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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몽골 1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순간들(1)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순간들

 

고린도후서 8:1-2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섭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있었다. 1999년이 시작되었다. 외환위기로 우리 경제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새로운 국민의 정부가 세워졌지만 경제문제는 하루 이틀 사이에 풀릴 상황이 아니었다. 나와 아내도 당시에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한다는 뜻으로 아이들의 돌 반지는 물론이고 아내의 결혼반지까지 다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 경제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그 정도의 동참은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199710월 나는 당시 뚝섬의 어느 교회 지하실에 있다가 강변의 또 다른 건물 지하실로 이사를 했다. 이사를 했다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뚝섬을 떠나 강변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우리가 이사한 곳은 어느 유치원 건물의 지하실이었다.

뚝섬에서 우리는 너무도 가난했으므로 그저 무상으로 그 교회 지하실로 들어간 것이었다. 구로공단에서의 사역을 접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내게 남은 것은 오기와 새로운 출발에 대한 의지뿐이었다. 갑작스럽게 눈에 포도막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나는 결국 구로공단을 떠나야 했다. 그때가 1994년도 이다.

 

나중에라도 그 당시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살아있고 그들의 이야기를 지금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도 잊을 수는 없다. 그것은 악몽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적으로는 성공하였다는 평가를 들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들은 결코 성공한 인생이 아니다.

결국 병들고 상처 입은 나는 구로공단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결단하고 들어간 곳이 성수공단이다. 당시 성수동에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작은 공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사역도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이미 나는 거의 거지신세였으니 말이다.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사역에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도 없었다. 그러니 매일같이 라면을 먹기 일쑤였고, 아내에게 가져다 준 돈은 생활비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적은 액수였다.

하지만 그때의 사역을 생각하면 참 감사하다. 지금도 아내는 그때가 힘들었지만 은혜가 참 많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니 인간에게 행복이란 결코 돈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일저녁이면 찾아오는 외국인들에게 닭고기를 튀겨주거나 닭볶음을 해서 나누어 먹었다. 그렇게 일하면서도 우리 부부는 행복했고 그렇게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면 정말 감사하고 은혜가 충만했다. 하루는 전철을 타고 우리 4식구가 집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작은아이 영길이가 내 앞에 앉아있던 외국인을 발견하고는 내 팔을 흔들며 외국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자기 생각을 말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가 내 사역의 소중한 대상이던 외국인을 보고 반가워 나를 흔들었던 것이다. 그만큼 아이에게도 소중한 경험이었으리라.

 

광야는 고통스럽지만 우리를 죽이지는 않는다. 구로공단에서 성수공단으로, 다시 강변역으로 이사를 하면서 나는 거의 제정신으로 살 수 없었다. 소망교회에서 생활비와 사역비를 지원받으며 사역하던 구로공단 시절은 오히려 양반이었다. 그때에는 그래도 돈 걱정을 그리 크게 하지 않았다. 구로공단을 뒤로하고 나올 때에는 적어도 천 만 원이 넘는 돈을 저축해두고 나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뚝섬 성수공단 시절은 거지보다도 못했다. 어떤 날은 그 교회 여전도회로부터 도둑놈이라 매도당하며 얼마나 혼이 났던지! 점심때에 외국인들과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여전도회가 담근 김장김치를 가져다 먹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날 나는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땐 정말 그렇게 해서라도 갈 곳 없는 나그네들에게 라면 한 끼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한번은 그 교회 사무 간사로 일하는 자매로부터 얼마나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던 지 20여년이 지난 일이지만 가슴에 사무쳐 있기도 하다. 가난한 나그네 섬기는 목사라는 자리가 이렇게 참담할 줄은 몰랐다.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두 번째이고 아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으니 말이다. 목사라는 이름표만 달고 있었을 뿐 사실은 거지나 노숙자 취급을 당하며 살았다.

