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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가즈와 함께 떠난 인도 선교여행 1.인도는 우리를 부르지 않았다

      2018123, 아침 일찍 인도로 가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났다. 전날 밤 일찍 잠을 자지 않았음에도 새벽 두시 반에 눈이 떠졌다. 왠지 모를 걱정과 두려움이 있었다. 지금까지 선교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이번처럼 힘들고 부담스러운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인도라는 나라를 막상 가려하니 인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인도에 아는 선교사도 없고 인도에 대하여 아는 지식이나 정보도 많지 않다. 실제로 인도로 가는 길은 잘 열리지 않았다. 십여 년 전 판가즈가 신학교에 가기 전 그의 고향집을 방문한 것이 유일하며 인도에 대하여 공부할 여유도 없었음으로 나는 정말 인도를 잘 모른다. 그런데 인도에 가고 싶다. 그 모든 것은 판가즈 때문이다. 나섬에 판가즈가 있으므로 나는 인도를 알게 되었다.

 

인도는 기독교 선교가 가장 먼저 시작된 나라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사건 이후 도마 사도가 인도로 갔다. 도마는 누구인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직접 손으로 만져보아야 믿겠다고 했던 예수님의 제자다. 나는 얼마 전 이집트의 어느 시골 농부가 1945년 언젠가 발견했다는 도마복음서를 읽었다. 도마복음서는 주후 90년 즈음 쓰여진 것인데 대체로 영지주의의 문서로 보고 있다. 영지주의는 초대교회 당시 이단 중 하나로 취급되었으나 내가 읽어본 도마복음서에서 그런 냄새를 맡기란 어려운 것이었으니 내 공부가 부족한 탓이었으리라. 그러나 어찌되었건 도마라는 제자의 이름이 붙은 복음서였으니 관심을 가질 만한 것도 사실이다.

도마 사도에 의한 인도 선교의 시작으로부터 전설적인 선교사 윌리엄 캐리에 이르기까지 인도 선교역사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긴 하지만 사실 나는 솔직히 인도를 모른다. 인도선교학교를 시작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인도를 알고 가야 인도를 볼 수 있기에 인도 공부를 하자는 취지로 만든 것이 인도학교다.

인도학교는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인도에 대하여 선교사님들로부터 직접 생생한 체험적 이야기를 들은 것은 큰 수확이었다.

인도로 가는 길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혼자 가는 인도여행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므로 감히 홀로 가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인도를 가자니 인도라는 땅은 또 얼마나 광대한가? 13억이 넘는 인구와 한반도의 15배나 되는 넓은 땅,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와 역사, 그리고 그 땅의 33천만 개의 신들까지 인도는 두렵기까지 하다. 마치 가나안을 정탐하기 위하여 들어갔던 가데스 바네아의 12정탐꾼들의 보고처럼 두려운 거인들의 땅처럼 느껴진다.

거기에다 비자를 받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들던지! 10만원이 넘는 비자비용은 정말 기겁할 노릇이다. 세계 어느 곳에 그렇게 비자비용을 비싸게 받는 나라가 있는가! 그런 나라는 세계에 없다. 한마디로 자기 나라에 오지 말라는 것이다. 결코 쉽게 들어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오지 말라는데 굳이 가겠다고 하는 것도 우습다. 그곳에 무엇이 있기에 나는 인도를 가려 하는가를 여러 번 되물었다. 분명히 쉽지 않은 여행이 될 것임을 예감하였다. 그곳의 먹는 것도, 그곳 사람들에 대하여도 실망할 것이다. 인도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인도여행기를 읽어보면 대체로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나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한 번 인도를 방문한 사람이 다시는 인도에 가지 않겠다고 하지만 나중에 또다시 가는 나라가 인도라며 인도를 소개한 글들도 읽어 보았던 터다. 그러나 그런 인도를 왜 가려하는가?

이번 인도 선교여행에 최종적으로 출발한 인원은 31명이었다. 38명이 신청했지만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31명이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떠나기 전날에는 독감으로 도저히 참여할 수 없다며 두 명이 포기하기도 했다. 그만큼 출발부터 힘들었다.

인도에 가면 또 어떤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두려운 마음으로 새벽같이 일어나니 기도가 절로 나온다. 연로 하신 분들이 여럿인지라 그것도 또한 걱정거리다. 아무 사고 없이 돌아올 수만 있어도 감사할 것이다. 영적으로 강하게 눌려있는 나라이니 그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무튼 기도가 많이 필요한 여행길이었다.

