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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는 없다6. 동대문이 땅끝이다

동대문이 땅끝이다

동대문이 땅끝이라고 말하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동대문이 서울 한복판에 있는 곳인데 무슨 땅끝이냐는 것이다. 하긴 그런 고정관념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

한국 사람들에게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단일민족국가라는 자부심이 강하다는 것이다. 즉 민족과 국가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분리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민족과 국가에 대한 개념이 불확실하며 이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하여 잘 모르고 살아왔다. 단일민족국가론은 유신시대의 지배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만든 단일민족국가론은 우리가 전세계에서 유일한 단일민족국가라는 자부심을 갖도록 만들었으며, 이것은 우리를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하려는 지배통치 이념으로 작동된 것이다.

하나의 민족이 대한민국이라는 한 국가를 만들었다는 이 논리가 우리에게는 대단한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는데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세계화와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야하는 21세기에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단일민족국가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전자속에는 남방 쪽과 북방 쪽의 유전자가 혼합되어 있다. 남방 쪽은 아마도 남방해양민족의 침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며, 북방 쪽은 북방이민족의 끝없는 침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 민족의 뿌리가 저 시베리아 바이칼로부터 몽골초원과 유라시아 대초원으로부터 이동한 민족일 것이라는 추론까지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다.

뿐만아니라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는 다양한 민족의 유입이 있었음이 증명되기도 한다. 신라의 수도였던 지금의 울산지역을 포함한 경주지역에는 적어도 100만 명의 인구가 밀집되어 살았으며 그들 안에는 이슬람을 신봉하던 상당한 무슬림들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처용가이다. 지금도 경주 외곽의 어느 곳에는 당시의 무슬림들이 묻혀있는 무덤이 있다고 한다. 신라와 교역하던 당나라는 이미 세계화의 중심이었고 수많은 국제 무역과 인적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도 그런 다양한 문화와 종교 혹은 사람들까지 몰려들었음은 분명하다.

통일신라이후 고려시대에는 또 어떠했을까? 1206년 칭기즈칸의 몽골제국 이후 전세계는 몽골이라는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1271년에는 칭기즈칸의 손자였던 쿠빌라이칸이 중국에 원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지금의 북경으로 옮겨왔다.

고려의 무신정권이 한창이던 우리나라는 자연스럽게 원나라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골제국의 중심이던 원나라의 공주들이 고려왕의 왕비가 되었고 고려는 그들의 부마국이 되었다. 몽골 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나라에 수많은 몽골인들이 들어오고 있었다는 말이다. 당시 지금의 제주도는 몽골말을 키우는 목장으로 둔갑했고 많은 몽골 군사들이 들어와 일본정벌을 준비하던 곳이다. 지금도 제주도에는 몽골의 언어와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고려후기에 이르러는 몽골인들 뿐만아니라 많은 무슬림들이 우리 안에서 섞여 살았고 그들 중 상당수는 우리의 성씨를 갖기도 하였다. 명나라가 등장하고 고려가 무너지고 다시 조선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한반도 북방의 여진족과 같은 또 다른 유목민족이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이성계의 최측근 장수 중 여진족의 장군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조선조가 시작되면서 우리 안에는 다양한 이방인들이 존속하게 되었고 그 이방인들 중 상당수가 북방출신의 유목민이었다. 유목민의 직업은 농업이 아니라 목축을 비롯하여 가축과 관련된 일이었음은 당연하다. 조선시대에 우리 안에서 목축을 하고 가축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이들을 소위 백정(白丁)이라 했으며 그 백정을 조선 후기에 천민집단으로 여긴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우리안의 이방인 그룹들을 백정이라는 직업을 주고 그들을 가장 낮은 천민집단으로 매도한 것이 우리안의 이방인들에 대한 태도였던 것이다.

조선시대를 지나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사람들에 의하여 거꾸로 야만인처럼 취급당하던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아픈 기억들인가?

