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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섬사람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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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늦지 않았다<유해근목사>

사람들은 늙음이 나이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많아지면 그만큼 늙어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나이는 언제나 민감하다. 어렸을 적에 나는 어떻게 하면 빨리 나이를 먹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었다.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었다. 그러다 서른이 넘고 마흔이 지나면서 조금씩 조바심이 생겨났다.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는지 나도 모르게 세월은 흘러갔고 해놓은 것 하나도 없이 시간만 지나가는 것 같아 나는 더욱 분주해지고 있었다. 그러다 오십이 지났다. 아직도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상태인데 왜 이리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시간에 매어 살아간다. 실든 좋든 우리는 언제나 시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시간은 내 나이를 규정하고 나이는 은퇴니 실버니 하면서 내 삶을 설명하는 조건이 되었다. 나이가 몇 살인지에 따라 우리는 자신의 삶의 한계를 설정한다. '지금 이 나이에 무슨 일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쓸모없는 인생으로 결정한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은 나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주입된 고정관념 때문이리라.

나이가 나를 규정하는 어처구니없는 삶을 우리는 반복한다. 나이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규정할 만큼 신뢰할만한 것인가 묻지도 않고 우리는 그렇게 속고 살아간다. 내 삶은 내 것임에도 우리는 나이에 발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진정한 삶의 내용은 없고 나이만 들먹이는 숫자적인 삶만 존재하는 것이다. 삶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나이만 먹고, 먹은 나이에 발목이 붙잡혀 아무런 일도 못하고 죽어간다.

코끼리 길들이기라는 말이 있다. 인도에서는 코끼리를 길들이는 방법으로 코끼리가 어렸을 적에 발목에 줄을 매어 말뚝에 붙잡아 놓는다. 작고 어린 코끼리가 무슨 힘이 있을까. 어린 코끼리는 말뚝에 매여 무력감에 빠져 살아가기 시작한다. 자신은 매우 힘이 없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새 코끼리는 어른이 되어간다. 덩치가 커지고 힘이 자랐지만 여전히 코끼리는 작은 동아줄 하나에 발목이 붙잡혀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힘이 센지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매몰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나이가 몇 살인가에 따라 길들여진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마치 코끼리 길들이기에 길들여진 코끼리와 흡사하다. 우리네 삶이 얼마나 의미있고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지를 깨닫지 못한 채 세상에서 말하는 숫자 나이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오직 세상이 입력해둔 나이라는 숫자에 속아 우리는 마지막 삶을 무력하고 무능한 인생인냥 포기해버린다. 은퇴라는 말로 우리 인생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불순종하라는 사단의 꼬임이다. 기독교인에게 은퇴는 없다. 죽는 날이 은퇴하는 날이다.

만약 지금과 같은 패러다임으로 성서를 본다면 우리는 성서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믿음 없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과 같다.
아브라함을 보라. 그는 자신의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이미 75세였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75세였더라"(창세기 12:4)

75세의 노인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 만약 그 부르심에 아브라함이 자신의 나이를 들먹이며 불순종하였다면 역사는 어디로 흘러갔을까? 오늘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는 유대인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말은 의미없는 가정인줄 알지만 그럼에도 만약 아브라함이 그의 나이에 한계를 설정하고 숫자 속에 자신을 가두어 버렸다면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존재할 수 없었다. 성서는 그의 나이가 75세였다고 분명히 기록해 놓았다. 후손들에게 그들 선조의 나이를 직시하라고 가르쳐 주시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75세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나이같은 것은 이유가 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을 때에 그의 나이는 80세였다고 출애굽기는 기록해 놓고 있다. 만약 그의 80세라는 나이가 문제가 되었다면 이스라엘은 여전히 애급에서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구원과 해방 같은 은총의 사건은 없었을 것이다.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80세였고 아론은 83세였더라"(출애굽기 7:6-7)
    
80세와 83세의 노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서 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숫자가 아니라 부르심과 순종을 보아야 한다. 그들에게 나이가 변명일 수는 있었지만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 앞에서는 큰 의미 없는 것이었다.
모세는 그 후로 40년을 더 쓰임 받아 120살에 은퇴하였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때가 언제든 늦지 않다. 우리가 늦었다고 자포자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중대한 죄임을 알아야 한다.

갈렙은 85세에도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하면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있다. 할 수 있음의 삶은 기적을 만들고 새로운 역사를 쓴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였던 갈렙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것들을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내 나이 40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45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85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여호수아 14:7-12)

우리도 갈렙처럼 살 수 있고, 할 수 있다. 아직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고 슬퍼할 것이 아니다. 이미 너무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포기할 일도 아니다. 여전히 할 수 있다는 믿음과 의지만 있다면 나이는 아무런 제약 조건이 될 수 없다. 갈렙의 고백과 의지는 오늘 우리 교회 와 은퇴라는 멍에를 뒤집어 쓴 기독교인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나이가 문제였다면 아브라함도, 모세와 아론도, 갈렙도 없었다. 세상은 그런 숫자의 사슬과 멍에로부터 자유한 사람들로 인하여 진보하는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 늦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퇴라는 말을 하나님 앞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은퇴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우리는 여전히 현역이며, 여전히 살아야 하고, 여전히 쓰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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