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취급방침
오시는길

TEL : 02-446-4195
FAX : 02-458-2982

서울시 광진구 광장로 1
(광장동 401-17)
나섬교회

COPYRIGHT© 2016
NASOMCHURCH
ALL RIGHTS RESERVED.



노마드톡

> 유해근목사 > 노마드톡
bible
   
굿모닝몽골2 몽골자매와의 첫 만남(1)

몽골 자매와의 첫 만남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빌레몬서 1:5-6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나그네 목회를 하면서 특별히 몽골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한다. 다른 나라도 많은데 왜 하필 몽골 사람들을 목회하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몽골 사역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구로공단에서 포도막염이라는 병을 얻어 더 이상 그곳에서 사역을 할 수 없게 된 후, 내가 새롭게 찾아간 곳이 성수공단이다. 1995년의 성수동은 지금의 그곳과 사뭇 다르다. 지금은 아파트에 서울 숲까지 매우 좋은 곳이 되었지만 내가 처음 성수동에 들어갔을 때에는 작은 공단 지역에 불과했다. 외국인 근로자들은 성수동을 중심으로 마장동과 왕십리까지 넓게 분포되어 살고 있었다.

 

이미 구로공단에서 외국인 사역의 노하우를 갖고 있던 나에게 성수공단에서의 사역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작은 지하 골방 같은 곳에 전화기 한대와 컴퓨터 하나가 전부였던 나는 밑바닥 목회의 전형을 두루 경험하게 되었다. 구로공단은 소망교회의 지원이 있었지만 성수공단에서는 서울노회가 중심에 있었다. 특히 광장교회 이정일 원로목사님은 내 목회에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이다. 목사님은 서울노회 노회장을 지내시면서 나를 성수동으로 이끄신 분이기도 하다. 가장 힘들고 방황하던 시절 목사님의 따뜻한 사랑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도 목사님을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사랑한다. 내가 몽골 사역에 집중할 수 있었던 데는 또 한분의 도움이 있었다. 나중에 다시 언급할 것이지만 김건철 장로님이 그분이시다. 이정일 목사님과 김건철 장로님의 후원과 사랑은 내 삶에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다.

내가 처음 몽골인들을 만난 것은 성수동에서 였다. 그전까지는 몽골인들을 단 한 번도 만나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운명적으로 나는 몽골과 이미 관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부터 꼭 가보고 싶은 나라가 있었는데 몽골과 티베트가 바로 그 나라들이었기 때문이다. 티베트는 아직 가보지 못하였지만 몽골은 그 사역의 중심에 있게 되었으니 그 소망의 반 정도는 이룬 셈이다.

몽골은 우리에게 아직 생소한 나라였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몽골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우리는 매우 무지하다. 나도 그랬다. 외국인 나그네들을 돕는 목회를 하고 있었지만 내가 몽골 사람을 만난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였다. 당시 우리 공동체에는 필리핀과 네팔, 스리랑카와 인도 사람 등이 많이 찾아오는 곳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던 우리에게 어느날 몽골 자매가 찾아온 것이다.

외국인 사역을 하는 중이었지만 몽골인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으니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그 자매는 심각한 문제를 갖고 찾아와 무조건 도와달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몽골인 사역을 내게 붙여주시려 했나 보다. 사실 몽골인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역사는 짧다.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외국인 사역에서 몽골인들의 입국은 늦은 편이었다. 몽골은 1921년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한다. 당시 소련 사회주의 혁명군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몽골에 독립 국가를 세운 것이다. 그렇게 세워진 몽골이 지금의 몽골(Mongolia)이며 중국에 편입된 내몽골은 중국령이다. 그러니 몽골도 분단국가인 셈이다. 1921년부터 시작된 사회주의는 결국 1992년에 개방을 시작할 때까지 약 71년 동안 몽골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와는 1990년 수교를 하였지만 몽골인들이 우리나라에 자유롭게 드나들게 된 것은 1992년 이후에나 가능하였다.

역사적으로는 1206년 칭기즈칸이 몽골제국을 통일한 이후 1271년 쿠빌라이 칸이 세운 중국의원나라가 우리의 고려시대와 겹치게 되고 당시 고려의 무신정권이 원나라의 속국처럼 형제의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은 오래전 일이다. 그 후 몽골의 원나라가 주원장의 명나라에 의하여 북원으로 쫓겨나기까지 약 100년 동안 고려와 몽골은 가까운 형제국가처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살았다. 지금도 우리나라 곳곳에 몽골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특히 제주도를 비롯한 몇 몇 지역에는 몽골의 문화와 언어가 화석처럼 남아 있다.

