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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가즈와 함께 떠난 인도 선교여행 5.펀잡 찬디갈에서 판가즈의 부모님을 만나다

     우리 일행은 벵갈로르 비행장에서 약 3시간 만에 찬디갈 비행장에 도착했다. 남인도에서 북인도로 우리의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사실 이번 인도 선교여행의 목적지는 찬디갈이다. 찬디갈은 판가즈의 고향이며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땅이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판가즈의 역파송 지역으로 찬디갈을 중심으로 하는 북인도를 유력지로 꼽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5년 판가즈를 데리고 찬디갈을 찾았을 때가 생각난다. 그 때 찬디갈을 방문한 첫 번째 이유는 판가즈를 신학공부를 시키는 일에 부모님을 설득하고, 불법체류로 인한 비자 거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두 번째는 지금 판가즈의 아내가 된 이혜정과의 결혼문제를 풀기 위한 것이었다.

두 가지 문제 모두 해결하기에 만만치 않은 어려운 숙제였다. 힌두교의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한 인도 청년을 기독교인으로 만들고 나아가 신학공부를 시키겠다고 무모하게 덤벼든 나는 대책 없는 사람이었으며 그런 나를 믿고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결단한 판가즈도 엄청난 도박을 한 셈이었다.

이혜정 전도사가 판가즈와의 결혼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 마음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무작정 결혼문제를 판가즈의 부모님께 승낙을 얻으려 했었다. 과연 이 대책 없는 무리들을 이끌고 찬디갈로 들어갔던 12년 전 나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더욱이 힌두교 브라만 계급의 인도 청년을 한국의 자매와 결혼을 시키겠다는 무식해서 용감한 목사의 도전은 그 부모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취었을까?

 

2005년의 그때와 지금의 내 모습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때와 그리 크게 바뀐 것이 없다. 물론 생각도 변한 것이 없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그때처럼 그렇게 판가즈의 찬디갈 집으로 찾아갔을 것이다.

신학을 공부시키겠다고 통보하듯 판가즈의 부모님께 말하였을 것이고, 이혜정과 결혼하는 문제는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으므로 부모님이 동의하는 것이 옳다고 설득 아닌 설명을 하려 했을 것이다.

그 당시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판가즈의 아버지는 조용하고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던 가장의 모습이었다. 내가 판가즈의 집에 머무는 내내 아침저녁마다 그 아버지가 직접 우리 모두의 음식을 준비했는데 요리 솜씨가 매우 탁월했었다.

반면 판가즈의 어머니는 매우 강인한 인상의 힌두 여인이었다. 처음 며칠 동안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으며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차갑고 냉정한 인도 여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얼마나 내가 보기 싫었을까? 아니 얼마나 미웠을까?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든 것도 기가 막힌데 이제는 신학교를 보내겠다고 겁도 없이 찾아온 한국인 목사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차갑고 매서운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나아가 한국 자매와 결혼을 시키자고 찾아온 나는 저주스러운 손님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왜 저렇게 사람이 차갑고 손님 대접이 이리도 소홀한지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그때를 생각하면 그것은 당연한 대접이었고 그보다 더 큰 낭패를 당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어머니는 나름대로 이성을 찾아 할 만큼 한 것이었다. 판가즈의 부모님이 품격있는 힌두교인이었으니 망정이지 막가는 사람들에게 그런 목적으로 찾아가 손님 대접하라는 식이었다면 나는 얻어맞아도 싸다.

 

교통체증으로 약속한 시간이 조금 지나 우리 일행은 찬디갈의 한 중국집에 도착했다. 마침 판가즈의 아버님이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웠다. 그의 묵직한 손을 맞잡고 포옹을 했다. 이 얼마만인가? 아들이 한국에서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에 그 아버지만 혼자 한국엘 왔었다. 그때에 나는 그와 함께 설악산에 갔었다. 설악산을 거쳐 동해를 돌아왔지만 그 아버지의 눈에는 별 감동이 없어 보였다. 그저 아들이 한국 여자와 결혼한다는 사실만으로 착찹하고 조금은 힘들어 하는 눈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에도 그는 묵묵히 미소만 지을 뿐 별 말이 없었다. 전통적인 힌두교 가문의 가장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우리로 말하면 양반의 모습 그대로랄까.

 

이내 뒤따라 들어온 판가즈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 차례로 포옹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예전에 그렇게 냉정하고 이성적이던 판가즈의 어머니가 우리 일행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판가즈의 여동생 애니도 만났다. 애니는 여전히 아름답고 예쁘다. 목소리도 여전히 은쟁반에 옥 구술이 굴러가는 소리다. 나를 기억하느냐 물으니 웃으며 당연하다고 한다. 그렇다! 판가즈의 가족 모두 당연히 나를 기억할 것이다.

자기 아들을 빼앗아 간 나쁜 사람을 왜 기억하지 못할까? 나는 앞으로 일 년에 한번은 꼭 인도에 올 것이라 말했다. 그러자 그 아버지가 대답한다. 그때는 꼭 자기네 집에서 묵으라고, 맛있는 인도 음식도 해주겠다고 말이다.

이렇게 또 새로운 만남과 삶을 살아가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 철저한 힌두교 가정을 어떻게 보통의 삶이 만날 수 있을까? 한국인 목사로서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것은 특별한 은총이다. 나는 우연한 만남을 필연의 삶으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말해왔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선교도 하나님 나라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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