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취급방침
오시는길

TEL : 02-446-4195
FAX : 02-458-2982

서울시 광진구 광장로 1
(광장동 401-17)
나섬교회

COPYRIGHT© 2016
NASOMCHURCH
ALL RIGHTS RESERVED.



노마드톡

> 유해근목사 > 노마드톡
bible
   
성서와 노마드경제14 우연인가 필연인가?

여호수아 2 : 1 - 21

 

기생 라합의 기구한 운명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기생이라는 직업은 세상에서 가장 천한 계급이며 직업이었다. 가장 낮고 보잘 것 없는 기생이라는 존재는 그래서 소외와 버림받은 영혼이라는 딱지가 붙어 다닌다. 만약 우리의 조상 가운데 기생이 있었다면 당연히 그 여인의 이름을 족보에서 지워버렸으리라. 그러나 참으로 기이하게도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는 마태복음 1장에는 굳이 라합이라는 여리고성의 기생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니 그야말로 충격이다.

기생은 누구인가? 창녀다. 누구에게나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여인이다. 세상에 밥 먹고 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직업을 갖지만 기생이라는 직업은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버림받은 자들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직업이다. 그런 기생이 예수님의 할머니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 중 잊을 수 없는 여인이었기에 그렇게도 소중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이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 라합이라는 이름은 구원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기생이 구원자 메시아의 할머니가 되었다. 창녀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의 조상이 되었다. 왜 기생의 자궁을 통하여 그분이 세상에 오셔야 했는가? 그 의미는 무엇인가?

 

라합에게 찾아온 기회

 

여리고는 가나안 입구에 있는 오래된 도시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리고를 거쳐야 한다. 나는 얼마 전 여리고를 다녀왔다. 그날 발바닥 상처가 심하여 휠체어를 타고 다닐 만큼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팔레스타인의 아랍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난한 동네로 변한 여리고를 보았다.

작은 성 여리고에 남아있는 것은 오래된 유적지라는 팻말과 오고가는 관광객이 전부다. 한 아랍사람 관리인이 입구에서 여리고를 설명하고 사람들은 이곳이 여리고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찾을 수도 없는 그 허름한 언덕배기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날 여리고 성 입구에 홀로 앉아 그 당시 기생 라합을 생각했다. 만약 나라면 그날의 만남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가나안에 들어온 히브리 백성이 여리고성을 정탐하기 위해 두 사람을 여리고성에 보내었다. 여리고성에 들어온 두 사람이 마침 찾아간 곳이 라합이라는 기생집이었다. 적과의 동침이 이루어진 것이다.

적과 동침을 해본 적이 있는가? 아마 끔찍하고 놀라운 상상력이다.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특별한 상상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러한 상상을 초월하는 상황 속에서 바뀌어 간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세상을 구원하신다.

라합에게 찾아온 정탐꾼과의 만남은 언제나처럼 우연이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상의 만남이다. 라합에게 일어나는 일이란 일상의 만남 그 외의 것은 없었다. 언제나 매일같이 만나는 그 남자들이란 자신의 육체만을 탐하는 그런 단세포적이며 탐욕적인 인간들이다. 그곳은 하수구처럼 배설하고 떠나는 창녀의 집이다.

그런 라합의 집에 찾아온 정탐꾼들을 라합은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그것은 기회였다. 전혀 새로운 기회가 라합에게 찾아온 것이다.

라합은 그것을 알았다. 지금 기회가 왔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 라합은 결단한다. 그 기회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기회를 기회로 바라보는 눈

 

우리는 기회를 어떻게 알아보는가? 무엇으로 기회와 일상의 우연을 구별하는가? 사실 기회를 기회로 알아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영적인 통찰력과 민감한 분별력이 없이 기회를 알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알아보는 눈이 필요하다. 기회를 알아차리는 능력이 그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힘이다.

라합은 그런 능력을 갖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라합은 자신의 민족과 관계없는 세계사적인 흐름을 들었다. 그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거대한 물줄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기회의 순간이라고 믿었다.

