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취급방침
오시는길

TEL : 02-446-4195
FAX : 02-458-2982

서울시 광진구 광장로 1
(광장동 401-17)
나섬교회

COPYRIGHT© 2016
NASOMCHURCH
ALL RIGHTS RESERVED.



노마드톡

> 유해근목사 > 노마드톡
bible
   
노마드톡155 일관성과 배반의 삶

   프랑스 출신의 실존주의 철학자이며 사상가인 장 폴 사르트르는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으로 체.게바라를 꼽았다.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 게바라라는 것이 그의 생각인 모양이다. 나도 게바라의 평전을 읽고 참으로 매력적이고 이상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의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남미대륙 여행을 통하여 고통 받는 민중들의 삶을 보았고 그 근본적인 원인이 독재와 제국주의라는 사실을 알고는 곧바로 쿠바혁명에 참가하여 카스트로와 함께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 후 쿠바에서의 안정적인 삶을 뿌리치고 다시 아프리카 수단 혁명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으며 나중에는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중 체포되어 미국의 CIA에 의하여 총살되었다. 지금도 젊은이들 중 게바라라는 이름과 함께 그의 덥수룩한 수염이 자란 얼굴이 새겨진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주 오래전 나는 게바라를 좋아했고 그의 혁명적 삶을 추종하기도 했다. 게바라처럼은 못하겠지만 비슷하게라도 따라 살아보겠노라 생각하며 신학생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새 나는 오십을 넘어 며느리를 보고 손자가 생기고 내 삶의 울타리가 만들어지면서 현실에 안주하며 늙어가고 있다.

한 인간이 태어나 죽는 날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꼿꼿하게 주어진 삶을 살고 끝까지 역사적 숙명을 자각하며 산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임을 알았다. 대표적으로 요즘 정치인들이 그렇게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듯하다. 과거에는 민주화 운동이니 인권 변호사니 하던 이들이 이제는 그 알량한 권력을 위하여 이념과 신념을 포기하고 우파이든 수구이든 가치보다 당장의 인기몰이에 매몰되어 망가져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인다. 특히 목회자가 한평생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겨야할 삶의 일관성을 잃어버리고 권력의 단맛에 머물며 평생 쌓은 명예와 가치를 쓰레기처럼 내팽개치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적인 연민마저 드는 것은 왜일까?

평생 스스로는 잘살아 왔다고 평가하고 싶었을 노년의 삶에 저렇게 냄새를 풍기며 망가져 가는 한 노욕의 목회자를 바라보면서 일관성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무엇이 우리를 패배하게 하는가? 처음부터 살고자했던 삶의 가치와 방향성을 송두리째 쓰레기 버리듯 아무렇지도 않게 포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평생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던 그 자랑스러운 삶을 완전히 무시하고 한순간 얼굴을 돌릴 수 있는 저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아니 이렇게 쉽게 변할 수 있는 그 가치와 신념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으며 가벼운 것이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적어도 목회자의 정치적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신앙 고백적 터전위에서만 그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정의와 진리 편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면 어떤 편향성을 가지셨을까를 고민하지 않는 정치적 참여는 어떤 변명으로도 동의해줄 수 없다. 적어도 만약 자기 자신의 정치적 소신이라는 미명하에 정당성을 얻고자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그가 정치적으로 높은 권력의 자리에 올랐다면 그것은 한국교회가 만들어준 명성과 터전 위에서 얻어진 것임으로 그 개인의 것이 아니다. 수많은 논쟁과 토론을 통하여만 그에게 주어질 수 있는 자리이다. 그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평가하게 할 수 있는 상징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한 목회자의 정치적 선택이 무슨 큰일이겠는가마는 지금의 현실 속에서 그 목회자의 선택은 한국교회에 대한 이념의 편향성을 드러나게 하는 객관적 사실을 담보하고 있음으로 대단히 위험한 결정이다. 그럼으로 그는 그의 자리에서 당장 내려오거나 아니면 교회나 목회자가 아닌 한 개인의 선택임을 강조하고 스스로 한국교회나 목회자와는 관계없음을 선언하여야 한다.

예수처럼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고 작은 자들과 함께 평생을 살고자 결단하고 시작한 목회와 인생이라면 주류의 언저리에는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말아야했다. 목회를 하면서 왜 우리 교회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까를 고민하는 목회자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강남이나 분당에서 개척을 하고 대형교회 주변에서 스펙 쌓는 목회에 전념했어야했다.

이방인이니 나그네니 하는 말들은 구차스러운 자기변명의 구실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이제부터라도 성공과 권력과 돈과 명성을 쫒아 그들끼리의 리그에 참여하는 것이 옳다.

오늘밤은 잠이 오지 않는다. 자주 보지도 않던 뉴스에 관심을 갖고 돌아가는 세상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내가 그토록 따르고 배우고자했던 전설 같은 한 선배 목회자의 타락과 한꺼번에 연기처럼 사라져가는 그의 평생의 삶이 안타까워 가슴이 답답해진다.

나이를 먹을수록 욕심은 내려놓고 명성도 좇지 않고 작은 시골마을 교회를 섬기거나 가난한 나라 소외된 이들의 친구로 남아 산다는 것이 그저 그림 같은 이야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관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욕심 때문이다. 욕망이라는 전차에 올라타는 순간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멈추지 못하고 질주하게 되어있다. 쌓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 목회자로서 일관성과 가치를 지키고 산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주류이기를 포기하고 아웃사이더로 살고자 했다면 주류에 열등감 갖지 않고 자존감 있는 삶을 살아야 일관성을 간직할 수 있다. 예수님이 어디 주류였던가? 그분보다 비주류는 역사에 없었다. 주류가 될 수 있었음에도 비주류의 삶을 선택하신 그분이 좋아 제자가 되고 목회자가 되었다면 예수의 길을 흉내라도 내면서 살아야 하리라.

 

 

 

 

 



hi