 

그래서 출애굽기 2221절에는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지금도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겸손하고 낮은 태도로 우리안의 이방인 나그네들을 대해야 한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가 몽골과 일제의 지배를 받았고 그들로부터 얼마나 야만스러운 대접을 받았었던가를 기억하여야 한다.

 

일제강점기가 지나고 우리를 찾아온 것은 미국을 비롯한 유엔의 다국적 군대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휴전이라는 냉전은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미군이 주둔하던 곳에는 어김없이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기지촌에는 한국인 여성과 미군 사이의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졌으며 그 자녀들을 우리는 혼혈이라 불렀고 그것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기지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가족을 이중문화(cross culture) 가족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다문화(multi culture)라는 말과는 사뭇 다른 개념이다. 이중문화 가정과 그들의 자녀들에 대한 차별은 얼마나 심각했던가!

 

혼혈 혹은 혼혈아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그늘진 사각지대에서 살아야했다.

우리 사회에서 다문화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64월 미국의 슈퍼볼 스타가 된 하인즈 워드(Hines Ward)가 그의 한국인 어머니와 함께 고국을 방문하면서부터다. 다문화 사회는 한 나라의 인구 중 외국인의 숫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2%가 넘는 시점부터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외국인이 약 100만 명이 넘어선 시점부터 다문화사회라고 부르게 되는 것인데 그 시점이 하인즈 워드의 방문이 있었던 그 해부터였던 것이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이야기이인가!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 흑인병사의 사이에서 태어나 온갖 인권유린과 차별을 받으며 성장했던 한 청년이 성공하고 돌아온 그 시점이 우리 사회가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게 되는 시점이었다는 것이 말이다.

그 후로부터 우리 사회는 급속하게 다민족 사회를 넘어 다민족 다인종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2017년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220만 명의 이주민이 들어와 살고 있는데, 우리나라 인구의 약 5% 250만 명이 넘어서면 우리는 다문화 사회에서 다민족 다인종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주민의 유입은 시대적 흐름이며 트랜드이다.

우리나라는 전세계에서 가장 출산율이 낮은 나라이다. 2016년 현재 우리나라 젊은 부부의 출산율이 1.25명이라 하는데 이것은 OECDE 국가 중 가장 낮은 출산율이다. 게다가 고령사회를 지나 초고령사회가 되면서 경제활동인구 즉 노동가능인구가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다. 외국인근로자를 비롯한 이주민의 유입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나라의 이주민 정책은 획기적으로 바뀌어야한다. 더 많은 이주민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한 사회로 유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문화 이주민의 시대와 새로운 선교

나는 군목을 전역한 후, 1992년부터 구로공단에서 외국인 이주민 사역을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이 사역을 시작한 원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가 이주민 사역을 하게 된 것은 우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은총이며 섭리였다고 확신한다. 당시에는 갑자기 무슨 이주민 선교냐며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의 사람들이 나의 선택에 대하여 의아해 했었다. 하긴 나 자신도 내 앞길과 삶에 대하여 구체적인 확신을 갖고 시작한 일이 아니니 그런 의구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주민 사역은 다양한 선교적 접촉점을 만들 수 있다. 접촉점은 각자의 나그네 삶속에서 일어나는 아픔들과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인권문제와 더불어 생존권에 대한 상담과 해결노력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주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임금체불과 산재, 인권유린 등 다양한 문제점을 갖고 교회에 찾아온다. 이주민사역을 시작했던 당시 나는 그렇게 찾아온 이들을 만나 그들의 편에서 일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자연스럽게 선교적 접촉점을 만들 수 있었다.

때로 그들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로서 느끼는 시련과 고독 그리고 일상의 삶이 가져오는 무게 때문에 교회를 찾아오기도 한다.

