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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톡401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어느 인사의 유명한 말이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은 그대로 현실이 되어 그를 임명한 사람을 적으로 삼고 급기야 권력을 얻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은 듣기에 따라 옳은 말처럼 보인다. 강직하고 당찬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환상을 갖게 한다. 말이란 이런 거다. 말에 들어있는 의미나 한 인간의 삶을 바라보기 보다는 그 말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것을 해석하려는 경향 때문에 곧잘 말에 현혹되거나 그 말에 속아 넘어간다. 

그런 식이라면 베드로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를 배반함으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을 실천한 사람이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떤 상황에서 누가 한 것인가에 따라 전혀 다른 말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선교지에 선교사를 보내면서 나는 그런 경우를 여러 번 경험했다. 그 당시 몽골에 선교사를 파송한 것은 매우 의미 있고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선교였다. 199910월 나섬은 몽골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물론 그때에는 한국인 선교사를 파송했다. 199712월부터 시작된 외환위기로 몽골인 근로자들이 자국으로 돌아가면서 자신들을 위하여 몽골 현지에 교회와 목회자를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때만하여도 우리는 얼마나 가난하고 어려운 살림살이를 했는지!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그때를 기억한다. 한 달 살림살이도 빠듯하던 그때에 나섬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비를 보내기로 했다. 전도사를 목사로 그를 다시 선교사로 보내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려운 절차를 밟고 길을 찾아 결국 선교사를 보내고 몽골 울란바토르에 교회를 세웠다. 더 놀라운 것은 몽골정부로부터 최초로 정식교회로 인가를 받은 것이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몽골 선교의 새 역사를 쓴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울란바토르 시장이던 엥흐볼트 시장을 만나 울란바토르 중심가에 약 2,000평의 노른자위 땅을 교회 건축부지로 받았고 울란바토르 외곽에 영성훈련을 할 수 있는 부지를 받아 정식으로 준공허가를 받았다. 그곳은 울란바토르 시의 상수원지역이므로 건물 짓기에 불가능한 지역이었음에도 건물을 지었었다. 지속가능한 몽골선교를 위해 후원회도 조직하여 운영하였다. 정말이지 내 인생에 있어 그렇게 열정적으로 일을 한 적이 없을 정도로 헌신했다. 그런데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아 선교사로 파송된 이가 나섬을 배반하고 다른 곳에 줄을 섰다. 물론 그곳은 큰 교회였다. 선교비를 더 많이 지원해 주겠으니 자기들하고만 선교를 하자는 제안을 받고는 그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이런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하자니 자괴감이 들어 마음이 아프다. 결국 그 선교사는 나섬을 영영 떠났다.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은 인간에 대한 배신감이다. 나는 그때 너무도 힘이 들어 몸에 이상이 올 정도로 괴로웠다. 그 후 한국인 선교사 파송은 어떤 경우에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시간이 흘러 현지인을 공부시키고 그들을 역으로 선교사로 보내기까지 나섬은 또 다른 도전을 했으며 그것이 너무 소중한 사역임이 증명되어 감사하고 또 행복했다. 역파송 선교사를 보내는 날은 마치 잘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친정아버지의 심정이 되어 눈물이 나고 섭섭하여 한참을 울기도 했다. 오늘 이렇게 오래된 몽골 선교의 이야기를 굳이 다시 기억하는 것은 그런 일이 또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고 답답한지 모르겠다. 나는 또 배반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결국 사람이 그런 존재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한국인 선교사나 역파송 선교사나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겠다며 매몰차게 등을 돌린 어느 인사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 나를 괴롭힌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았으니 잘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돈과 권력에 충성하는 길을 선택했다. 사람이 아니라 돈과 권력이 더 중요했으리라. 약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는 충성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돈이 많은 강자에게 줄을 섰으니 그 변명이라도 듣고 싶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못하면 하나님에게도 충성하지 못한다.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고 사도요한은 말한다. 한번 배반한 사람은 두 번도 배반하고 자신을 품어준 이에게 등을 보인 사람은 반드시 또 다른 이에게도 등을 보인다. 그것이 인간사의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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