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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몽골6 김건철 장로님과 몽골선교 & 이정일 목사님을 추모함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몽골문화원을 개원하였지만 문화원이 제자리를 잡아가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먼저는 몽골문화원을 사단법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곳곳에 장애물이 있어 난감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외교통상부에서 몽골문화원 법인화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 외교부의 사단법인을 승인해 주는 부서의 책임자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끝까지 반대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한다. 그가 세운 논리는 문화원은 자국의 이익과 문화를 소개하기 위하여 그들 스스로 만드는 것이지 한국인이 몽골국의 문화원을 설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문화원이거나 독일, 프랑스, 일본 같은 문화원이 한국인이 세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몽골문화원 설립은 결코 승인해 줄 수 없다고 했다. 만약 몽골문화원을 세우려면 몽골인 스스로 세워야한다고 했다. 그러나 몽골은 이미 기울어진 나라다. 제국이 아니라는 말이다. 유목문화를 모르는 우리나라에 유목과 몽골을 알리도록 몽골정부로부터 양해각서를 받아 서울시와 울란바타르시가 함께 힘을 모아 세우는 것이니 문제가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정말 힘든 상황이었다.

아프리카 문화원이나 중남미 문화원 같은 곳도 한국인이 세우지 않았느냐고 말해보았지만 그곳은 우리와 사정이 다르다며 그는 끝까지 우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끝내 나는 그와 크게 말다툼을 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일간지 신문기자 한 사람이 우리 공동체를 찾아와 나와 대화를 나누던 중 내가 몽골문화원 설립이야기를 들려주며 외교통상부에서 사단법인을 만드는 일에 협조하지 않아 매우 힘이 든다고 하니 그 이야기를 곧바로 기사화하여 신문에 내보낸 것이 아닌가? 신문에 몽골문화원에 관한 이야기가 실리자 외교부에서 즉시 연락이 왔다. 당장 만나자는 것이었다. 외교부로 찾아가니 신문에 기사가 나온 후 곧이어 청와대로부터 연락이 와 빨리 그 문제를 해결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했다. 나는 신문 기사 한 줄의 힘이 이렇게 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담당 국장을 만나니 내게 하는 말이 담당 과장과 화해하고 문제를 해결하자고 한다.

내가 먼저 담당 과장에서 화를 낸 것에 대하여 사과를 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문화원의 법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때에 협의된 내용인즉, 서울시가 문화원을 설립하는데 드는 재정을 담당하고 울란바토르시가 몽골관련 자료와 전시물을 기증하기로 하였다. 대신 문화원의 이름을 ()몽골울란바타르문화진흥원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우리 몽골문화원이다.

문화원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문화원의 컨텐츠를 만드는 것이다. 어떤 문화적 내용을 담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그때부터 몽골을 알리는 방법을 연구하고 찾았다. 먼저는 몽골어학당을 만들어 몽골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몽골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지금까지도 몽골문화원에서 하는 프로그램 중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프로그램이 바로 몽골어학당이다. 많은 이들이 몽골어학당에서 몽골어를 배웠다. 특히 몽골에 선교를 하려고 준비하는 선교사들에게 몽골어학당은 큰 도움을 주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역은 바로 나담축제를 여는 것이다. ‘한국나담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나담축제는 지금까지도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나담이라는 말은 바로 축제라는 말과 동의어다. 몽골의 독립기념일인 7월 둘째주일이면 어김없이 한국나담을 우리 문화원에서 개최한다. 우리나라에 찾아온 약 5만 명의 몽골 이주민들을 위한 위로와 축제의 잔치가 한국나담의 목적이다. 원래 나담축제에서는 활쏘기, 말타기 그리고 몽골씨름 등 세 가지 경기를 해야 하는데 몽골초원이 아닌 학교 운동장에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할 수 없어 주 경기는 몽골 씨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매년 7월이면 몽골사람들이 언제 한국나담을 하느냐고 물어 오곤 한다. 우리의 나담축제에 많게는 약 오천 명의 몽골인들이 모여 축제를 벌이는데 그런 날은 우리 공동체가 위치한 광장동이 마치 몽골이 아닌가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나담 행사가 있는 날이면 행사를 주최한 우리 공동체의 식구들은 거의 초죽음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인근의 광장초등학교 운동장을 빌려 행사를 하면 운동장에 몽골인들이 가득하여 정말 콩나물시루 같은 느낌을 준다. 그 무더운 여름날에 사람들에 치여 하루를 보내고 나면 더 이상 이 행사를 하고 싶지 않을 만큼 힘이 든다. 그러나 그 어떤 어려움보다도 가장 큰 어려움은 재정적인 문제다. 당장 누군가 후원하지 않으면 조금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사역이다. 문화원의 이름을 걸었지만 어디서도 재정적 후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서울시는 건물의 임대료를, 울란바토르에서는 문화원 전시자료 등을 지원해주었지만 당장 인건비도 행정비도 없이 문화원을 운영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중한 분들을 보내주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협력할 이들을 보내 주심을 믿어야 한다.

