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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경제25 나섬과 나눔의 기적

마태복음 14 : 13- 21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실이다. 오병이어에 대한 성서의 기록은 사복음서 모두에 나오는데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 등 두 가지의 전승을 갖고 있다. 매우 이례적인 기록이다. 마태복음 14장에서는 오병이어로, 다시 15장에서는 칠병이어의 기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가복음에서도 오병이어는 6장에 나오는데 반해 칠병이어의 이적은 8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사건은 별개의 이야기일까? 예수님이 두 번의 기적으로 먹이셨다는 말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께서 그렇게 작은 것들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오병이어나 칠병이어의 사건은 작은 나눔으로도 큰 이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오병이어는 역사적 사실이다.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제자들이 그 사건에 대하여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이야기를 풀어냈을 것이고 그런 기억의 오류로 오병이어이거나 혹은 칠병이어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간의 기억은 간혹 오류를 범할 수도 있기에 우리가 그런 이야기의 차이를 가지고 논쟁을 할 필요는 없다. 오병이어가 맞는지 칠병이어가 맞는지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님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나눔이라는 가치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께 집중되어야 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말하려는 의도는 나눔이다. 나눔의 기적이 오병이어의 이야기에서 말하려는 목적이다. 나눔은 기적을 만든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인간은 작은 것이라도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소유의 욕망은 인간의 본능이다. 본능을 통제하고 나눔의 용기를 내는 것이야말로 기적이다. 나눔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나눔이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나눔이라는 가치가 곧 기적의 사건이다.

몽골여행에서 겪은 기적의 경험

지난 8월 몽골여행 중 홉스굴에서 울란바타르로 돌아오던 날이었다. 홉스굴에서 울란바타르까지 가려면 서너 시간을 달려 무릉이라는 작은 시골 공항에서 국내선을 타야만 한다. 우리일행은 비행기 시간에 맞춰 공항근처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하였고 우리를 안내하는 허 선교사님이 이미 예약을 마친 상태였다. 우리일행 모두 예약된 식당을 찾아갔다. 그런데 우리 일행은 어처구니없는 상황 앞에 모두 황당함을 금치 못하였다. 예약한 식당 문이 잠겨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몽골이라는 허 선교사님의 말에는 힘이 없고 미안함으로 어쩔줄 모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일행 중 어떤 이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자신은 저녁을 반드시 먹어야 한다며 밥을 달라하니 앞에서 리드해야하는 필자로서는 무척 당황스러운 상황을 마주한 것이다. 다른 식당을 알아보고자 무릉 시내를 돌아다녀 보았으나 어쩌면 작은 식당 하나 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방법은 단하나, 일행 모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꺼내보기로 했다.

무릉 작은 시골 공항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녁이 다가옴에도 울란바타르로 떠나는 비행기 외에 그 공항을 오고가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 그 시간에는 우리와 공항직원 외에 공항이 비어있는 상태였다.

우리는 돗자리를 깔고 공항 대합실을 점령해 버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짐 중에서 먹을 것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정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엄청난 양의 먹을 것들이 모아진 것이다. 우리 일행 모두는 점심을 배불리 먹었을 뿐아니라 허 선교사님에게 남은 것을 전달했을 정도였다. 선교사님은 우리가 돌아간 후 그것을 정리하느라 한나절이나 걸렸다는 후문이다.

우리는 어떤 식당에서도 먹을 수 없는 다양한 것들을 나누어 먹으면서 배가 불렀으니 나눔은 기적이 되었던 것이다.

몽골학교 건축과 나눔의 기적

몽골학교를 건축하던 중 어느 날 내가 알고 있던 목사님 사모님께서 연락을 해왔다. 가난한 어느 권사님이 몽골학교에 헌금을 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혹시 그곳으로 직접 올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가겠다고 약속하고 집주소를 받았는데 종로에 있는 임대아파트였다. 아내와 그곳 임대아파트에 도착을 하니 더운 여름이었음으로 집집마다 문을 열어놓았는데 묘한 냄새가 났다. 막장인지 된장인지 혹은 청국장일지 모를 냄새다. 가난의 냄새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방문한 권사님 댁에는 그 사모님도 와 계셨다. 권사님은 관절염으로 걷지를 못하고 앉아서만 생활하신다고 했다. 자녀도 가족도 없는,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불행한 노인의 삶이었다. 작은 봉투 하나를 건네주시는데 그 안에는 천 만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 있었다. 평생 남의집살이를 하면서 번 돈의 마지막 남은 것이라 했다.

권사님께서는 그 사모님으로부터 몽골학교 건축 이야기를 듣고는 학교 건축 헌금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한다. 헌금봉투를 들고 기도를 하는데 눈물이 계속 흘렀다. 얼마나 큰돈인가? 이것은 할머니 권사님 자신의 전부다. 관절염이 생길 정도로 고생하며 번 돈이다. 자식도 가족도 없는 그 권사님에게는 돈이 힘이다. 그런데 그 돈을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몽골아이들을 위해 내놓는다. 몽골학교 건축 이야기를 듣고서 기도하던 중 선뜻 헌금하고 싶었다고 하셨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필자는 그 생명 같은 헌금이 기적을 만들어 지금의 몽골학교를 건축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런 나눔이 없었다면 우리는 몽골학교를 건축할 수 없었다. 박 권사님의 생명 같은 헌금으로 지어진 몽골학교이니 우리 학교는 기적의 학교다. 나눔과 희생으로 지어진 학교이니 천국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로 만들어야 한다. 박 권사님의 천만 원 헌금은 내 평생 결코 잊을 수 없는 헌금이다. 박 권사님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그날의 감동이 되살아난다.

