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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는 없다 8. 역파송 선교사와 뉴라이프 선교사를 융합하라

 역파송 선교란 무엇인가?

1992년에 이주민 선교를 시작하면서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비전은 역파송이라는 선교의 새로운 전략이었다. 역파송이란, 이주민들을 선교하여 그들 가운데 헌신을 다짐하는 이들을 뽑아 신학교육을 시키고 나아가 그들을 자신들의 나라와 열방으로 되돌려 보내는 선교전략이다. 전세계 곳곳에는 한국인 선교사가 선교할 수 없는 선교의 사각지대가 있으며, 한국인 선교사보다 더 효과적이고 경제적으로 선교할 수 있는 전략이 있는데 역파송 선교가 바로 그 대안인 것이다. 그래서 1993년 이주민 선교의 마지막 목적이며 비전으로 역파송이라는 선교전략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래서 1993년 당시 한국교회 외국인노동자선교협의회 초대총무로 일하면서 각 선교회와 교회에서 현지인들을 모아 역파송 선교를 위한 신학훈련과정을 만들어 보기도 하였었다. 짧게는 며칠 동안의 훈련과정에서부터 길게는 몇 년씩 걸리는 신학과정까지 다양하게 시도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대부분 성공하지 못하여 중도에 포기해 버리곤 하였다. 그럼에도 역파송은 여전히 이주민 선교의 가장 분명한 비전임을 확신하고 지속적으로 도전해 왔다. 역파송 선교가 훈련과정에서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훈련과정 자체가 임시적인데다 신뢰할 수 없는 신학과정을 통하여 빨리 끝내려는 성급함 때문이었다. 훈련생들이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정상적인 신학교가 아닌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진 미인가 신학교 같은 곳에서 공부시키려 한 것에서부터 역파송의 선교는 이미 실패를 잉태하고 있었다. 역파송이 아무리 급박하다 해도 정상적이며 신뢰할 수 있는 곳에서 신학수업을 시작하여야 한다.

한국교회의 무인가 신학교들이 역파송 선교라는 미명하에 이주민들을 선발하여 검증되지 않은 신학과정을 통해 목사로 안수하는 현실은 대단히 위험하고 무책임한 것이다. 나는 그동안 이러한 역파송의 위험성을 여러 번 지적하며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미래지향적이며 지속가능한 역파송인지에 대하여 많은 고심을 하였다.

그래서 나섬공동체는 성공적인 역파송을 이루어내기 위하여 오랫동안 준비하는 가운데 믿을 만한 이주민 나그네를 찾았다. 선교란 나그네를 순례자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그네를 순례자로 만들고 그 순례자들 가운데 신학수업을 할 수 있는 가능성과 역파송 선교사로 부족함이 없는 이들만을 골라 신학과정에 입학시키고 있다. 적어도 장신대를 비롯한 한국의 대표적인 신학교에 입학시켜 오랫동안 공부하게 하다보면 자체 검증이 된다. 신학수업과 국내 이주민 사역의 훈련을 다 마치고난 후에야 비로소 역파송 선교사로 파송할 것을 결정한다. 그렇게 해도 역파송 선교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주민들의 목적은 하나다. 돈을 버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이주노동자든 결혼 이주민이든 그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돈이다. 물론 100%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이주 노동자가 되었고, 결혼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돈에 약하다. 돈이라면 언제든지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이주민 나그네들의 속성이다.

