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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톡185 판가즈와 함께 하는 인도 선교의 비전과 의미 1

나섬은 보물섬

나섬에는 보물들이 많다. 가장 먼저는 몽골학교 아이들이며, 두 번째는 역파송 선교사들이다. 현재 터키에는 호잣트 선교사가 있고, 몽골에는 보르마 목사가, 내년에는 판가즈 목사가 인도로 떠날 것이다. 그 외에도 베트남으로 역파송을 준비 중인 투하 같은 이들이 여럿 있다. 당장 내년에 떠나는 인도의 판가즈 목사는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역파송 선교사다. 판가즈는 2000년대 초반에 한국에 와서 이주 노동자로 살다가 복음을 받아들여 기독교인이 되었고 장로회신학대학에서 학부부터 신대원까지 장장 9년 반 동안 신학수업을 하고 올해 목사가 된 사람이다. 뿐만아니라 그는 한국인 아내를 비롯하여 딸 셋을 두고 있는데 그 가족만 보아도 나는 행복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판가즈는 언제부턴가 나보다 앞서 나섬의 대표선수가 된 느낌이다. 많은 곳에서 강사로 초청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가는 곳마다 상한가(?)를 치는 보기 드문 설교자이기도 하다.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이제는 다문화 강사로도 널리 알려져 많은 곳에 불려가고 있다. 그런 판가즈가 인도로 간다. 내년이면 인도로 떠나야 하는 그에게서 나는 인도선교의 미래를 본다.

 

카스트는 운명

인도는 전세계에서 선교의 역사가 가장 긴 나라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한명이었던 도마 선교사가 인도에서 복음을 증거 했다고 하니 인도선교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이후 가장 먼저 선교가 시작된 나라인 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00년이 넘는 긴 선교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인도 선교의 열매는 아직 미미하다. 현재 인도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 13억 명 중 불과 2.3%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2.3%의 기독교인들조차도 약70%는 달리트라고 하는 불가촉천민들이라고 하니 이는 인도 선교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 이유로 인도에서 기독교인은 천민들이 믿는 종교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해져 있다.

인도 선교는 대단히 어렵다고들 한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너무 공고하고 힌두교의 벽과 그들이 갖고 있는 범신론적 신관 등으로 인하여 인도 선교는 무슬림 선교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전세계 모든 종교가 다 있는 종교의 박물관 같은 인도는 기독교 선교역사에서 보기 드문 땅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인도의 기독교인 대부분이 불가촉천민이기 때문에 높은 카스트에서는 기독교인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카스트의 벽이 얼마나 높기에 그럴까 싶지만 실제로 인도에서 카스트는 삶 자체이다. 카스트의 벽은 작은 일상에서부터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뿌리 깊게 퍼져있다. 아무리 카스트를 극복하려 해도 카스트를 극복한 이는 없었다. 인도 헌법의 아버지라는 암베드카르(Ambedkar)같은 이도 인도 카스트의 벽을 허물고자 했으나 오십 만 명의 달리트들을 데리고 불교로 귀의한 것이 전부이다. 인도에서 가장 추앙받는다는 그도 카스트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하물며 기독교인들까지도 카스트의 벽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성찬식에서도 높은 카스트와 낮은 카스트의 포도주잔이 다르다고 한다. 그 정도로 카스트는 인도라는 나라에서는 어느 종교도 무너뜨릴 수 없는 벽이다.