광야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라합은 광야 가운데 살아가던 한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민족주의나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세계시민의 의식을 갖고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날 밤 자신의 집에 찾아온 정탐꾼들의 정체를 알아보았으며 그들이 기회를 갖고 온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한계 앞에 무너지고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떤 교육을 받았으며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 자라났는지가 오늘날 자신의 모습을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일상성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조금이라도 어색하거나 불확실한 것에는 함부로 뛰어들지 않고 머뭇거리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소시민의 보편적인 삶이다. 조금만 이상해도 처음 보는 음식에 손이 가지 않는 것처럼 이미 경험해 보았거나 익히 잘 아는 것이 아니라면 어울리려는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 보통의 우리다. 외국인 이주민에 대하여 그토록 차별과 편견이 심한 나라인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다. 단일민족국가라는 이상한 이데올로기에 중독되어 버린 우리 문화와 시선이 이주민과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큰 장벽이 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이방인과 어울릴 수 없는 우리의 독선과 폐쇄성이 이해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아왔기에 이방인 나그네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보통의 인생들은 그렇다. 이방인과 나그네에 대하여 문을 닫고 살아가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는 라합을 보아야 한다. 그녀는 특별한 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경계를 허물 수 있는 용기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라합은 다른 눈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비록 창녀의 몸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달랐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바라볼 수 있었다.

저 멀리 시내광야에서부터 모압 평야까지 무언가 큰 진동이 있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말로 다할 수 없는 경외감과 그분의 실체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그분이라면, 그 엄청난 소문이 진짜라면 더 이상 가망 없어 보이는 절망의 삶에도 희망의 빛이 드리울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늦은 밤 찾아온 두 정탐꾼을 보는 순간 라합에게는 전율이 일었다. 드디어 하나님의 소문이 자신에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면서 라합은 역사의 무대 위로 올라섰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기회가 왔다

 

한 인간의 실존과 하나님의 역사의 시간표가 교차하는 순간이 있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와 컴퓨터라는 문명이 만났듯이 그렇게 운명처럼 만나지는 그 순간이 기회의 시간이다. 나에게도 그런 시간표가 교차했다. 1990년대 냉전이라는 세계질서가 깨지고 세계화라는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세계화와 다문화라는 거대한 물결의 흐름이 교차하는 순간 나는 그 중심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회로 붙잡는 결단이 있었다.

목회자로서 운명처럼 다가오는 그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이 기회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을 때에 나는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라합이 민족을 배반했다고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을까? 과연 그녀의 배반과 성서의 기록에는 어떤 충돌도 없었을까? 아니다. 그녀는 그 배반자라는 낙인의 충격을 감당해야 했다.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는 배반자라는 낙인도 감당하여야 한다. 그 낙인보다 더 큰 상급을 위하여 그녀는 결단하고 또 결단했다. 기회는 그렇게 붙잡는 거다.

 

기회는 이것

 

우리에게 찾아온 기회는 무엇인가? 위기의 기회다. 숨가쁘게 나아가는 통일과 세계화와 이주민과 변화무쌍한 4차 산업혁명과 그런 변화의 한복판에서 오고가는 수많은 인간과 기회의 만남들이다.

라합처럼 광야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물밑의 거대한 물결이 흘러가는 역사의 방향을 주목하며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거대한 물결은 아마도 세계화와 4차 산업혁명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통일이라는 우리만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다가오는 변화와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아내는 능력이다. 라합처럼 생각하고 라합처럼 주목하라.

 

우연인가 필연인가?

 

성공의 교과서에서는 우연처럼 다가오는 기회를 필연으로 만드는 사람이 주인공이라고 가르친다. 우연은 없다. 우연을 가장하거나 혹은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만이 존재할 뿐이다.

성공은 우연을 필연으로 바꿀 줄 아는 이들의 몫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나섬의 사역이 그랬고 몽골학교의 시작이 그러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필연이며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성공의 길잡이며 함께 그 길을 가야하는 소중한 만남들이었다.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성공의 길이라고 가르치신 분은 예수다. 그는 인간을 만나 어느 누구도 함부로 취급하시지 않으시면서 모두를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시려 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은 예수를 우연하게 만났지만 그 우연은 필연의 만남이 된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성공의 조건은 만남이다.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운명의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