그런 이유로 이주민 선교에 있어 가장 접근하기 좋은 것도 바로 그 지점이며 역파송과 같은 의미있는 선교를 하려 할 때에 가장 취약한 부분도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돈은 필요악이다. 돈에 약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이 가진 생존과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선교의 접촉점을 만들고 나아가 그들이 신앙을 갖고 역파송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작정한 이후에도 경제적 문제는 여전히 그들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나섬의 역파송 선교는 다르다

우리도 돈 때문에 실패한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참 괜찮은 사람들을 뽑았다고 생각하고 신학교육을 시켰지만 어떤 시점에 무너지고 포기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 이유는 모두 돈 때문이었다. 돈 선교가 문제인 것이다. 돈으로 선교하려는 버릇이 이주민 선교에도 버젓이 드러난다. 돈으로 사람을 사고 돈으로 선교하는 한국교회의 잘못된 선교관이 이주민 역파송 선교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역파송은 물론 그들의 신앙 자체도 뿌리째 뽑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오래전 우리 공동체에서 역파송의 꿈을 갖고 신학교에 보낸 자매가 있었다. 시지레라는 예쁘고 똑똑한 몽골자매였다. 한국말도 유창해 한국인과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었으며 외모도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던 자매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녀는 조금씩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곳저곳 돈을 주는 교회를 찾아다니더니 결국 신앙마저 잃어버리고 떠나버렸다. 참 안타까운 경우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씁쓸하다.

또 한 번의 실패는 나섬에서 처음 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물론이고 가족들의 많은 문제들까지 다 해결 받았던 몽골 형제가 장신대를 졸업한 후, 마지막 순간에 대형교회로 떠나버린 경우다. 지금도 가끔 나를 찾아오는 이 몽골 친구는 그 이유일까 조금은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만난다. 한번 떠난 이들은 다시 올 수 없다. 온다고 해도 이미 관계가 틀어졌음으로 회복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역파송 선교사가 되려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조건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한 번의 신뢰가 깨어지면 다시 이어붙일 수 없다.

 

보르마 목사는 나섬의 초기 몽골 교인이었다. 내가 성수동 뚝섬지역에서 이주민 선교를 할 때에 찾아온 이가 보르마다. 몽골에서 대학을 나오고 남편과는 일찍이 이혼을 했다는 보르마는 나이 들어 한국에 온 사람이다. 임금체불을 당하고 갈 곳 없어 찾아온 보르마는 나섬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 받고 조금씩 신앙을 갖게 되었다. 대부분의 이주민 나그네들이 그렇듯이 보르마도 자신의 살길을 찾아 떠나갔다. 그런데 한참 후 보르마는 다시 우리를 찾아왔다. 나이는 들었지만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며 도와달라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장신대에 입학을 한 그녀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신학공부 하는 것을 무척이나 어려워했다. 한국말도 유난히 힘들어했다. 그러나 시작하면 끝이 있는 법이다. 그녀는 어쨌든 신대원까지 졸업을 하였다. 아마도 장신대 교수님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한 사람이다. 나하고는 동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10여 년 전 목사안수를 받고 몽골 울란바타르로 돌아갔다. 당시에는 우리가 역파송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음으로 부천의 복된교회에서 대신 역파송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보르마에게 몽골의 빈민촌으로 가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를 했고, 그녀는 이에 동의하여 울란바타르 외곽의 언덕배기 빈민촌으로 파송 받아 가게 되었다.

얼마 전 보르마 목사는 자신의 교회에 다니는 청소년 열 명을 데리고 한국교회를 방문하였다. 물론 우리 교회 주일 아침예배에도 참석하여 특별찬양을 불렀는데 나는 많이 울었다. 참 감격스럽고 감사했기 때문이다. 그 청소년들 가운데 우리 몽골학교 출신 아이들도 있었으니 그 감격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지금 보르마 목사는 빈민촌에서 열심히 목회를 하고 있다. 그곳을 떠나지 않고 버티면서 어려운 이들을 돕고 섬기는 보르마 목사가 고맙다. 나는 몽골에 갈 때마다 보르마가 목회하는 교회를 찾아가 함께 은혜를 나눈다. 나 뿐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곳에 가면 큰 감동을 받고 돌아온다. 역파송의 위력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돈에 끌려 다닐 수 있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끝까지 배신하지 않고 보르마는 소중하게 쓰임 받는 역파송 선교사의 모델이 되고 있다.