나는 1987년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일주일 만에 서울노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나에게 목사안수를 주기 위하여 임시노회가 소집되었다. 당시 군목 후보생이었던 나는 그해 419일 군종장교로 입대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광장교회에서 열린 임시노회의 안건은 단 하나 유해근 목사 안수의 건이었다. 그날이 1987226일 이었다. 참으로 난감하고 죄송스러운 노회였다. 많은 노회원들이 참석하여 나에게 목사안수를 주었다.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노회는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당시 내 나이는 26세였다. 생일이 지나지 않았을 때이니 만24세 때다. 정상적인 신학수업을 모두 마치고 그 나이에 목사가 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

나보다 젊은 나이에 목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없다. 이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내 자존감이기도 했다. 나는 자신만만했고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욕망의 덩어리로 뭉쳐진 존재였을 것이다. 군종장교로 입대하여 육군 중위로 임관을 하고 아내와 결혼을 했다. 19871017일이 우리의 결혼기념일이다. 아내는 중학교 교사였다. 대학에서 역사교육을 전공하고 공립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내는 지금 많이 늙었지만 당시에는 매우 청순한 여자였다. 나는 육군 군목이고, 아내는 공립학교 역사 선생이었으며 우리 부모는 많은 재산을 가진 분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당한 정도의 경제적 여유를 누리고 사신 분들이었다. 당시 나는 모든 것을 하고 싶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전역 후 하게 된 일이 외국인 근로자 사역이었다. 이전에 상상하지도 못한 목회를 선택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내가 선택한 사역이었지만 이렇게 함부로 취급당할 줄은 몰랐다. 정말 자존심이 상했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절망적이었다. 이것이 현실이로구나 하는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나는 이미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고 내 발목은 물론 내 삶 전체가 깊은 수렁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후회를 하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었다. 정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나그네 목회를 하면서 후회한 적은 없다. 오히려 감사하고 목회지로 나그네 목회를 선택한 것은 잘한 일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때때로 가슴 아프고 자존심이 상하는 날이면 다시 일반 주류목회를 할까 하는 유혹도 받기도 하였다.

 

한번은 몽골 울란바토르 선교교회에 조유상 선교사를 파송하고 몇몇 교회로부터 선교비를 지원 받아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은 그 교회가 울란바토르시의 한복판에 예배당도 잘 짓고 선교를 잘하고 있지만 당시는 처음인지라 모든 것이 부족하여 많은 도움을 주어야 했었다. 물론 풀어야 할 숙제가 많기도 했다. 당시 나는 엥흐 볼트 시장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울란바토르시는 우리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톨강 상류지역에는 건축을 할 수 없음에도 강 상류지역에 지은 수양관의 허가를 내 주었으며 울란바토르시에서 가장 좋은 부지를 교회부지로 내주기도 하였다. 지금은 그곳 땅값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올랐다고 한다. 그곳에 예배당을 지었으니 지금 그 교회는 내게 정말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세워진 울란바토르 선교교회는 우리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 교회가 우리를 떠난 배경에는 당시 서울노회의 한 목사님이 있었다. 당시 노회의 몇몇 교회가 동참하여 연합하여 몽골선교를 하였는데 그 중 한 교회의 목사님이 결국 몽골선교의 큰 밑그림을 엉망으로 만들고 결국 우리가 몽골 울란바토르 선교교회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그 목사님으로부터 받았던 모욕감은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다시 화가 치밀 정도다.

한번은 나를 불러 자신의 교회 권사님이 주셨다며 선교비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황당한 모습을 보여주던지 여기서 다 말하기 민망할 정도다. 그때 일을 당시 내가 칼럼을 쓰던 뉴스 앤 조이에 보냈더니 그 후 며칠 동안 그 글이 가장 위의 대문에 걸려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는 연락을 해 왔다. 나중에는 나 자신이 너무 당황스러워 그 글을 내려달라고 부탁을 해야 할 정도였다. 그 목사님은 나를 마치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의 부목사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다. 혹시 내가 그 교회의 부목사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법 큰 교회 담임이라는 자리는 나 같이 낮은 목사는 목사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목사 세계에 계급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 한국교회에는 분명 큰 목사와 작은 목사가 구별되어 있는 듯하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작은 목사다. 큰 목사는 큰 교회를 하는 사람일 것이니 나 같이 나그네 목회를 하는 사람은 결코 큰 목사가 될 가능성이 없다. 그 목사님으로부터 호통을 듣고 반 무릎을 꿇은 상태로 건네주시는 선교비를 받아 나오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큰 교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큰 교회 목회에 대한 생각을 한 적은 없다. 아직도 왜 내가 그날 그렇게 비굴하게 선교비를 받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가 쓸 돈도 아닌 몽골에 보내는 선교비를 왜 그렇게 굽신거리며 받아야 했는지 나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그날 참 많이 괴로웠다. 그래서 '내가 당신네 교회 부목사인줄 알아?'라는 칼럼을 썼던 모양이다.

