자살한 한 병사는 내가 관리하던 문제 사병이기도 했었다. 어느 날 집안의 식구 중 누군가가 면회를 왔었고 그 면회 후 병사는 돌아오지 않고 여관방에서 목을 매었다. 그의 아버지는 나를 찾아와 그 당시 돈 오만원을 주면서 아들의 장례를 치러달라고 하고는 부대를 떠나 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 그 병사의 시신을 끌고 강원도 상남의 군부대 화장장에서 화장을 하고 강원도 양구 골짜기 어느 숲속에 그의 유골을 묻었다. 밤 12시가 되어서야 그 일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던 그날을 나는 기억한다. 그 이후로 그 병사가 묻힌 숲속 앞길을 지나 운전을 할 때마다 그 병사의 얼굴이 나타나 꽤나 긴 시간을 고통스럽게 보낸 적이 있었다.

어제 필자가 초임군목으로 임관하여 근무했던 강원도 양구의 그 부대 군목이 찾아왔다. 내가 처음 그 부대에 부임했던 때가 1987년이었으니 그 군목은 나보다 25년 후배인 셈이다. 하긴 우리 큰 아이가 그 부대 군목시절에 태어났으니 꽤나 긴 시간이 흐른 것이다. 강원도 양구의 펀치볼이라는 곳에서 4땅굴이 발견되었고 바로 그 부대가 필자가 근무하던 부대이며 그 땅굴이 발견되기 직전까지 그 부대에서 근무를 했었다. 우리 교회 김장로님이 그 땅굴을 직접 발견한 사람이니 역사의 현장을 지킨 사람들이 우리 교인들 가운데 있다.

그런데 그 후배군목을 만나면서 다른 것보다도 그 시절 죽어간 병사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 내가 목회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게 된 곳이 바로 양구의 그 부대이다.  1987년은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해이다. 6월 항쟁이라 불리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우리 사회는 그제야 민주화의 길로 들어선다. 물론 여전히 군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절인 것은 확실했으며 내가 군목이 되어 그 부대에 갔던 그 시절은 보안부대라고 불리는 특별한 사람들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때였다. 전방은 그들의 위력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 곳이었다. 그 시절 보안부대 중사는 중령과 맞담배를 피웠고 보안반장은 육군 대령 연대장과 맞짱을 뜨던 때였다. 여기서 맞짱이란 연대장이 계급과 관계없이 보안부대의 감시 속에서 철저히 몸을 낮추고 살아야했던 군부통치의 시절을 단면을 말해주는 말이다.

필자는 육군 중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지이며 열악한 부대의 군목으로 있었으니 젊었다고 하기보다 어리디 어린 군목의 눈으로 세상으로 보아야 했던 그 시절이 떠올라 그 젊은 후배 군목과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시절 나는 젊었고 비교적 정의로웠으며 때로는 그 보안부대원들의 횡포에 맞서던 호기도 있었다. 그래서 그때 농담반 진담반 보안부대 군목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던 터다. 사실 보안부대에서 가장 싫어하고 귀찮은 존재가 필자였다고 후일담이 전해지기도 했다. 그것은 내가 철이 없었거나 아니면 간이 부어 세상 물정 모르고 까불었던 시절의 추억이다. 지금 같으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눈치나 보면서 살았을 텐데 말이다.

필자는 어느새 변했다. 죽어간 병사들의 시신을 만지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고 그래서 이 분단된 반도의 목사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며 목회에 대하여 스스로 접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분단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몸으로, 삶으로, 마음으로, 영혼으로 느껴야 했던 그 시절을 나는 잊고 있었다.

그때 죽은 병사들의 유골은 지금 없다. 어느 국립묘지 한 켠 혹은 내가 직접 묻어야했던 그 자살한 병사의 유골도 어디인지 찾지 못하고 잃어버렸다. 그리고 나도 그때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내 삶은 늙어갔으며 마음도 변해버린 듯 세상과 타협하고 말았다. 정의는 물론이고 보안부대가 그렇게 싫어하던 호기도 잃어버렸다.
어제는 그렇게 25년 만에 내 젊은 시절 군목처럼 멋진 한 후배 군목의 모습 속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그곳 양구 원당리 천봉교회와 그 땅에 묻힌 고통 속에서 죽어간 수많은 영혼들의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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