바로 그곳 몽골 보르마 목사가 섬기는 교회에 뉴라이프 비전스쿨 12기를 수료한 고금석 집사님 내외분이 동역하고 있다. 역파송 선교사와 뉴라이프 은퇴자 선교사가 동역하는 선교 모델이다. 그동안 가장 큰 시너지가 일어날 수 있는 선교가 역파송과 뉴라이프 선교사의 융합모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 모델이 지금 몽골 울란바타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호잣트와 역파송 그리고 무슬림 난민 사역

이미 앞에서 언급한 호잣트 선교사는 전형적인 역파송 선교사다. 그는 이란인이지만 지금은 한국 국적을 가진 어엿한 한국인이다. 하지만 그가 역파송된 곳은 이란이 아니다. 터키의 이스탄불지역이다. 이 또한 역파송 선교의 또 다른 모델이다. 터키와 이란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성서의 아라랏산이 있었다는 반(Van)지역이 이란과 터키의 국경지대다. 이들 두 국가는 같은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비자가 없이도 출입국이 가능한 나라들이다.

미국에 의하여 약 30여 년간 경제 봉쇄를 당한 이란은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수많은 경제난민들이 터키로 들어와 난민으로 유럽까지 흘러간다. 터키는 이란인들에게는 유일하게 탈출할 수 있는 징검다리 국가인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터키에는 한때 약 200만 명의 이란인들이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언제든지 수시로 입국이 가능한 국가이니 이란인들에게 터키는 그나마 희망의 공간이다.

호잣트는 1990년대 초반에 일찍이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다. 그는 전형적인 무슬림 가정에서 자라나 이슬람의 문화와 코란에 익숙한 무슬림이었다. 그는 강변역 시절 우리공동체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한국어를 배우고 성경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을 갖게된 사람이다. 역파송 선교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빨리 알아차릴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워낙 많은 이주민 나그네들을 만나면서 갖게 된 통찰력 때문이었을까? 나는 호잣트를 처음 만나면서부터 그가 대단히 중요한 인물임을 확신했다.

잘생긴 외모와 부드러운 품성 그리고 사람에게 신뢰를 주는 말과 인격까지 모든 것이 예비된 사람이었다. 그에게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집중적으로 그를 훈련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는 종교난민 지위를 얻게하는 것이었다. 종교난민은 우리나라에서는 주지 않는 난민지위다. 우리나라가 기독교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슬림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했다고 해도 우리나라가 종교난민지위를 줄 이유는 없다. 그러나 호잣트와 우리는 도전했고 200412월 기적같이 우리나라 최초의 종교난민지위를 얻었다.

그리고 곧바로 서울장신대 야간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시작했다. 낮에는 성수동 인쇄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신학을 공부하는 신학생이 된 것이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러나 감사하게도 호잣트는 단 한 번도 불평하거나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하나님의 은혜로 잘 하고 있다는 말로 대신했다. 야간 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장신대 신대원에 입학하여 무사히 졸업하기까지 장장 7년 이상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호잣트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동포 형제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201310월 그는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날 담임목사로서 그에게 목사안수를 주면서 얼마나 감격적인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와 나는 그 감격과 은혜를 느낄 수 있었다. 무슬림 이주노동자가 기독교인이 되고 다시 종교난민지위를 얻어 신학교를 다니고 장장 7년 이상의 시간 동안 신학수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고통스러웠겠는가! 하지만 그는 그것을 극복했고 그와 더불어 나또한 학비를 대고 때로는 생활비를 만들고, 힘들어 하면 힘을 내라고 위로하면서 끝까지 함께 하였다.

돈이 없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고 그런 날이면 혹시 포기하고 떠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였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그를 위하여 기도 했고 그래서 마지막 그가 하나님 앞에서 위대하게 쓰임 받는 꿈을 꾸며 혼자 웃기도 했다. 그렇게 공부하고 준비된 호잣트가 목사가 되는 날 나는 울어야 했다. 슬퍼서가 아니라 너무도 감사하고 고마워서 한없이 눈물이 났다.