우리를 태운 대한항공 비행기는 9시간을 비행하여 마침내 인도에 도착하였다.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이 있는 델리다. 델리의 공기 오염은 상상을 불허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공기가 나쁜 도시가 델리라고 한다. 중국의 베이징보다도 더 심각한 상황이란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델리에 내렸을 때 그런 정도는 아니었다. 인도의 출입국관리소는 얼마나 엄격한지 한 사람을 놓고 오랫동안 출입국 검사를 한다. 얼굴 사진은 물론이고 손가락 지문까지 찍는다. 일행이 많아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서야 공항 대합실로 나올 수 있었다. 12년 전 처음 판가즈를 데리고 그의 고향집을 찾았을 때의 델리공항이 아니다. 굉장히 많이 발전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공항을 나오자마자 온통 거지소굴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너무도 달랐다. 깨끗하고 잘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마중 나온 정연수 선교사님은 구면이다. 그가 영락교회 선교부 목사로 있을 그때에 이미 만난 사이다. 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그도 나를 알고 나도 그를 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우리 일행은 첫날 델리에서의 밤을 맞았다. 델리시내에서 가볍게 중국음식으로 저녁을 먹고 들어간 호텔은 공항 인근의 허름한 곳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첸나이로 떠나야했으므로 불가불 공항 가까운 곳에 숙소를 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들어간 그 호텔은 한국에서도 정말 오래전에나 있었을법한 그런 호텔이다. 방으로 들어가니 화장실도 낡았고, 따뜻한 물도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춥기는 왜 그렇게 춥던지 대충 씻고 그대로 잠을 청해야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내려가니 모두가 잘 잤다고 말은 하지만 표정들이 묘하다. 잠자리가 불편했음이 확실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일행 모두는 성숙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인도 선교여행을 오기 전에 몇 번의 준비모임을 할 때마다 나는 이번 인도 선교여행은 세상 사람들이 다니는 그런 여행이 아니라고 강조했었다. 우리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여행이 아니라 느끼고 배우고 고백하는 선교여행을 할 것이라고 각오하고 왔으니 누가 그 불편하고 누추함에 대하여 불평할 것인가? 아무도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델리에서 첸나이까지는 한국에서 몽골까지 가는 거리의 비행을 해야 한다. 3시간이 걸리는 비행이어서인지 국내선임에도 식사를 제공하였다. 생각보다 청결하고 괜찮은 서비스다. 첸나이 공항은 매우 깨끗하고 첫 느낌이 좋았다. 날씨도 얼마나 따뜻하고 좋던지!

첸나이 한인교회의 이면재 선교사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만남이지만 무척이나 살갑고 친근한 후배 목사다. 첸나이에는 현대자동차 등 한국기업이 많이 진출하여 있음으로 한국인 직원들이 많이 상주하고 있다고 한다. 첸나이 한인교회는 김영자 선교사님이 1982년인가 인도 최초의 한인교회로 설립한 곳이라고 한다. 김영자 선교사님은 이번 일정 중 크리쉬나기리에서 우리가 곧 만날 선교사님이며 한국에서도 이미 알고 뵈었던 분인지라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우리 일행은 선교사님의 안내로 도마 사도의 순교지와 무덤 그리고 그가 숨어 지내던 동굴 등을 돌아보았다. 느낌이 참 좋았다. 로마의 바티칸에 있는 성베드로 성당과 스페인의 성야고보 성당 그리고 첸나이의 성도마 성당이 세계 3대 성당이라고 한다.

 

2000년 전에 도마 사도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하고 처음 찾아왔다는 인도의 첸나이다. 이곳에서 인도선교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2000년이 지난 지금 인도 선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품고 이곳에 왔다. 인도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을지라도 우리는 비전을 품고 인도를 기꺼이 찾아온 것이다.

 

점심 식사는 한국 식당에서 맛있게 먹었다. 모두가 만족스러운 표정들이다. 냉면이 그중 압권이었다. 다음에도 냉면 먹으러 첸나이로 와야겠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점심식사를 하고는 일행 대부분이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집중력도 없고 모두가 지쳐있는 것 같았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까닭이다. 전날도 한국에서 인도를 간다고 잠을 설치고 출발하였을 텐데 첫날부터 추위에 떨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 힘이 들만도 하다. 작은 아들 영길이는 무엇을 잘못 먹었는지 밤사이 토하고 배탈이나 까부라져 있었다.

이럴 때는 무조건 빨리 호텔로 가야한다. 이내 우리가 도착한 호텔은 어젯밤과 비교하여 최상급처럼 느껴지는 호텔이다. 모두가 만족스러운 표정들이었다. 우리는 일단 들어가 샤워를 하고 만나 저녁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저녁대신 쉬겠다는 9명을 제외한 나머지 22명만 호텔 근처 인도식당엘 갔다. 인도식당은 내게 매력적인 느낌을 준다.

나는 사실 선교사 식성이 아니다. 먹는 것에 낯가림이 심하고 일단 먹어보지 않은 것은 내안에서 경계하고 의심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선교여행을 많이 가지만 가장 힘든 것이 먹는 문제다. 그러나 인도는 다르다.