대형교회 목사, 중형교회 목사, 그럭저럭 지역교회 목사, 개척교회 목사, 농촌교회 목사, 그리고 특수목회 목사로 목사의 계급이 나누어진다면 나는 맨 밑바닥에 있다. 그런데 그 밑바닥이 그리 싫지 않다. ? 밑바닥에 있으면 자유롭다. 삶이 자유롭고, 영혼이 자유롭고, 나의 말이 자유롭다. 자존심이 상할 수는 있어도 자유하기에 행복한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 맛 때문에 나는 밑바닥에 산다. 그것 때문에 나는 나그네 목회를 선택했다.

나인들 왜 큰 목회에 대한 꿈이 없었겠는가? 대형교회 담임이 싫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내게 다른 사람이 가는 길은 가지 말라는 은혜를 주셨다.

 

내가 군목을 전역한 때는 19907월 말이다. 그때에는 군목출신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인정을 받던 시절이다. 그러니 내가 선택하면 작지 않은 교회의 부목사로 얼마든지 갈 수 있었다. 모교회의 담임이자 아버님 같으셨던 이정일 목사님은 내게 어느 교회에 가고 싶은지 말만 하라고 하셨다. 당신이 영락교회 출신이니 영락교회든 소망교회든 말만하면 당신이 직접 연결을 해주겠노라고 하셨다. 그런데 정말 나는 대형교회에 대하여 단 1%의 마음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일반 목회지에 대한 생각은 아예 내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내게는 분명하고도 단호한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원칙은 최고가 아니라 최초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창조경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권에서 매우 칭찬을 받을만하였으리라. 그런데 그 당시에 그런 이야기는 미친 짓이라 했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간 길은 가지 않을 것이고 오직 창조적이고 도전적인 일만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니 참 바보처럼 보였을 게다.

두 번째 원칙은 이왕 목회자로 산다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목회를 하겠다는 것이다. 81학번인 내가 장신대에 들어갔을 때 세상은 이미 군부독재가 지배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학생운동에 열심이던 동생 유 집사 때문에 우리 집은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늘 대범하셨고 매우 정의로운 분이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형제는 아버지의 그런 삶의 철학을 강하게 이어받은 것 같다.

그러한 환경은 자연스럽게 나의 신학적 고민을 더하게 했다. 역사의식과 진보적인 신학공부에 대한 관심은 더 깊어졌다. 민중신학이니 해방신학이니 하는 분야에 대하여도 관심이 깊었다. 그래서 신학대학원 졸업논문은 '민중신학의 문화적 기초를 위한 종교의 민중적 요소 분석'이라는 조금은 어려운 주제이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약자와 자유, 그리고 정의라는 큰 틀에서 목회를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두 번째 원칙이었다. 최초이며 약자를 위한 목회라? 이것이 간단한 말이 아님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건 참 낭만적이고 한심스러운 원칙이었다. 그런 기준과 원칙에 맞는 목회가 어디 있는가? 없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군목 전역 후 일정 기간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내가 군목을 전역하고 가장 잘 한 일이라면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조금도 조급하거나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믿고 결혼한 아내와 아이들에게 나는 철없는 아버지요, 남편인 셈이었다.

그 때 군대에서 받은 얼마의 퇴직금으로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인지도 모른다. 물론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다.

19909월 나는 배낭을 메고 무조건 유럽으로 떠났다. 지금 고려대 철학과 교수인 친구 김창래가 공부를 하던 독일의 본(Bonn)이 내가 처음 찾아간 곳이다.

한 달 간의 유럽여행을 마치고 찾아간 기독교아시아연구원 또한 내 인생에서 소중한 공부를 했던 곳이다. 김용복 박사님과 한준식 장로님 그리고 송재천 목사님 등이 그곳에서 만난 분들이다.

2년 동안의 연구원으로 동고동락하던 그 시절은 가난했지만 언제나 즐거웠다. 진보적인 신학자인 김박사님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한준식 장로님은 내 삶에서 잊지 못할 분들이다. 특히 한 장로님은 내게 대부와도 같은 분이셨다.

나는 그곳에서 공부하는 법과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나중에 구로공단에서 만난 인명진 목사님은 내게 일하는 법을 가르쳐 준 분이다. 물론 그분과는 일정한 애증이 있지만 말이다. 기독교아시아연구원에서 잠시 경상도 상주로 이사를 하기도 했지만 그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미국 유학포기와 아내의 사표제출은 그런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일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인생에 대하여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나 보다.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과의 만남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어느날 곽 목사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아침 7시에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찾아간 그 지하 벙커 같은 담임 목사실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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