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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노마드(Nomad)적 교회와 한국교회


바울의 노마드(Nomad)적 교회와 오늘날의 한국교회 

‘성을 쌓는자는 망한다. 그러나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 노마드 칭키스칸 다운 말이다. 그리고 그의 이 말은 영원한 진리인 듯하다. 내게 자꾸만 그의 이 예언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노마드 칭키스칸은 21세기의 디지털 시대를 예고한다. 그는 수평적 사고와 끊임없는 개척정신으로 새로운 문명과 영토를 전파, 확장하는 시대적 역할을 다한 사람이다. 속도와 비젼만 있을 뿐, 얻어진 제국은 언제나 남은 자들의 것이었다. 그는 기득권을 누리는 제왕이기 보다는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개척자이고 싶었다. 그는 기득권을 누리는 순간 곧 멸망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에게 점령된 땅과 제국은 잠시 머물다 떠날 정거장 같은 것이었다. 머무는 순간만이 칸이었을 뿐, 그는 언제나 점령과 동시에 또다시 떠날 준비를 하였다. 말을 달리고 쉼 없이 전쟁하고 점령하는 그러나 그가 지배한 땅은 다시 그 원주민의 것이었다. 다만 칸의 이름만 남겨놓을 뿐,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성을 쌓는 자는 망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에게는 길을 내는 사명만이 있었다. 

성(城)이 된 교회와 바울의 교회 
바울은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소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쉼 없이 선교하고 교회를 세웠다. 가는 곳마다 복음이 증거 되었고, 사람들이 모였다. 자연스레 교회가 생기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바울이 더 머물기를 원했다. 바울은 지도자였으며 설립자였다. 그러나 어디 하나 바울이 영원히 한 교회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성서에 없다. 아마도 에베소 교회에서 약 2년간 머물며 목회한 것을 빼고는 거의 머무는 목회는 없었다. 사람들이 붙잡고 그를 제왕처럼 모시려 했었을 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탁월한 카리스와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 남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는 충분히 대접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떠났다. 새로운 목회와 선교를 향하여 길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에게 교회는 남겨진 자들의 것이었다. 그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었다. 교회의 주인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쳤다. 그의 말은 그가 떠남으로 진실이었다. 목사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쳤다면, 목회자도 떠남으로 그 말이 진리인 것이다. 

바울은 노마드적 삶과 목회를 실천했다. 그는 철저히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와 목회자처럼 되기를 원했을 때도 그는 언제나 떠나는 노마드적 선교사로 살기를 머뭇거리지 않았다. 

성을 쌓는 목회자가 아니라 길을 내는 선교사로 살기로 한 것이다. 바울은 성을 지키는 목회가 아니라 길을 만드는 목회를 하고 싶었다. 그는 철저히 노마드적 목회와 선교를 실천하였다. 

노마드적 목회와 세습에 대하여 
노마드적 삶을 사는 자에게 세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칭키스칸의 제국이 멸망한 것은 성을 지키려는 세습의 올무에 빠졌기 때문이다. 칭키스칸의 말처럼 그의 후손들은 성을 쌓고 지키려했고, 그것을 다시 그의 아들들에게 넘겨주려했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성을 쌓고 그 성을 세습하려는 자는 3대를 가지 못한다. 반드시 그 성은 모래성으로 바뀔 것이다. 

성을 쌓는 목회, 그리고 그 성과 같은 교회를 세습하려는 인생에게는 잠시의 안락은 있을지 모르나 곧 멸망의 그림자를 밟게 될 것이다. 노마드적 목회에 성을 쌓고 그 성을 세습하려는 시도는 없다. 만약 그 노마드적 삶이 타락한다면 그는 곧 성을 쌓는 목회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는 곧바로 세습을 준비하고 그 세습은 잠시의 기쁨은 될지 모르지만 곧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것은 역사다. 

바울은 세습하였는가? 바울은 노마드적인 목회자였기에 떠남으로 잊어버리고 잊어버림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그가 만들고 세운 교회는 잠시 들러 쉬는 오아시스요, 거처하는 쉼터에 불과했다. 오며가며 들러 안부를 묻고는 떠나는 정거장이었다. 그것이 진리다. 

노마드 바울에게는 세습이 필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성을 쌓는 목회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길을 내는 목회자였기에 사람들이 성을 쌓고 그 성과 같은 교회를 세습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떠남으로 설교하고 복음을 증거한 사람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분명히 바울의 노마드적 교회는 아니다. 길을 내는 교회는 결코 아니며 오히려 성을 쌓고자하는 교회일 뿐이다. 그래서 길을 내는 목회자보다는 성을 쌓는 목회자가 성공의 기준이고 잣대였다. 얼마나 많이 모이고, 헌금이 얼마이며, 그리고 교회당과 주차장, 부속건물과 기도원이 얼마나 웅대한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새로움에 대한 도전보다는 있는 것에 대한 만족과 기득권에 대한 줄기찬 누림으로 가득했다. 그 성과 같은 교회는 세습의 대상이었다. 자식들에게 남겨주어야 할 첫 번째가 노마적 삶의 고백이 아니라 언제나 건물이며 땅이 된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노마드적 신앙생활을 가르쳤지만 정작 교회는 노마드적 신앙은 잊어버리고 남겨진 재산만이 신앙의 유산이라고 고백했다. 

노마드들은 세습하지 않는다. 노마드적 목회도 세습하지 않는다. 바울이 세습하지 않은 것처럼 결코 노마드들은 자식들에게 그런 썩어지고 멸망할 성은 세습하지 않는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거룩한 도성을 본 자들은 세상의 성을 세습하거나 욕심내지 않는다. 우리는 거룩한 도성에 이르기까지 노마드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바울의 노마드적 교회가 아니다. 성을 지키는 문지기들을 성도라고 부르지 말라. 성도들은 노마드다. 노마드만이 성도가 될 수 있다. 타락한 노마드들은 성을 쌓고 세습하지만 진정한 노마드는 길을 떠남으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노마드 바울은 자유했다. 그는 성을 쌓는 부자유함보다는 자유한 노마드가 되기를 선택했다. 천국은 자유한 노마드만이 들어갈 수 있다. 노마드들은 자유하다. 자유한 자! 그들에게 천국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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