그 후 우리는 몽골을 접하지 못한다. 물론 명나라 이후 청나라는 만주지역의 여진과 거란 그리고 몽골의 연합민족이 세운 나라였으니 관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몽골과의 만남은 그렇게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6년 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였던 양정모 선수가 레슬링 결승전에서 만난 오이도프라는 몽골 선수는 우리가 텔레비전을 통하여 본 최초의 몽골 사람이다. 나는 지금도 그의 얼굴이 기억난다. 검은 머리에 찢어진 눈, 다부진 몸 등이 여전히 내 어릴 적 기억 속에 있다.

 

그런 화석 같은 몽골인에 대한 기억이 성수동에서 다시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나는 성수동 의 한 교회 지하실에서 몽골인 자매를 처음 만났다. 엥케라는 이름의 자매다. 전형적인 몽골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특히 주목을 끌었던 것은 영어에 능통하였다는 것이다. 몽골은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면서 소련의 끼릴 글자를 차용하여 사용한다. 물론 그 이전에는 그들만의 고유어가 있었다. 몽골의 언어와 문화를 잠시 살펴보면 몽골은 유목민족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에는 기록문화가 없다. 당연히 문자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다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세워지고 난 후 그들에게는 새로운 문자가 필요했으며 그래서 처음으로 차용한 문자는 당시 실크로드의 언어인 소그드글자였다.

그렇게 문자의 역사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소련의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그들은 자연스럽게 소련 글자를 배웠을 것이다. 그런 몽골 자매가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한다는 말은 그 자매의 출신 성분이 매우 특별하다는 점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역사는 결코 다수의 의도적인 이벤트에 의하여 진보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수의 피할 수없는 우연에 의하여 변화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선교도 마찬가지다. 나는 몽골 선교의 한복판에 들어선 것이 내가 의도해서가 아닌 매우 우연적인 만남을 통해서였음을 고백한다. 물론 그 우연은 필연의 가장임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그 몽골 자매와의 우연한 만남은 내 삶에 몽골이라는 한 국가를 만나게 하는 필연이었기 때문이다.

몽골 자매와의 만남은 그녀의 문제에 내가 뛰어 들었고 할 수 있을 만큼 도움을 주려 했다는 것이 전부다. 그 작은 사랑의 실천이 그녀의 마음에 어떤 감동을 준 것이었을까? 그녀는 그 후로 나를 잊지 못하고 찾아왔으며 그녀를 통하여 나는 수많은 몽골인을 만났다. 사랑이 자산이다. 그러므로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이렇게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작은 사랑에는 큰 에너지가 숨어 있다.

엥케 자매는 성수동에서 외국인 근로자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와 일하던 외국인 근로자의 70%이상이 불법체류를 하고 있던 터라 그녀 역시 불법체류자의 신분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타난 한 남자가 있었으니 이란 사람이었다. 그들은 피차 연정을 품고 있었나보다. 그러던 어느 날 불법체류 단속이 있었고 이란 남자가 단속에 걸려 갑자기 끌려가는 바람에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었고 그녀는 출입국관리소로 끌려간 남자를 잊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흘 낮밤을 자지도 먹지도 못하던 그녀에게 우연히 들려온 한마디는 뚝섬 어느 교회 지하실에서 외국인근로자들을 돕는 목사가 있으니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찾아온 엥케 자매는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유일한 소망은 한번만이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이란 남자를 만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그녀를 도울 것을 명령하셨다. 나도 어떻게든 그 이란 친구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불법체류자의 신분이었으므로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운영되고 그분의 섭리 가운데 존재할 뿐이다.

나는 지금도 그것을 믿는다.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우리가 게을러 그 길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나섬공동체에는 그런 작은 사랑이 만들어낸 큰 기적의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문화 이주민 사역자다. 물론 나보다 먼저 시작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역은 수동적이고 지엽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처음 이 사역을 시작하였을 때에 나는 이주민 사역을 새로운 미래 사역의 중심으로 바라보았고, 이주민의 인권과 복지는 물론 선교적 차원으로 이 사역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한국교회 외국인노동자선교협의회.

 

 



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