내가 만나는 인도 선교사들 대부분은 카스트가 얼마나 두꺼운 벽인지를 실감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 한다. 그들이 선교 현장에서 느끼는 현실적 한계는 절망감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나는 약 10년 전 인도 펀잡주의 찬디갈에 있는 판가즈 목사의 부모님이 계신 집에서 한 주간을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에 나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내가 판가즈의 집에 머물러 있는 동안 간혹 내가 아는 인도인들이 찾아오곤 하였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판가즈의 집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판가즈의 집에서 나를 만나려면 내가 머무는 집안으로 들어와야 함에도 그들은 모두 판가즈의 집 출입구에 마련된 작은 응접실에서 나를 기다리곤 하였다. 그들은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들을 만나려면 출입구의 작은 응접실로 나가야 했다. 당시에는 왜 그런지 묻지 않았다.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물을 수 없는 어떤 원칙과 룰이 있음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카스트 때문이었다. 카스트가 그렇게 무서운 것임을 안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실제로 판가즈의 어머니는 나를 그리 반겨주지 않았다. 내가 그 집에 머무는 동안 처음 며칠 동안은 나를 투명인간처럼 취급하기도 했으니 인도에서는 손님대접을 본디 그렇게 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힌두교에 심취해 있는 그 집안의 내력과 관계가 있었다. 나는 기독교 목사이고 그들은 모두 신실한 힌두교도들이었다. 내가 인도 판가즈의 집에 찾아갔을 때 판가즈는 기독교인이 된 상태였고, 거기다가 그를 신학교에 입학시키려 함이었으니 나를 반겨주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거기에다가 판가즈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으며 그녀는 한국인이고 그녀도 물론 기독교인으로서 판가즈가 결혼할 경우 그들은 모두 한국에 머물며 신학을 공부해야 하므로, 그렇게 살도록 허락해 줄 것을 위하여 찾아갔으니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그럼에도 며칠 지나지 않아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니 그들은 인간적으로도 상당히 예의바른 사람들이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을 나를 그정도로 대접해 준 것만 보아도 판가즈는 매우 좋은 집안에서 출생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렇다! 판가즈는 카스트 중 가장 높다는 브라만 출신이다. 나는 카스트의 힘을 모른다. 그러나 조금씩 인도 공부를 하면서 인도에서 카스트란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판가즈가 브라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의미를 실감하지 못하고 지냈으니 나는 참으로 무지한 사람이다. 하긴 내가 인도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인도의 카스트를 실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도 선교를 시작할 시간이 다가오면서 나는 카스트를 알아야했다. 아니 자연스럽게 카스트라는 것이 얼마나 거대한 산인지를 알게 되었다. 카스트는 운명이다. 인도 사람에게 카스트는 건널 수 없는 강이며 초월 할 수 없는 산이다. 그들은 카스트를 운명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Gandhi)마저도 카스트를 인정했지 않은가?

역사적으로 복음은 인간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핵심가치이다. 바울과 예수님은 한결같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을 허물었으며 그 장벽을 허물고 하나가되는 것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진리다. 그러나 인도에서만은 불가능했다. 2000년 동안 선교를 했지만 카스트가 여전히 남아있으니 말이다. 지금도 카스트 안에서 헤매는 기독교 선교를 보면 안타깝고 기이한 느낌마저 든다. 어떻게 해야 인도에서 복음의 능력이 제대로 힘을 발휘할까? 누가 그 카스트의 벽을 허물 수 있을까?

 

판가즈는 왜 한국에 왔을까?

인생은 신비하다. 하나님은 놀랍고 오묘하시다. 인간사 새옹지마라고 했지만 사실 그 비밀을 알고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도 내 인생을 모르겠는데 어찌 내가 판가즈의 인생을 알 수 있을까? 그러나 여기 하나만은 고백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적어도 그것만은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를 설명할 수 없으니 말이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로만 그를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판가즈 목사를 지켜본 사람이다. 그를 처음 만나고 공부를 시키면서 그리고 목사가 되기까지 지근거리에서 그를 바라본 사람이다. 한마디로 그는 보물이다. 숨겨진 보물이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르신 사람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에 나는 그가 브라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니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인도에 대하여 무지했기 때문이다. 대체 카스트가 무엇인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이유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다 조금씩 인도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면서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카스트라는 사실을 알았다. 카스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인도이기에 브라만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 판가즈는 브라만으로서 선교를 할 것이다. 그가 브라만이기에 그의 선교 사역도 특별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브라만이라는 기득권에 연연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브라만으로서의 계급의식에서 벗어나겠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달리트들 즉 불가촉천민들을 비롯한 낮은 카스트의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입양하는 사역을 하겠노라 한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가지고 선교하겠다는 것이다. 카스트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가장 높은 카스트인 브라만을 선교하는 것이다. 그들을 선교하여 복음 앞으로 인도하고 그들 스스로 브라만으로서의 기득권과 특권의식을 벗어버리게 하는 운동이 그들 내부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것만이 카스트를 깨는 전략이다. 브라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자리를 내어놓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복음의 의미를 선포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가장 높은 카스트인 브라만의 회개와 화해 그리고 섬김의 자리로 내려가는 용기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판가즈는 그러한 용기와 섬김으로 사역할 수 있는 사역자이다. 나는 그것을 확신하고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이 판가즈를 부르신 것이라 믿는다.

인도선교 2000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실 것이다. 그래서 인도인들이 카스트의 족쇄에서 해방될 수 있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누구도 카스트를 부수지 못했다. 간디도 암베드카르도 윌리암캐리도, 아니 도마까지도 카스트의 늪에서 자유하지 못했다. 그것이 인도 선교사역의 한계였다. 그러나 나는 판가즈는 그 장벽을 허물고 복음 안에서 진정한 자유함을 선포 할 것이라 확신하고 싶다.

