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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드19 시대에 우리는 (축복의물댄동산 기고)

어느 정도 가라앉을 것 같던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이 거꾸로 가고 있다.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물거품이 되었다. 모두가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이주민 목회만 30여년을 해온 내게 코로나는 더 큰 시련이다. 우리 안의 인도 형제 몇몇은 코로나 감염으로 여전히 격리중이며, 우리는 모든 모임을 온라인으로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조금 나아질까 했던 기대는 사라지고 오히려 이전보다 더 강력한 격리와 단절을 강행해야 하는 지경이 되었으니 한숨만 나온다.

코로나가 심해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믿는 자들이 신앙을 지키고 희망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에는 똑같은 조건에서도 다른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동일한 환경과 조건 속에 살고 있는듯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차별과 편견, 혐오 속에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이주민 나그네들이다. 백신 접종에서도 이주민들은 가장 소외되어 있다. 물론 그들 중 일부는 백신 접종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그 숫자는 매우 미미하다. 이주민 나그네도 인간으로서의 인권과 생존권 나아가 건강권에 대한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주민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 그들도 우리의 친구요, 이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듯하다.

우리 사회와 교회, 개인의 인간성에 대한 수준을 알아보는 방법 중 하나는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에 어떤 태도로 인간을 대하며 이웃을 바라보는가이다. 말로만 사랑을 외치고 말뿐인 인권과 이웃에 대한 배려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보편적이며 예외가 없어야 한다는 신앙적인 가치 앞에서만 진실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을 의심 받고 있다. 우리는 지나치게 이기적이었으며 매우 차별적인 사랑을 말해왔고 그 사랑마저도 의심받을 상황에 처해 있다. 이웃과 약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중적이며 모순덩어리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공통된 시각이며 우리 스스로의 성찰이다. 객관적 비판과 주관적인 성찰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져야 한다. 코로나의 절망적 상황은 우리의 민낯을 더 드러나게 하였다.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민 그리고 다문화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이주민 나그네들은 지금 코로나의 위기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양극화라는 말은 사회 경제적 언어이지만 그 말이 갖는 영역은 거의 모든 면에서 적용될 수 있다. 특히 코로나와 같은 위기와 고통은 이주민들을 비롯한 약자들에게는 더욱 심각하다. 그들은 매우 열악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 코로나는 그 소외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고통 받는 자들에 대한 연민과 동참 그리고 우리의 믿음과 실천적 사랑만이 우리를 코로나의 위기와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참 희망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 그리고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과 갈릴리 사람들은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았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모든 영역의 중심지였다. 아무리 그들이 로마의 압제 속에서 살았다고 하지만 그들은 자율적인 성전 예배와 경제공동체를 이루며 자신들만의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는 기득권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 선민이라는 의식은 그런 구별된 삶의 종교적인 방어막이 되어 주었다.

반대로 갈릴리 사람들은 모든 가난과 소외 그리고 질병의 고통 앞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들은 희망이 없었으며 사회적 안전망에서도 보호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병에 걸리면 그대로 죽어야 하는 마른 땅의 지렁이 같은 존재였다. 사마리아 여인 같은 이들은 더욱 심각했다. 그들은 여자이며 이방인이라는 두 가지의 딱지가 붙어있는 고립된 삶을 살았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던 그들은 삶 자체가 두려움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먼저 다가선 분이 예수시다. 예수의 삶에서 예루살렘과 갈릴리는 공간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분의 삶이 지향하는 방향과 그분이 추구하고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단서다.

예수의 삶과 사역의 대부분은 갈릴리에서 이루어졌다. 갈릴리는 가난과 질병과 소외와 고통의 땅이다.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완전 절망의 공간이다. 특히 갈릴리의 가버나움은 질병과 죽음의 대명사였다. 가버나움의 사람들은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서도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지옥의 삶을 살았다. 그곳에 예수께서 찾아가셨다. 그리고 희망의 대 역사를 이루셨다. 질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가상의 천국이 아니다. 믿는 자들의 사랑이 이웃에게 전달되고 그 사랑이 이웃의 소외와 고통을 치유하는 공동체를 이르는 말이다. 서로 사랑함으로만 세상은 구원될 수 있다. 무관심과 선입관, 이기심은 하나님 나라에서 용납될 수 없다.

내가 따르는 예수는 예루살렘의 거대한 성전에 머물러 있는 죽은 하나님이 아니다. 거룩함으로 포장하고 사람들을 차별하며 이방인과 가난한 이들을 혐오하는 그런 선민주의가 아니다. 내가 믿는 예수는 갈릴리의 가난하고 소외당한 이들의 친구로 오신 예수다. 병에 걸려 고통하고 신음하던 이들의 치유자요, 위로자로 찾아오신 예수다. 나는 갈릴리 예수의 삶을 믿는다.

지금 우리 교회가 가야 할 곳은 예루살렘의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성전이 아니라 맨땅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의 이웃이 있는 곳이다.

모두의 연대와 공동체성의 회복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고통 받는 자들에 대한 연민과 동참, 실천적 사랑의 온전함으로 우리는 코로나의 위기와 고난을 이길 수 있다.

 

나섬공동체 유해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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