우리 공동체에는 현재 많은 몽골인들이 찾아오고 있는데, 그 계기가 된 만남 즉 접촉점이 있었다. 이미 나의 첫 번째 책 나그네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2001,나그네출판사)에서도 언급된 바 있듯이 한 몽골여성의 상사병이 그녀와의 만남은 물론, 지금의 몽골선교를 가능하게 한 접촉점이 되었다. 성수동 지역에서 나섬의 사역을 하고 있던 1996년 어느 날 상사병으로 힘들어하던 한 몽골여성이 찾아와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했고 그녀의 고통은 다름 아닌 이란인 남자친구가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에게 급작스럽게 불법체류자로 붙잡혀 외국인 보호소에 갇혀 있게 된 사건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그를 한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하였다. 그녀 역시 불법체류자였으므로 그 만남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당시 휘경동에 있던 외국인 보호소까지 그녀를 데리고 가 기적처럼 이란인 남자친구를 면회할 수 있었다. 그 후 그 몽골자매는 매주일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그녀를 통하여 수많은 몽골인이 우리 공동체를 찾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몽골의 신문에 우리 공동체에 대한 기사가 실렸으며, 그 기사를 보고 아예 김포공항에서부터 가방을 끌고 우리 교회의 지하실로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다. 때로 우리 지하실은 그들이 가져다놓은 여행용 가방으로 가득 채워질 때도 있었다. 그때 거의 매일 그들에게 라면으로 점심을 대접했는데 거의 일년동안 라면을 먹은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우리 공동체에는 상당수의 네팔인들이 모였는데 그렇게 많은 네팔인을 선교하게 된 데도 하나의 접촉점이 있었다. 네팔인들과의 첫 만남은 특별했다.

1993년 여름 어느 날 네팔인 서너명이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한 네팔 형제가 갑자기 공장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죽은 네팔인 형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장주는 도대체 답이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곧바로 네팔 형제의 시신이 안치된 안양 석수동의 어느 병원을 찾아가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생각하며 그들을 도왔다. 공장에서는 끝까지 사장은 물론이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으며 네팔인 형제의 죽음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으려 했다. 나는 일단 장례를 연기하고 열흘 동안 시신과 함께 영안실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결국 공장 측과 700만원에 합의를 하게 되었다. 그 돈은 한 네팔인의 목숨과 같았다. 차마 그 돈을 장례비로 쓸 수 없어 몽땅 네팔의 가족들에게 보내고 나는 돈 한 푼 없이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적십자병원에서 영구차를 얻었고, 성남 화장장에 부탁하여 무료로 화장을 하였다. 화장 후, 네팔인 형제의 유골함을 들고 성남의 시골길을 걸어 나오던 날,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우산도 없이 유골함을 들고 비를 맞으며 논둑길을 걸어 나오면서 나는 무척 많이 울었다.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너무 슬펐고 가슴이 아팠다. 내가 울면서 유골을 들고 나오는 모습을 네팔 사람들이 바라보며 내 뒤를 따라왔었다. 그 후로 그들은 수시로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한번은 많은 네팔인들이 한꺼번에 나를 찾아왔다. 다름 아닌 그들의 돈이 검찰청에 압수되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네팔 사람들은 공장에서 일하고 번 돈을 은행을 통하여 송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송금 브로커를 통하여 네팔의 가족들에게 보내고 있었다. 네팔은 은행도 없었고 은행에 대한 신뢰가 없었음으로 송금 브로커가 돈을 모아 몰래 공항을 빠져나가곤 했던 것이다. 그 브로커는 태국의 방콕이나 홍콩 등에서 그 돈으로 물건을 사 네팔로 보내고, 다시 그 물건을 네팔에서 팔아 그 돈을 가족들에게 나누어주는 방법으로 송금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김포공항 검색에 걸려 붙잡힌 것이다. 140명의 네팔인의 돈이 압수되었고 브로커는 구속되었다. 외국환관리법을 어긴 것이다. 달러로 환전하여 20만 불이었다. 2억 원이라는 엄청난 돈이 압수되었다.