 

판가즈가 한국에 이주 노동자로 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 나섬을 찾아온 것도 우연이 아니다. 나섬에서 이혜정 전도사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 하게 된 것, 장신대에 입학하여 10여년을 신학공부에 전념한 것, 목사가 되어 인도의 역파송 선교사로 부르심 받은 모든 사건들은 목적이 있었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움직이고 있는 인생인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의 계획이 그에게 있다. 그는 한국에서, 나섬에서, 복음 앞에서, 기독교인으로서 목사가 되고, 역파송 선교사가 되어 인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위대한 인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판가즈는 모세다.

모세는 애급의 궁전에서 왕족의 양자로 권력을 누리던 사람이다. 그는 그의 출생의 비밀을 알지 못하고 자랐다. 그러나 우연이었을까 그의 삶은 결코 하나님의 섭리를 피해갈 수 없었다. 애급의 관원을 때려죽이는 범죄자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애급을 피해 미디안 광야의 족장 이드로의 사위가 되었다. 십보라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게르솜이라는 아들까지 얻은 나그네로 살아야 했다.

그는 목동이 되었다. 별볼일없는 인생으로 전락한 것이다. 하루 종일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 되었다.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던 어느 날 야훼라는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셨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그를 부르신다. 애급의 노예로 살아가는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라시는 것이다. 해방자로 부르시는 그 장면은 감동적이다.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어디까지 일까?

나이 80세에 부르심 받을 것을 상상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무엇일까? 나이, 건강, 재력 혹은 권력까지 어떤 조건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부르심의 조건이 무엇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어떤 인간적인 상상력도 의미가 없다. 그것은 오직 그분만의 섭리와 계획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인간적인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정권은 오직 그분 한분만의 것이다.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에서 나는 잠시 멈추고 싶다. 왜 모세였을까? 왜 하나님은 모세라는 늙은 80살의 버려진 돌을 위대한 해방자로 사용할 결정을 하신 것일까? 그렇다! 모세는 이미 버려진 돌이었다. 하나님은 버려진 돌을 모퉁이 머릿돌로 사용하신다고 했다. 모세는 애급에서 도망쳐 나온 후 40년을 광야에서 훈련받았다. 광야는 훈련장이었다. 그는 나그네로 목동으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훈련을 받았다. 그것이 조건이다. 훈련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이 쓰신다는 사실이다. 광야에서 살아 훈련받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종이 되는 조건이다.

그런 측면에서 판가즈는 모세다. 모세의 삶과 너무도 흡사하게 그는 살았던 것이다. 한국이라는 광야에서 이주 노동자라는 목동보다 더 고된 삶을 살아보았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으나 그는 모세처럼 집을 나와야 했고 나그네가 되었으며 노동자로 살면서 고된 훈련을 받았다. 십보라 같은 이혜정과 결혼을 했고 게르솜과 같은 딸 셋을 두었다. 그리고 그는 해방자 모세처럼 카스트에 종노릇하는 인도인들의 해방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판가즈는 기도의 능력이 있는 종이다.

모세는 애급의 바로와 맞서 기적을 일으키며 히브리 백성을 탈출시켰다. 그는 홍해의 절망 앞에서 기도함으로 홍해가 갈라지는 체험을 했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으며 마라와 므리바의 샘물을 광야에서 마셨다. 이는 모두 절망의 한계 앞에서 기도함으로 얻어진 기적이었다. 그는 기도의 사람으로 살았다. 하나님과 깊이 소통하며 언제나 기도로 절망의 순간을 헤쳐나간 것이다. 나는 모세처럼 판가즈의 삶에도 그런 기적이 일어남을 믿는다. 그는 기도로 살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다. 내게 무디처럼 기도함으로 기적을 체험하고 싶다고 고백하는 모습은 참 귀하다. 어디서 저런 믿음이 생긴 것일까?

 

판가즈가 인도선교의 미래다.

2000년 동안 인도 선교가 답보상태였다면 이제 인도의 미래 선교는 판가즈에게 맡겨보자. 일당백이 아니라 일당 천, 아니 일당 만이라고 믿으며 나는 그를 인도로 보낸다. 나에게 영적 아들 같은 판가즈와 그의 가족은 내 삶의 흔적이며 나섬의 열매다. 내 인생을 걸어도 조금도 아깝게 생각되지 않는, 마치 내 아들 같은 마음으로 그를 보낸다. 그에게 인도 선교의 미래가 있음으로 나는 그를 모세를 파송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내고 싶다. 그에게 인도와 그 백성들의 영혼이 달려 있다. 인도의 미래가 아니 전세계의 미래 선교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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