 

오늘까지 우리의 몽골사역을 비롯하여 다양한 국적의 이주민 사역을 가능하게 한 원천은 돕는 이들이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나섬의 사역을 위하여 수많은 이들을 후원자와 중보자로 보내주셨다. 몽골문화원 설립을 이야기하면서 김건철 장로님과 이정일 목사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몽골 사역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 가장 앞장서서 격려와 사랑을 아끼지 않은 분들이며 지금까지도 아버지처럼 때로는 인생의 대부처럼 나와 나섬을 위하여 힘을 보태주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김건철 장로님과 이정일 목사님은 마치 광야의 길 위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백성들에게 목적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던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분들이다. 나는 가데스바네아의 정탐꾼 이야기 속 주인공이었던 여호수아와 갈렙의 모습이 두 분의 삶과 인생의 여정 속에 깃들여져 있음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돈은 이렇게 쓰는 거다'라는 진리를 가르쳐 주신 분은 김건철 장로님이다. 나섬과 재한몽골학교, 몽골문화원이 오늘 이렇게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된 배경에는 김건철 장로님이 계시다. 내가 장로님을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임을 감히 고백한다. 김 장로님은 우리 교단은 물론이고 한국교회의 보배 같은 분이시다. 장로님의 삶속에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와 그 의에 대한 순종의 모습이 깃들여져 있다.

장로님은 몽골문화원 초기부터 우리 사역에 참여하시어 오랫동안 몽골문화원의 이사장을 맡아 주셨다. 2001년 가을, 우리 몽골문화원은 외교통상부 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고 곧이어 장로님을 이사장으로 모시게 되었다. 장로님은 선교와 구제 그리고 새로운 영역에 대한 사역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셨다. 연세가 많으셨지만 젊은이들 못지않은 도전적인 인생을 사신 분이었다. 장로님의 협조는 초기 문화원이 자리를 잡아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에 이정일 목사님의 도움도 잊을 수 없다. 이 목사님은 나의 모교회인 광장교회의 원로목사님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도움을 많이 받은 분이기도하다. 언제나 아버지 같은 사랑으로 나와 나섬을 돕는 분이니 결코 잊을 수 없는 어른이시다.

 

김 장로님은 나중에 몽골과 한국의 관계 개선에 중요한 역할을 하신 것에 대하여 몽골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게 된다. 2007년 엥흐바야르 대통령이 방한하였을 때에 나와 함께 롯데호텔에서 훈장을 받으셨다. 뿐만아니라 몽골 국립교육대학에서 명예교육학 박사를 받으시기도 했으니 하나님은 장로님의 헌신에 대하여 그만큼 축복해 주시기도 한 것이리라.

내가 장로님을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장로님의 나눔의 실천 때문이다. 장로님은 진정한 부자시다. 물론 경제적으로 부자시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장로님의 나눔의 실천이다. 돈이 많은 사람은 우리나라에 많다. 한국교회에도 부자는 많다. 그러나 장로님만큼 그 부를 사용할 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장로님은 언제나 긍정적이시며 흔쾌히 자신의 것을 내줄 수 있는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사신 분이다. 자그마한 체구를 갖고 계시지만 장로님에게서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는 범상함과 거인의 풍모가 느껴진다. 지금은 장로님이 문화원의 이사장직을 내려놓으셨지만 우리는 장로님을 영원한 이사장으로 모시려한다. 얼마 전 장로님에게 전화를 드렸더니 이제는 많이 연로하시어 거의 밖에 나가시지 않는다 하신다. 장로님을 위하여 기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장로님을 붙잡아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조금 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쓰임 받으시길 기원한다.

