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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몽골8 외국인학교 인가 이후의 변화 (1)

8.몽골 외국인학교 인가 이후의 변화

 

시편 118:4-6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몽골 학생들이 몰려오다

 

20052월 재한몽골학교가 정식 외국인학교로 서울시 교육청으로부터 인가를 받자, 곧이어 몽골 교육부로부터도 인가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외국인학교 중 몽골학교는 유일하게 이주노동자 자녀학교로 인가를 받은 첫 번째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화와 다문화 시대의 문이 열리는 전환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큰 의미를 남기는 것이었으니 우리로서는 큰 감격이 아닐 수 없다.

내 아내 이강애는 인가받기 전인 2004년부터 몽골학교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다. 사실 이강애 교장에 대하여는 할 말이 많다. 아내는 지극히 평범한 여자다. 아마 나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느 중학교 교사로 지극히 평범한 인생에 별 탈 없는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만큼 변화가 없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크게 요동치는 성격도 아니고 야망(?)을 가진 여자도 아니다.

작은 기쁨 하나로라도 그저 감사하며 살았을 그런 여자다. 나 또한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못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와 내 아내의 만남은 예사로운 만남이 아니다. 나 같은 목사하고 살아야 하는 아내의 운명을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당사자인 나와 아내만이 아는 비밀이기도하다.

내가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19867월이다. 그때 나는 장신대 신대원 3학년이었고 아내는 공주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임용된 중학교 역사 선생이었다. 아내는 강화도 외포리에서도 서 너 시간을 배타고 들어가야 하는 주문도라는 섬마을 선생이었다. 작고 귀여워 보이는 이 여자에게서 오늘의 나를 상상한다는 것은 사실 무리다. 우리가 결혼한 것은 19871017일이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결혼 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그것은 먼저 나의 불성실함과 끝없는 방황 때문이다.

예전엔 코스모스 같았던 여자가 질경이가 되었다고 놀리며 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아내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나를 무서워했다. 내가 큰소리한번 치면 아내는 눈물만 뚝뚝 흘리며 울었고, 아무 소리도 못하는 그저 벙어리 같은 삶을 살았다. 한 번은 아내가 고백하기를 어느 날인가 도망치고 싶었다 한다. 그런데 이미 낳아놓은 두 아들을 보니 그럴 수 없었다 한다. 만약 그때에 아내가 나에게서 도망했더라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아내의 삶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상상해 본다. 우리는 요즘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곤 한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 아내의 원망이 섞여 있으니 모든 것은 내 책임이며 불성실함의 결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유독 방황을 많이 했다. 아내의 마음고생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군목시절부터 구로공단에서 내 몸과 마음, 그리고 눈에 치명적인 상처를 받아 더욱 방황을 하였다.

아내는 그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교사생활을 했다. 그러나 어찌 운명이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을 것인가? 아내는 사표를 제출하고 말았다. 사실 내가 유학을 떠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우리 작은 놈 영길이의 지적장애 판정이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돌아보면 가장 큰 이유는 나와의 새로운 사역을 위함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이제는 고백한다.

우리 학교가 외국인 학교 인가를 위한 도전을 시작했을 때에 있었던 사역자들은 모두 학교를 떠났다. 아마도 많이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하고 같이 사역을 한다는 것이 사실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나의 성격과도 관계가 있다. 나는 어떤 목적을 정하면 그대로 밀고 나가는 특징이 있다.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 않을뿐더러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잠도 안자고 먹지도 않고 일하는 그런 워크홀릭적 기질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을 고치는 것에 대하여는 언제나 부정적이다.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기질이며 은사려니 하고 살기 때문이다. 만약 나의 그런 기질과 성격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섬과 몽골학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는 아무도 오지 않는 몽골학교의 책임자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로서는 월급도 제대로 줄 수 없는 무인가 학교이며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그야말로 대안 없는 대안학교에 누가 와서 헌신을 한단 말인가? 아무리 찾아도 몽골학교에서 일할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아내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그렇다면 자기가 와서 조금이나마 돕겠다한다. 정말 그럴 수 있겠느냐 하니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하지 않으니 할 수 없지 않느냐며 학교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아내의 몽골학교 사역은 정말 은혜 그 자체다. 아내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몽골학교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는 대단히 침착하고 꼼꼼하며 완벽하게 일을 하는 사람이다. 나하고는 정말 제대로 맞는 궁합이다.