나는 네팔인들에게 자신의 이름과 맡긴 돈의 액수를 적게 하고 그 옆에 사인을 하도록 했다. 140명의 네팔인들이 모두 나를 대리인으로 위임하는 위임장에도 동의하는 사인을 했다. 나는 곧바로 검찰청이 있는 서초동으로 찾아가 담당 검사실로 들어갔다. 검사 앞에서 명함을 내밀고 찾아온 사연을 이야기 했다. 당시 내 나이는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다. 나는 검사라는 사람을 처음 만나보았다. 그는 내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 있었다.

 

"이 돈은 네팔인들의 피와 땀입니다. 이 돈은 네팔 노동자들의 가족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검사님, 도와주십시오."

 

나는 간절하게 부탁을 했다. 반드시 압수된 네팔 노동자들의 돈을 돌려받고 싶었다. 이 일은 나와 네팔인 친구들의 관계를 새롭게 세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 같았다. 검사는 내 말을 묵묵히 듣더니 곧바로 압수한 돈을 돌려주는 것이 아닌가! 자그마치 미화 20만 달러를 빳빳한 새 돈으로 내어줄 때 나는 얼마나 당황하고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던지! 이 검사라는 사람이 나를 어떻게 믿고 이 돈을 돌려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나는 갖고 온 가방에 돈을 넣고는 둘러메었다. 가슴이 뛰고 덜컥 겁이 났다. 누군가 나를 따라오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내 사무실에는 네팔인들이 몰려와 서성이고 있었다. 내가 압수된 돈을 가지고 들어서자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내 손을 붙잡고 감사하다고 연신 인사를 했다. 돈을 다 돌려주고 나는 홀로 조용히 앉아 눈을 감고 생각했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날아갈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네팔인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아왔다. 자신들의 자조모임을 만드는 일에서부터 네팔 축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마다 나를 찾아와 상담을 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한국에 있던 네팔인들은 약 5,000명 정도였는데 대부분의 네팔인들이 나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이주민 선교는 삶의 공유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의 아픔과 문제를 공감하고 해결해 주면서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고 복음이 들어간다. 네팔인들은 그해 성탄절 세례식에서 처음으로 다섯명이 세례를 받았다. 나는 지금도 그들 중 기리라는 네팔 친구를 잊지 못한다. 세례를 받은 기리형제가 어느 날 나를 찾아왔었다.

 

"목사님, 저는 며칠 후 네팔로 돌아갑니다. 돌아가기 전에 제게 세례증을 써주십시오. 제가 네팔에 돌아가면 분명히 우리 마을에 선교사가 있을 텐데 제가 한국에서 예수를 믿고 세례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세례증이 필요합니다. 제가 돌아가면 우리 마을의 선교사를 도와 마을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도록 돕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네팔의 큰 부잣집 아들입니다. 한국에 온 것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많은 경험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우리 부모님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농들입니다. 그들은 제 말을 들을 것입니다. 교회에 나가자고 말하면 제 말을 듣고 교회에 나갈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그날 기리에게 세례증을 만들어 주었다. 지금 기리는 어디선가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사역을 하고 있으리라.

지난 201312월 마침 우리 공동체 최명국 장로님과 네팔에 갈 기회가 있었다. 그때에 한 네팔인을 만났는데 그는 네팔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와 대화를 하다가 한국말이 너무도 유창하여 어디서 이렇게 한국말을 배웠느냐고 물었다. 대답인즉 그는 한국에서 일하고 돌아온 이주 노동자 출신이라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밝혔다.

어디서 신앙생활을 했느냐 물으니 놀랍게도 내가 초창기에 섬기던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그는 그 당시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주민 선교는 세계선교의 지랫대라고 나는 주장한다. 더 나아가 세계선교의 못자리이며 미래 선교의 마지막 희망이고 대안이라고도 생각한다. 하나님은 길 위의 나그네들을 주목하고 계셨다. 어느 날 문득 이러한 하나님 나라 선교의 전략을 깨달았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나라를 확장하고 열어 가시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그의 후손들은 왜 길 위의 나그네로 살아야 했던가? 우리는 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르는데 그 디아스포라라는 말의 의미는 흩어진 씨알이라고 안다. 한곳에 머물며 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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