 

나는 이제 여기서 이정일 목사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에 앞서 이정일 목사님을 추모한다. 내 인생에서 내 아버지 유정준 장로님과 함께 가장 잊을 수 없는 분이 이정일 목사님이시다. 나의 모교회인 광장교회의 원로목사님이시기도 하지만 목사님은 내 평생 사역과 삶에서 결코 잊지 못할 은인이시기 때문이다.

목사님께서 2017310일 공교롭게도 내가 그리스 아테네에서 무슬림 난민 선교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 뜻밖에 소천 하셨다. 나는 그 소식을 접하고 얼마나 비통해 했는지... 갑작스러운 목사님의 소천소식은 큰 충격이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가실 것을 알았다면 조금 더 빨리 은혜에 감사하고 자주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송구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누가 우리 인생의 앞날을 알 수 있는가?

목사님은 19871017일 우리 부부의 주례를 서 주셨다. 군목시절 아내와 결혼하던 그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던 날 목사님은 우리 부부를 세워놓고 40분이 넘는 긴 주례 설교를 하셨다. 결혼식 장면이 녹화된 오래된 영상에는 내가 눈을 감고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서 있는 모습이 나오는데 얼마나 주례사가 길었으면 그러했겠는가? 그만큼 목사님께서는 내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많았던가 보다. 목사님께서는 위태하게 살아가는 내 젊은 시절을 바라보시면서 많은 조언을 해 주셨던 선배이자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 젊은 시절 그 끝 모를 방황의 시절을 붙잡아 주시려고 그렇게나 끔찍하게 사랑해 주셨던 목사님을 이제는 뵐 수 없다.

2014920일 큰 아들 영규가 결혼하던 날 목사님은 우리 아들의 결혼식 주례도 해주셨다. 그러니까 우리는 2대에 걸쳐 이정일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한 것이다. 목사님께 주례를 부탁하면서 '목사님, 제 결혼식 때처럼 그리 오래 하시면 큰일 납니다.'라며 함께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그렇게나 길게 설교를 했나?'하시면서 웃으시던 그 인자한 모습이 떠올라 자꾸만 눈물이 난다.

내가 구로공단에서 이주민 선교를 하다가 크게 절망하고 시력의 장애까지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누구보다 안타까워하시며 나를 성수동의 뚝섬 지역으로 인도해 주셨던 분도 바로 이정일 목사님이시다. 그때에 나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던 실패한 젊은 목사였다. 그랬던 나에게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붙잡아 주시던 그 손길이 따스하게 내 가슴에 남아있다. 내게 이정일 목사님과 같은 멘토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오늘의 나와 나섬, 그리고 몽골사역은 존재할 수 없었으리라.

특별히 몽골문화원을 세우고 김건철 장로님께서 이사장으로, 이정일 목사님이 원장을 맡아주시면서 우리의 사역은 날개를 단 것처럼 드높이 올랐다. 우리 교단은 물론이고 한국교회 전체에서 이렇게나 왕성하게 몽골선교를 했던 때는 앞으로 오지 않을 것 같다. 그만큼 두 분은 마음이 맞았고 내가 하자고 하는 대로 후원해 주시면서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신명기 34 :1~6

 

34:1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34:2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4:3남방과 종려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34: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34:5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34:6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이제 목사님은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다. 내가 목사님을 추모하고 그분의 사랑에 은혜를 갚을 길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남은 삶을 더 열심히 몽골과 나그네를 섬기는 사역에 헌신하는 것이리라. 지금도 목사님은 아버지 장로님과 함께 천국에서 나를 지켜보시며 응원해 주고 계실 것이라 믿는다. 목사님이 뵙고 싶다. 때로 외롭고 힘이 들어 가만히 내 방에 앉아 있으면 하늘을 향해 조용히 이야기 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버지~ 목사님~ 조금 더 살다 가시지 왜 그렇게 빨리 가셨어요?' 지금도 나의 아버지 장로님과 함께 이정일 목사님이 너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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