호잣트를 이란이 아닌 터키의 이스탄불로 역파송하기로 결단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가 이란에 갈수 없는 종교난민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아무리 한국국적을 취득한 이란계 한국인이라 할지라도 이란으로 들어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란으로의 역파송을 고집하였다면 종교적 이유로 언제든 테러를 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란이 아닌 터키라 확신하였기에 우리는 그를 터키로 역파송 하였다.

터키에는 이미 이란에서 찾아온 수많은 난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때 나는 호잣트 가정을 데리고 터키를 순례하면서 곳곳에 수많은 이란인들이 와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드디어 2014년 호잣트 가정은 터키로 역파송 되었다. 사모와 두 자녀 등 네 식구가 터키로 떠났다. 마치 집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가던 야곱이 떠올랐다. 야곱은 그의 집을 나온 지 20년이 훨씬 지나 형 에서와 만나기 위하여 가족을 데리고 얍복강을 건너갔었다. 야곱의 그 모습처럼 호잣트도 자신의 고향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터키로 역파송 선교사가 되어 돌아갔다. 이스라엘의 시조가 된 야곱처럼 그도 이란이씨(李氏)의 시조가 되어 당당하게 한 일가를 이루고 돌아갔다. 지금 그는 역파송 선교사로서 위대하게 쓰임 받는 삶을 살고 있다.

 

내가 호잣트를 가장 성공적이며 의미있는 역파송 선교사의 사례로 소개하는 이유가 또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바 있지만 지금 전세계는 이주민의 시대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특별히 무슬림 선교는 이주민을 통한 선교가 가장 효과적이며 확실한 전략이다. 호잣트 선교사가 가장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무슬림 선교의 가장 분명한 사례가 호잣트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다시 터키와 그리스에 몰려드는 난민들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수백 만 명의 무슬림 난민들이 터키와 그리스를 경유하여 유럽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정치 경제적 관점에서부터 선교적 관점까지 난민들을 바라보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그들이 드나드는 길목에 호잣트라는 사람 낚는 어부가 그곳에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호잣트와 그의 가족이 터키 이스탄불에 역파송 선교사로 살기 시작한 지 이제 만 3년이 지났다. 이것이 우연한 일일까? 아니다. 이것은 필연이다. 정확히 시간과 공간이 겹치는 곳에 호잣트라는 무슬림 난민 출신의 역파송 선교사가 있다. 세밀한 섭리와 계획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슬림들은 오직 길 위로 나왔을 때에야 비로소 선교가 가능하다. 지금 그 길목이 터키와 그리스다. 그곳에 호잣트가 있다. 바로 지금 그곳에서 그는 그물을 치며 고기 잡는 어부처럼 길목을 드나드는 난민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호잣트는 한국인이다. 한국국적을 취득했으니 한국인이 맞다. 뿐만아니라 그의 아내와 아이들 모두 한국인이다.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말을 하며 그곳에서 선교를 한다. 이제 이곳에서 시니어 뉴라이프 선교사가 가면 되는 것이다. 역파송 선교사와 뉴라이프 선교사가 융합하면 기막힌 선교가 일어날 것이다. 시너지가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만나는 은퇴자들에게 지금 곧바로 터키와 그리스로 떠나라고 권유한다. 몇 번의 무슬림 난민 선교를 하면서 은퇴자들이야말로 가장 존귀한 선교사가 될 수 있는 자원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언어의 문제를 걱정한다. 그러나 걱정 없다. 호잣트와 그의 가족이 한국인이 아니던가! ‘역파송 선교란한국적 문화와 신학과 교회의 터전위에 훈련받은 현지인이 선교사가 되어 자신의 민족에게로 돌아간 경우이다. 현지인이면서 한국인인 것이다. 한국말을 포함한 두 언어에 능통하며 한국의 은퇴자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역파송 선교사가 있다.

뉴라이프 선교사들이여! 두려워 마십시오. 역파송 선교사와 함께 하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여러분은 큰 힘이 되는 우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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