2004년 한참 외국인학교 인가를 받기 위하여 정신없이 일하던 그때에 아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많이 하였다. 그녀의 교사로서의 경험과 완벽주의적인 일처리 등은 큰 도움이 되었다. 아내의 헌신과 도움이 있어서일까 우리는 드디어 외국인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아내는 정말 좋아했다. 물론 나는 말로 다하지 못할 만큼 감사했다. 일단 우리 학교가 외국인학교로 인가를 받자 많은 몽골 아이들이 학교를 찾아왔다. 왜냐하면 몽골에서 정식 교사들을 초청해 몽골어와 몽골 역사 등 몽골과 관계된 기본적인 커리큘럼에서부터 한국어와 영어 등 세계화 교육까지 하는 학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몽골 학생들에게 내가 가장 강조하는 대목은 너희들은 몽골 사람이다라는 말이다. 몽골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간혹 실패하거나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몽골인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특히 자녀들을 교육시키면서 한국 사람들을 모방하여 아이들의 이름도 한국 이름으로 바꾸고, 한국학교에 보내 몽골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가 만난 몽골인 중 어떤 사람은 아이를 유치원에서부터 한국 유치원으로 보내, 아이의 이름도 한국이름으로 개명하고 마치 한국 아이처럼 교육을 시킨 경우도 있었다. 그 아이가 5학년쯤 되었을 때에 부모가 몽골로 돌아가려 하였지만 그 아이는 몽골에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자신은 지금 몽골말도 모르고, 한국 이름을 갖고 있으니 한국에 남아있겠다고 오히려 부모를 설득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때서야 부모는 아이를 잘못 교육시켰다는 사실 앞에서 딜레마에 빠졌다. 아이는 스스로 한국 아이가 되었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제야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우리 학교에 찾아왔다. 아이를 데리고 몽골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이가 가지 않겠다고, 자신은 한국인으로 살겠다고 하니 어쩌면 좋겠냐고 하소연을 한다. 우리 학교의 선생님들이 과연 그 아이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기 위해 테스트를 하였다. 아이는 한국어는 유창하지만 한국어를 쓰거나 읽는 것에는 매우 낮은 수준이었으며, 몽골어의 경우 알파벳도 잘 모르는 수준이하의 상태였다. 몽골 아이도, 한국 아이도 아닌 정말 정체성이 모호한 뿌리 없는 아이로 자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경우 몽골 사람들은 크게 후회 하게 된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는 외국인들에게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주는 나라가 아니다. 즉 다민족 사회가 아니다. 이주민들이 들어와 살기에는 아직은 매우 척박한 나라다. 미국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민을 가는 경우는 미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영어를 배우고 아이들을 미국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이 옳다. 그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니까. 그러나 우리나라는 미국과 다르다. 우리나라는 외국인들이 영주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한시적으로 일하고 돈을 벌다가 돌아가야 하는 것이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생각인 것이다. 아이들이 한국사회 속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한국어를 잘하면 마치 성공한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아이들은 몽골사람이라는 자기 정체성 위에 세계화 교육을 받을 때에 그들 나라로 돌아가 리더가 될 가능성이 있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체성 교육이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하고 그 답을 찾는 것이 정체성이다. 몽골 사람들에게 나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뿐만아니라 우리 학교 아이들에게도 시간이 있을 때마다 '너희들은 몽골 사람'임을 강조한다. 무조건 한국말을 잘하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몽골 사람으로서 한국어를 잘해야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도 한국인으로서 영어를 잘해야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 미국에 살면서 영어를 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고용하게 된다면 그들은 한국인이면서 동시에 영어를 잘하는 세계인을 찾게 될 것이다. 자기 정체성이 확실하고 그 위에 한국에 대한 이해가 높고, 세계화 교육으로 잘 준비된 사람만이 미래가 있는 것이다. 몽골 아이들이 한국말을 잘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아이들을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이 몽골 아이로 제대로 자라나 한국화 되었을 때에 그 아이에게 미래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먼저 우리 학교가 몽골교육을 철저히 시키면서 동시에 한국어와 영어 그리고 컴퓨터와 정보화 기술까지 제대로 교육시키는 학교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기독교교육은 필수다. 만약 나의 그런 생각이 제대로 우리학교에서 반영된다면 몽골의 미래는 물론이고 몽골 선교의 미래는 우리 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확신했다. 그것은 중요한 조건이다.

처음부터 나의 이런 생각들이 강조되면서, 그리고 외국인 학교로 인가를 받으면서 급속도로 우리 학교에 입학하겠다는 아이들이 늘기 시작하였다. 작은 나섬공동체 건물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공부할 교실이 부족할 정도였다. 하는 수없이 컨테이너를 가져다 놓을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열악한 학교였다. 겨울에는 추워서 벌벌 떨며 공부를 했다. 여름이면 더워 견딜 수 없을 만큼 힘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행복해 보였다. 골목이 운동장인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잘 자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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