예수의 오병이어가 말하는 의미

얼마 전 갈릴리 호숫가 오병이어 교회를 가본 적이 있다. 갈릴리 호숫가의 가난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던 모습을 상상했다. 2000년 전 이곳 갈릴리는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들의 공간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민중들로 가득한 호숫가 넓직한 평지에는 수많은 이들이 모였다. 때가 되니 먹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에게 먹을 것은 없었다. 오직 작은 아이 하나가 가지고 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사람들은 계산을 한다. 한 끼에 일인당 얼마씩인지, 그러므로 곱하기 오천 명을 하면 계산이 나온다. 현 시점에서 일인당 오천원씩 오천명으로 계산하면 약 이천 오백만원이 필요하다. 그것도 최소한으로 잡은 계산이니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적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려는 자본주의 문화에서 예수와 오병이어의 기적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계산으로는 답이 없으니 사람들은 그만 포기하고 만다. 나도 그랬을 것이다. 몽골학교를 지으면서 특히 나섬의 사역을 하면서 나도 계산하고 살 때가 있었다. 계산은 쉽고 빠르다. 얼마가 필요하다는 계산은 가장 본능적이며 본질적인 습관이며 문화다.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비전을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려는 미래를 말하면 그 자리에서 나오는 첫 번째 반응은 언제나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절망적인 반응이었다.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만들겠냐며 빈정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저 하나님께서 하시겠지요.’라고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내 안에서는 기적은 일어난다는 믿음이 있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확신은 근거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나는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25년을 한결같이 그런 체험을 하며 살아왔다.

나섬은 그런 고백이 있는 공동체다. 나눔의 기적을 체험한 공동체다. 그리고 미래도 그런 기적으로 채워질 공동체다. 오병이어는 오늘도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를 남기셨다고 한다. 엄청난 기적이다. 제자들은 그것을 보았다. 사복음서에 한결같이 기록된 것만 보아도 그 사건은 제자들의 뇌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대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작은 기억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분명 오병이어든 칠병이어든 기적은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이 한번 혹은 두 번 정도만 일어났다는 것이다. 만약 그 사건이 계속해서 이루어졌다면 예수님은 인류의 먹거리를 해결한 노벨 경제학상을 수백 번 받아도 되는 해결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건은 일회적이다. 한 번의 사건이다. 오병이어가 의미하려는 것은 예수께서 먹이신 기적보다 인간들의 나눔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 아닐까?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기적으로 보여주신 것보다 인간들 사이의 나눔이 하늘의 기적을 일으키는 천국 복음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기적은 하늘의 것이 아니라 땅의 것이다. 예수께서 일으키신 기적보다 인간들의 나눔과 자기 것에 대한 자발적 포기가 기적의 원천이다. 사람들 사이의 사랑의 나눔이 기적일 뿐 예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시는 것은 나눠살면 그것이 기적을 일으키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작은 아이의 나눔으로 일어난 오병이어의 기적을 딱 한 번 보여주신 것이리라.

나만 가지려는 소유의 욕망을 내려놓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자기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먹을 것은 자신이 먹으려고 숨겨놓은 것이다. 그것을 타인을 위하여 내놓는 것은 어려운 결단이다. 더욱이 타지에서 그렇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 분위기에 휩쓸려 내놓은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것을 내놓으니 타인들도 내놓는 모습 속에서 천국을 경험했다. 기적의 경험이 천국의 경험이다. 박 권사님의 천만 원 헌금은 더 힘든 결단이다. 목숨처럼 소중한 마지막 돈을 내놓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서는 그리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나누려 할 때에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불가능하던 것이 가능해지고 우리 모두가 그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무엇으로 우리는 천국을 설명할 수 있는가? 나눔의 기적이 수천 명을 먹이고서도 남은 것이 가득했다는 소식이 천국의 소식이다. 천국은 예수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안의 작은 나눔이 만든 결과다. 천국은 예수가 던져주는 축복이 아니라 우리안의 자기 부정과 내려놓음의 결과다. 예수께서 보여주시려는 오병이어의 의미는 기적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으로 나누라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기적일뿐 더 이상의 기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적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요, 천국의 삶을 실현하는 것이다.

 

나눔의 경제학

곱하기의 경제는 세상의 경제학이고 나누기의 경제는 천국의 경제학이다. 곱하기에 익숙한 자들에게 나누기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명령이다. 인간의 욕망은 나누기를 용납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누가 나누기의 삶을 가르치는가? 세상에서는 그것을 바보들의 전유물이라 한다. 욕망은 소유이고 자기 것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다. 그래야 성공한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교육의 목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누라 하신다. 나누고 사는 것이 천국의 삶이라 한다. 곱하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나누기의 삶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예수님은 욕망하는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자기 것에 대한 욕망의 끝에 예수의 십자가가 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이해관계로 예수는 죽어야 했다.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하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그는 살해당한 것이다. 욕망의 종교와 권력이 예수님을 죽였다. 나누지 못한 자들은 누군가를 죽여야 자기가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국의 경제학을 배워야겠다. 나누기에 익숙하지 못한 세상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목적이다. 나누면 살고, 소유하면 죽는다는 것에 대하여 삶으로 보여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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