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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목회와 칭키스칸의 경고


<정주목회와 칭키스칸의 경고>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 
마가복음9:2~8

나는 칭키스칸을 좋아한다. 적은 군대로 전 유럽과 아시아를 지배하고 통치했던 지도자였기 때문뿐 아니라 그에게서 느껴지는 특별한 삶의 철학 때문이다. 특히 그의 유명한 말 ‘성을 쌓는 자는 망한다. 다만 길을 내는 자는 흥할 것이다’라는 말은 내 삶과 목회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었기 때문이다. 끝없이 새로운 세상을 향한 도전의식 그리고 정복한 땅에 대한 미련을 접고 다시 출발하는 노마드적 삶의 모습은 너무도 감동적이다. 

어느새 우리 교회도 성을 쌓는 교회가 되었다. 지하실을 전전하며 외국인근로자들을 섬기고 선교하던 모습에서 한 곳에 정착하고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모습을 숨길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도 기득권을 즐기는 목회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변병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변명이 너무 구차하게 보일 것 같은 생각에 더 이상 말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 교회는 외국인근로자들과 몽골학교 아이들이 함께 쓰는 작은 교회다. 더 크게 지을 능력이 없어 다행스럽다. 이것만으로 더 이상의 죄(?)는 짓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어느새 정주 목회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나는 노마드적 목회를 하고 싶은데, 당장의 불편함 때문에 정주 목회로 안주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정주 목회가 나빠서가 아니라 내가 정주 목회자로 남는 것이 싫어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칭키스칸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 원조는 정주 목회를 배격한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의 사상 때문이다. 어째든 나는 정주 목회자로 남는 것이 싫다. 늘 새로온 목회영역과 비젼을 품고 살아가는 노마드적 나그네 목회자로 살고 싶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칭키스칸의 경고를 너무 안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든 경제든 그리고 종교 문화 영역이든 이 세상의 모든 부분에 칭키스칸의 이 경고는 예외없이 적중했다. 중국은 만리장성을 쌓고 자신들이 이룩한 왕국을 지키려했지만 그 성은 결코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실크로드에 수많은 소왕국들이 성을 쌓고 오아시스의 안락함을 누리려고 했지만 그들의 오아시스는 언제나 외적의 침입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물론 그들 실크로드의 왕국은 반주류의 소수자였기에 그들의 성은 최소한의  자구책이었을지 모르지만 어째든 성을 쌓고 지키는 기득권은 노마드들의 도전 앞에 추풍낙엽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 땅과 성의 주인은 그들 원주민이 아니라 언제나 도전하는 이들의 것이었다. 한무제와 칭키스칸 그리고 알렉산더의 것이었다. 그들의 성은 말을 타고 움직이고 도전하는 이들을 결코 막지 못했다. 역사와 문명은 노마드들에 의하여 발전하고 전파된다. 그런 면에서 복음은 분명히 노마드적 삶을 살았던 바울과 같은 이들이 아니었다면 결코 우리에게 오지 못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을 쌓고 안주하고 있었지만 안디옥 교회는 늘 노마드적 목회와 선교를 지원하고 동참하였다. 바나바와 바울은 그 안디옥 교회의 노마드적 선교를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칭키스칸이 오기 천년도 훨씬 전에 이미 칭키스칸의 경고를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들이다. 

성을 쌓듯 교회당을 지었던 중세교회는 모두 망했다. 중세의 교회가 분명히 화려하고 웅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안에 복음과 성도는 없다. 관광지의 기념품을 팔아먹고 사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 하긴 우리 한국 교회는 그런 상품도 팔아먹지 못할 만큼 반문화적으로 지어졌으니 그런 미래도 없을 것 같다. 

“이번에 우리 교회는 몇 백 억을 들여 수 천 명이 들어가는 교회를 지었어요.”
“대단합니다. 정말 축하합니다!”

망할 교회에 우리는 이렇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성을 쌓듯이 지어지는 교회를 보면서 칭키스칸의 경고가 갑자기 두려워진다. 정말 무너지는 굉음을 듣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정주 목회는 예루살렘 성을 쌓듯이 그렇게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념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자랑거리로 성공의 신화로 사람들에게 들려진다. 곳곳에서 부흥과 교회 건축을 간증하라며 설교요청이 급증한다. 교회성장 세미나와 교회건축 세미나의 단골 강사로 등극하는 순간, 그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하나님도 주님도 그 안에 없다.  

내가 아는 어느 선배 목사님은 그렇게 교회를 지었다. 강변에 엄청난 크기로 교회당을 지었다. 강변을 달리다보면 모든 목회자들은 그 교회를 부러워했다. 대단한 목사로 인정받는 자리에까지 오르는데 건물 하나면 충분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지금 파산하고 말았다. 성을 쌓는 교회가 그렇게 빨리 망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차츰 두려워졌다. 그러나 다시 잊어버리고 성을 쌓는 나 자신을 본다. 너무나 한심하게도...

한 곳에서 성을 쌓는 목회는 언제나 그 성을 지키는 일에만 골몰한다. 그리고 그 성을 지키기 위하여 엄청난 경비와 돈이 들어가야 한다. 그냥 건물 하나를 지키기 위하여 아니 투자한 원금을 지키기 위하여 교회는 다시 교인들을 불러 모으며 성을 쌓고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교를 한다. 

칭키스칸의 경고가 다시 들려오는 시대다. 한 곳에 안주하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주 목회는 성을 쌓는 교회다. 그리고 그 교회는 분명히 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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