12년 전 인도에 처음 왔을 때 판가즈의 집에서 일주일을 체류했었다. 그때에도 나는 라면과 고추장 등 한국 밑반찬을 가지고 왔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도 카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인도음식이라면 대충 카레를 연상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한국에서 먹던 카레와 인도의 커리가 무엇이 다를까 싶은 생각에 인도음식도 별로 맛이 없을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판가즈의 집에서 일주일을 머무는 동안 나는 완전히 인도 음식에 감동하고 말았다. 판가즈의 아버님이 얼마나 요리를 잘하시던지 매일 인도 음식을 먹는데 그렇게나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인도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음식이 맛있으면 그 나라가 좋아지는 이치다.

여행에서 가장 결정적인 인상과 느낌을 주는 것은 뭐니 뭐니해도 음식이다. 일단 음식이 좋으면 다 좋아진다. 먹는 음식이 맛이 있고 매력적이면 그 여행지는 무조건 기억에 남는다. 한번가고 두 번가도 괜찮은 곳이 되는 것이다. 먹는 것이 주는 감동은 인간의 기억장치 깊은 곳에 저장되는 듯하다.

몽골을 그렇게나 많이 다녀도 나는 몽골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상한 편견이다. 그렇다고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도 아니면서 몽골의 음식에는 왜 그렇게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일까?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먹고 싶지 않은 것은 먹지 않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대답할 말이 없다. 내 뇌에서 나에게 그렇게 지시하니 말이다. 그러나 인도는 다르다. 인도 음식에는 무언가 중독성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도 그렇다. 인도 사람들은 만나면 만날수록 진한 여운이 있다.

 

크리쉬나기리로 가는 길은 멀었다. 내가 굳이 인도 남부지역을 가려고 했던 첫 번째 이유는 크리쉬나기리에 있는 김영자 선교사님의 사역지를 돌아보기 위함이다. 첸나이에서 크리쉬나기리까지의 거리는 약 250km. 그러나 정작 그 거리와 관계없이 걸리는 시간은 하루 종일이다. 교통 채증이 문재다. 인도의 교통은 심각한 정도 이상이었다. 우리가 가는 길목에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었다. 다스(DAS)라는 상호가 붙은 옷을 입고 다니는 인도 사람도 보았다.

다스는 요즘 우리나라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뉴스거리가 되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시트를 만드는 회사다. 인도의 다스는 매우 돈을 잘 벌어들이는 회사라고 한다.

우리는 저녁 시간에 맞추어 크리쉬나기리에 도착했다. 인도에서 우리들만의 소중한 교제의 시간도 크리쉬나기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이루어졌다. 돌아가며 서로를 소개하고 인사를 하고 좀 더 깊이 사귀어 가는 시간들이다.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의미 있는 기회다. 그러나 나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아침부터 몸이 찌뿌둥하더니 오후가 되자 점점 아프기 시작한다.

인도에 오자마자 영길이가 탈이 나 헤매고 있는데 이어서 아내가 속이 좋지 않다며 먹는 것을 꺼리기 시작한다. 아내의 식성은 내가 잘 안다. 그녀는 선교지 어느 곳에서나 잘 적응하는 선교사 체질임에도 이번 여행에는 힘들어 하는 것이 역력하다. 그러더니 내게 이상한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밥도 싫고 눕고만 싶다. 온몸의 삭신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열도 나는 것 같아 불안하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아직 갈 길이 멀고 남은 스케줄이 창창하다. 내가 쓰러지면 안 되는데 말이다.

 

크리쉬나기리는 인구 30만 명의 작은 시골이다. 얼마쯤 나가면 인도양이 앞에 있고 전형적인 인도의 냄새가 나는 그런 도시다. 우리는 작은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아서인지 화장실도 손볼 곳이 많고, 어이없게도 휴지를 찾아볼 수가 없다. 뒤를 보고도 휴지를 쓰지 않는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지만 정작 우리가 묵은 호텔에 휴지가 없는 거다. 아내도 나도 당황하고 웃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뒤 처리를 하였는지 물어 보아야겠다.

 

크리쉬나기리에서는 김영자 선교사님과 동생 되시는 김유찬 선교사님이 우리를 반겨 주셨다. 한국 최초의 인도 선교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김영자 선교사님은 매우 노련한 분이다. 연세가 많이 드셨음에도 여전히 젊은 선교사 몇 사람을 능히 제압할 것 같은 카리스마가 있다.

우리 일행이 남인도를 찾아온 이유가 바로 김영자 선교사님을 만나기 위한 것이니 반갑고 기대가 된다. 나의 기억에 전설적인 인도 선교사로 남아있는 이 분과의 만남은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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